175화
외팔 헌터는 뒤늦게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크지도 않은 손인데 닿은 곳부터 전신에 소름이 쭉 내달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은 위압감에, 감히 뒤돌아 얼굴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 했다.
방금 뜬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릴 만큼 두려운 순간이었다.
실제로 죽을 지경에 이르더라도 지금만큼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굳어버린 헌터의 귓가에 조용한 목소리가 스쳤다.
“잘 버티셨어요.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맡을게요.”
여자? 누구지?
서지한도, 유은담도, 반서후도 아니다.
혼란과 두려움에 떠는 그를 그대로 뒤로 밀어내며 목소리의 주인이 앞으로 나섰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크기는 작을 것 같은 여자였다.
“아니, 제가 맡을게요.”
살짝 돌아보며 말하는 얼굴은 예상보다 훨씬 더 유순하고 어려 보였다.
얼어붙은 채 눈만 깜빡이는 자신을 내버려 둔 채 그녀는 빠르게 몬스터의 숫자를 줄여갔다.
마력계 헌터는 마력을 끌어올리느라 공격에 시간이 걸린다는 상식을 파괴하듯, 작은 손바닥에서 마치 기관총처럼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와 몬스터를 학살했다.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서 가장 용감한 몬스터조차 기를 못 펴고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모아 씨……?”
그런 손모아를 신 차장은 눈을 홉뜨고 응시했다.
믿을 수 없다.
왜 모아 씨가 여기에 있는 거지?
내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니겠지?
당장 위협이 되는 몬스터를 순식간에 정리한 손모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신 차장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 모아 씨! 진짜 모아 씨야? 나, 나는 죽은 줄로만 알고……."
예상치 못 한 인물의 등장에 손모아 또한 무척 놀랐다.
그러나 그 너머로 보이는 아비규환의 현장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차장님, 대리님. 오랜만이에요. 할 말이 많지만, 일단 여기 들어가서 좀 쉬고 계세요. 수다 떨기 좋은 자리가 아니네요.”
안 그래도 두 사람이 신경 쓰여서 찾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반갑게 다가선 손모아가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그러게. 정말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네.”
심상찮은 게이트의 모습에 김 대리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별다른 말 없이 게이트로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슬슬 눈치를 보다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모아 씨, 무사해야 해.”
"걱정 마세요.”
손모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신 차장이 진입하는 것을 끝으로 손모아는 게이트를 닫았다.
계속 열어둬서 다른 민간인이 대피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겠지만, 몬스터가 들어갈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다.
다시 전장으로 눈 돌린 손모아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랐다.
겁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귀가 먹먹했다.
도심에 뒤섞인 몬스터들.
그리고 도망치는, 죽어나가는 사람들.
“내가 이 꼴 안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바드득 이 가는 소리 뒤로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모아는 쉴 새 없이 충왕포를 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었다.
지상에 있는 몬스터를 보이는 대로 정리하던 손모아의 눈에 한 무리의 비행 몬스터 부대가 발견됐다.
충왕류다.
새우와 가재, 그리고 잠자리를 섞어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 여름의 날파리 떼를 연상시킬 만큼 무시무시한 숫자였다.
저 숫자가 그대로 학살을 시작하면, 30분 안에 이 지역은 초토화가 될 거다.
- 한 마리씩 잡아서는 답이 없는 숫자인데.
내내 옆에 있던 서지한이 중얼거렸다.
실체화 쿨타임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는 영혼 상태로 속만 태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충왕뇌우 쓰면 한 방에 잡을 수 있을 텐데. 그랬다간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한 방에 몰살당하겠죠.”
손모아는 일단 날개를 뽑아내 날아올랐다.
지상을 향해 계속해서 충왕포를 쏘면서 비행 몬스터를 경계하는 걸 늦추지 않았다.
- 그냥 수십 발 강하게 쏴서 관통시켜 보는 건 어때? 여력이 되겠어?
“여력이 안 되더라도 그게 효과적이면 어떻게든 해야죠.”
문득 바로 옆을 흐르고 있는 거대한 강이 대꾸하던 손모아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저기로 몬스터를 유인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저놈들이 ‘저기, 나랑 가서 저기서 한강물 한잔 하지 않을래?’한다고 해서 따라와 줄 리가 없었다.
- 음, 저쪽 선두에 있는 놈, 저 놈만 좀 다르게 생겼다?
“어디요? 제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 저쪽, 저기. 좀 작아서 잘 안 보일 수도 있어.
몬스터들과 싸우며 서지한이 가리킨 방향을 유심히 보던 손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어요. 좀 작은 녀석 맞죠?”
- 응. 혼자 색이 좀 노란데.
서지한의 말대로 마치 꿀벌처럼 샛노란 가슴 털에 짜리 몽땅한 배를 가진 몬스터가 보였다.
가재나 랍스터처럼 생긴 다른 놈들과 정말로 완전히 다르게 생긴 놈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손모아의 머리에 순간 섬광 같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벌레들이 집단으로 날아갈 때는 선봉장을 맡은한 마리를 따라간다고 들었어요.”
- 그래? 그럼 저 선봉장을 한강 쪽으로 유인하면 어떻게든 따라온다는 뜻이군. 그런데 어떻게 유인하지?
“선봉장 유인할 필요 없어요. 제가 그 역할, 빼앗을 거니까.”
당당하게 말한 손모아는 충왕 변이 스킬을 발동했다.
목 아래에 부숭부숭한 털이 자라나고 몸이 갑각으로 뒤덮였다.
이어서 빵이 부풀듯 몸의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매끈한 손발이 단단한 충왕의 앞다리로 변하고 부족한 다리들마저 옆구리에서 뻗어 나왔다.
잠시 후 그 자리에는 영락없는 충왕류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날벌레의 선봉장과 완전히 동일한 모습이었다.
옷을 입고 있는 것만 빼면.
- 모아야. 장비!
“아차, 까먹을 뻔했네.”
이어서 손모아가 장비 아이템의 투명화 기능을 활성화했다.
어색하게 충왕류의 몸을 덮고 있던 옷이 완전히 투명해져 사라졌다.
졸지에 알몸이 되었지만 손모아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옷만 투명화 할 수 있어서 편하네요.”
- 그러게. 아마 너처럼 변신 스킬이 있거나 투명화 스킬이 있는 헌터를 위한 건가 봐. 투명인간으로 변했는데 옷만 떠 있으면 이상할 거 아냐. S급 장비의 자존심에 상처 나는 거지.
“사소한 차이가 명품을 만드는 거죠.”
오래된 광고의 명언을 인용하며 손모아는 천천히 날아올랐다.
앞으로 뭘 할 건지 서지한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말이 없어도 오랫동안 함께 지낸 경험으로 서지한은 손모아의 생각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손모아가 몬스터 떼에 접근하자 기세 좋게 전진하던 그들이 멈칫했다.
거대한 무리에 혼란이 퍼져나가는 것을 잠시 기다린 후 손모아는 그대로 선봉장을 한 대 후려쳤다.
그리고 바로 등을 돌려 한강 쪽으로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리등절해 하던 충왕류였지만 곧 손모아의 뒤를 따라 날기 시작했다.
진짜 선봉장 역할을 하던 몬스터는 내심 ‘내가 뭔가 방향을 착각했나?’하고 고민했다.
하긴, 그동안 지시사항이 변경됐을지도 모른다.
대꾸도 안 하고 말 한마디 안 하는 저 새로운 동료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성격이 더러운 놈인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 그래, 이렇게 빨리빨리 움직이면 저쪽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거든. 생각할 시간 안 주고 빠르게 잘 움직였어.
손모아는 서지한의 말에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위장이 탄로 난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날개에 힘을 줘 빠르게 한강으로 향했다.
수천, 수만 마리의 충왕류 군단이 새카맣게 하늘을 나는 것은 무시무시할 만큼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손모아가 있었다.
마침내 모든 충왕류가 한강 위로 들어온 순간 손모아가 돌아섰다.
파괴할 것도, 학살할 것도 없는 여기에 왜 멈춘 거지?
충왕류들이 의아해하는 순간, 새로운 선봉장의 입에서 알아듣지 못할 말이 흘러나왔다.
“여기까지 죽으러 오느라 고생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새 선봉장의 이마에 처음 보는 뿔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왕이라고?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는 충왕에 대한 경고를 하지 않았는데?
인왕이라는 메시지가 뜨긴 했지만, 설마 저 녀석이……?
하지만 저놈 생긴 게 완전히 우리랑 같은데? 젠장! 일단 도망쳐야겠다.
경악한 충왕류들이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발악은 이미 한참은 늦은 것이었다.
“잘 가.”
우우웅 콰아앙!
서울의 초저녁을 물들이는 광휘가 한강 위로 쏟아졌다.
도망치던 사람들도 순간적으로 그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빗발치는 전격의 소나기.
뇌우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루팅은 못하겠네요.”
한강의 수면을 때리는 수천구의 충왕류 시신을 내려다보며 손모아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압도적인 무위를 보였음에도 손모아의 얼굴에서는 뿌듯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강변에 널브러진 민간인의 시신을 향한 눈동자에 서글픔이 차올랐다.
“얼마나 강해져야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손모아는 그저 슬펐다.
서지한은 마치 허깨비처럼 그 옆에 서서 닿지 않는 손으로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도닥였다.
- 네 탓이 아니야. 충분히 많이 했어. 피곤하지는 않아?
“피곤해요.”
방금까지도 타국의 전장에 있다 가다 급한 요청에 바로 한국으로 온 참이었다.
쫓기듯 치열하게 싸워온 탓에 기사조차 확인할 시간이 없었던지라 한국의 상황도 뒤늦게 파악하고 말았다.
그 외팔 헌터의 요청을 받고 바로 오지 않았다면, 신 차장과 김 대리도 죽었을 것이다.
- 너무 무리하지 마.
마력은 간당간당하고 하루를 꼬박 새워서 싸워댄 탓에 체력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서지한의 목소리에 손모아는 도리어 불타올랐다.
“아니요. 이럴 때는 무리해야 해요.”
- 모아야.
“무리해야 하는 거예요.”
서지한은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를 잠시 바라본 손모아가 바로 소통 유과 한쪽을 꺼냈다.
거기에 붙어 있는 메모를 확인한 뒤 유과를 한 입에 삼켰다.
반서진과 이어지는 소통 유과였다.
“반서진 씨, 지금 한국에 있어요?”
"어, 너 근처에 있어. 방금 번쩍하는 거 봤다. 장난 아니던데?”
"그러면 제 위치 아시겠네요. 지금 체력 얼마나 있어요?”
“그렇게 많지는 않아. 솔직히 죽을 것 같다. 으, 스킬 위력도 떨어져서 이제 염력으로 죽이기도 힘들어. 사실상 하나씩 육탄전으로 잡고 있어.”
"몬스터 죽이는 거 말고 단순히 띄우는 건 체력 덜 들죠?”
"그렇지. 무게만 감당하면 되니까 갑각 부술 정도로 힘쓰는 거보다 확실히 편하지?”
“그러면 제가 있는 쪽으로 지상 몬스터들 모아서 염력으로 띄워 두시고 제가 말하면 한강 쪽, 사람 없는 데로 보내주세요. 충왕뇌우로 소탕할게요. 그리고 비행하는 충왕류 보이면 말해주시고요. 제가 유인할 수 있으니까요!”
“오, 그거 좋지! 연계 작전궁합 좋아 보이는데? 아, 그리고 비행하는 충왕류 한 부대 더 온다. 석촌호수 방향에서 올림픽공원 쪽으로 이동하고 있어.”
“네, 확인했어요. 그쪽으로 갈게요.”
반서진에게 지시를 마치자 이번에는 유은담으로부터의 연락이 날아들었다.
“누나! 지금 고도 높여서 전체 상황 모니터링 중인데, 몬스터들 어디서 나오는 건지 확인했어요. 일단은 던전 관리청에서 제일 많이 나오고요. 여기저기 곳곳에서 솟아나고 있는데, 아무래도 누군가가 모여서 포탈을 열어둔 것 같아요.”
"알았어. 서지한 씨, 실체화하려면 얼마나 남았어요?”
- 한 10분 정도?
“그러면 지금 바로 던전 관리청으로 이동해서 실체화하는 대로 포탈 부숴 주세요.”
- 너는?
“저는 여기서 아까 한 대로 충왕류 계속 유인해서 죽일게요. 그게 시간 대비 많은 숫자를 죽일 수 있는 것 같아요.”
- 그래, 몸조심해.
“저 강하잖아요. 걱정 마세요.”
서지한이 투명한 몸 그대로 둥둥 날아 던전 관리청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멀어지는 그 모습을 바라본 후 다시 손모아의 시선이 허공을 훑었다.
반서진이 말한 충왕류 떼를 찾는 것이었다.
비명과 폭음,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마력으로 인한 현기 증속에서 손모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그녀의 귓가에는 방금 들은 유은담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누군가가 몬스터를 포탈로 한국에 불러들이고 있다 이거지?
이게 단순히 사고가 아니라, 이런 상황을 의도하고 바라는 놈이 있다는 거지?
왜? 대체 왜? 뭘 위해서?
분노와 참담함 속에서 손모아는 고개를 들었다.
유은담과의 소통 유과 지속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은담아.”
“우와앗, 으. 네? 누나, 왜요?”
"누가 포탈로 몬스터들 소환하고 있는 거, 확실하지?”
“아, 네. 진짜 개새끼죠? 위치는 찾았는데 결계 때문에 제 공격이 안 통해요. 누나가 가줄 수 있어요?”
"여기 마무리되면 바로 갈게. 서지한 씨도 갈 테니까 나랑 안 겹치게 위치 알려줘. 한두 군데 아니지?”
"……네. 엄청 많아요.”
"그래.”
손모아는 크게 심호흡했다.
속으로 이를 갈면서 그녀는 한강변의 몬스터를 죽여 나갔다.
진짜로 죽이고 싶은 자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은담아.”
“네?”
“누가 이 일을 벌였는지 알고 싶어. 조사할 수 있지?”
“네? 네, 무, 물론이죠.”
"고마워. 나, 누군지 알고 싶어. 꼭 알아야겠어. 왜 그랬는지도.”
왜냐면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