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 * *
아직은 평화로운 대한민국의 한 공원 산책로.
한 무리의 남자 고등학생이 시시콜콜 떠들며 느긋하게 하교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비슷한 차림의 학생들이 학원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좀 이른 퇴근을 한 직장인, 오후 운동을 하러 나온 시민들이 심심찮게 공원을 걸어 다녔다.
“야, 어제 뉴스 봤냐?”
머리에 펌을 넣어 한껏 멋을 부린 남학생이 운을 띄웠다.
같이 걷던 친구들은 관심 없는 척 휴대폰을 보다가 슬쩍 시선을 던졌다.
“무슨 뉴스?”
자신에게 시선이 모인 것을 확인한 그가 만족스럽게 미소 짓더니 특종감이라도 되는 듯 넌지시 말했다.
“몬스터 나왔다는 뉴스 떴는데.”
"어디서?”
“뭐? 진짜?”
놀라기 충분한 소식이었다.
친구들의 반응을 흡족하게 지켜본 남학생이 뭔가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딘지는 잘 모르겠고. 지방 어디서 떴다는데? 이름 처음 듣는 지역이라.”
“서울 아냐?”
“서울은 아니었어.”
“그럼 됐어. 남일.”
천연덕스럽게 대답한 친구 하나가 그대로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반응의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는지 세 명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야, 근데 진짜 서울에도 뜨면 어쩌지?”
웃음이 잦아들 무렵, 가장 머리를 짧게 자른 남학생이 갑자기 걱정이 되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조롱이었다.
“아, 쫄보 새끼. 졸았냐? 헌터들이 잡겠지 뭐. 그리고 떠도 나는 상관없어.”
“너같이 낮은 데 살면 위험하겠지만 우리 집은 고층이라 몬스터 나와도 안전함.”
다시 짧은 폭소가 찾아왔다.
웃지 않는 건 낮은 층에 사는 남학생뿐이었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괜히 또 놀림을 받을까 봐 필사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날아다니는 몬스터도 있다는데? 그리고 몬스터 나타나면 밖에도 못 나가잖아. 생필품이나 식료품 같은 건 어떻게 살 건데?”
짧은 머리 남학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갈색머리 남학생이 끼어들었다.
“배달시키면 되지.”
“배달하는 사람이 올까? 몬스터 돌아다니니까 위험해서 안 올걸.”
"오겠지. 걔네 가난해서 돈 벌어야 되잖아. 굶어 죽든가 몬스터한테 죽든가 걔네한테는 똑같은 거 아냐?”
"오, 개 똑똑해.”
다른 친구 하나가 맞장구를 치자 가난 운운했던 남학생이 뼈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머리 남학생은 순간 ‘이건 뭔가 아니지 않나’했지만 그대로 침묵했다.
“야, 근데 얘 진짜 쫄았나 본데? 걱정하는 거 보니까. 야, 쫄았냐? 응? 쫄았냐고.”
펌을 한 남학생이 깐죽대자 순간 짧은 머리가 약간 울컥했다가 금방 표정을 수습했다.
“아닌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그래? 형이 한번 믿어준다. 귀여운 새끼.”
펌 한 머리가 가소롭다는 듯 잠시 흘겨보더니 곧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대로 조용하게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내내 입을 닫고 있다가가 난 운운하던 친구였다.
“근데 어차피 나오더라도 헌터들이 잡아주겠지. 서지한도 있잖아. 졸라 세지 않나?”
“의외로 허접인 거 아냐? 실제로 지금 뭐 하고 다닌다는 뉴스도 없잖아.”
“그런가?”
완전히 입을 다물어버린 짧은 머리를 제외하고 두 사람이 계속해서 흥미로운 듯 대화를 이어갔다.
“야 근데, 좀 수상하지 않냐?”
펌 한 머리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가?”
“그 천공 길드 길드장이 던전 닫으라고 경고했었잖아.”
“반서후?”
“어. 걔랑 서지한이랑 원래 친구인 건 알지? 그럼 서지한도 이거 알고 있었겠지? 그럼 이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서지한 그 새끼, 혹시 몬스터랑 결탁한 거 아냐? 걔가 몬스터들 나올 수 있게 풀어준 거 아닌가 의심된단 말이지.”
“진짜 그런 것도 할 수 있나?”
갈색머리가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펌 한 머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모르지. 각성자 아니니까. 근데 랭킹 1위잖아. 뭐든 방법 찾아서 한 거 아냐?”
“그럼 몬스터들 나온다는 사실은 왜 사람들한테 알려준 건데? 경고 안 하고 기습하는 게 더 좋았을 거 아냐.”
"혼란스러워졌으면 하거나, 뭐 그랬던 거 아냐? 나도 잘 몰라.”
"흠. 듣고 보니 그럴듯한 거 같기도 하고. 아, 그거랑 비슷한 댓글 본거 같아.”
“그렇지? 나도 그 댓글 봤는데 참신하더라고.”
두 남학생은 한참 동안 인터넷에서 본 기사나 댓글을 인용하며 음모론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중, 펌 머리가 순간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공원 한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기 시작했다.
“왜? 뭐 봐?”
따라서 시선을 옮긴 나머지 두 남학생이 발견한 것은 작은 무료 급식 트럭이었다.
그 앞에는 길게 줄을 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짧은 머리 남학생이 별생각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귓가에 차가운 목소리가 닿았다.
“어디서 거지 냄새가 나나 했더니.”
"웩, 무슨 대로변에서 저런 걸 하고 있어? 음식 냄새나게. 민폐인 거 모르나?”
“알면 저렇게 살겠냐? 나라면 저렇게 사느니 죽고 만다.”
“나도. 인생을 얼마나 개판으로 살았으면 저 나이 먹고 저러고 사냐?”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명문고 재학, 해외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살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역경 없는 삶이 키워준 오만을 거침없이 입 밖으로 내던 그들은 자신들을 노려보는 ‘거지’들의 시선에 순간 찔끔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의 힘은 때로는 칼보다 강력하다.
배식을 하던 자원봉사자, 이미 밥을 먹던 사람, 그리고 줄을 선 사람들의 노려보는 시선은 새파란 고등학생이 견뎌내기에 좀 버거운 감이 있었다.
결국 남학생들은 무료급식소를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거리가 좀 벌어진 다음에는 ‘뭘 째려봐. 확 패 버릴라’같은 허세 어린 소리를 하기도 했으나 그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한껏 작아진 상태였다.
“……쟤네 말하는 거 들었어요?”
고등학생 무리가 한참 멀어졌는데도 그 등짝을 매섭게 노려보던 김 대리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철없는 소리지.”
무심하게 대꾸한 신 차장이 국통에서 국을 잔뜩 퍼서 식판에 담아 주었다.
그러곤 김 대리를 턱짓하며 재촉했다.
“줄 밀리잖아. 어서 드려.”
"아, 맞다. 죄송해요. 너무 빡 치는 말을 들어서.”
“나도 한 마디 하려다가 꾹 참았지. 다들 밥 먹는데 싸움 나면 시끄럽잖아.”
밥을 받던 사람이 허허 웃으며 슬쩍 끼어들었다.
“잘 참으셨어요. 몸도 불편하신데 해코지당하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내가 팔은 하나 없어도 다리는 튼튼해!”
헐렁하게 빈 한쪽 소매를 대신하듯 다른 팔을 기세 등등하게 흔들려던 그가 가까스로 멈칫했다.
그쪽 손에 식판을 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탓이다.
“에헤이, 팔이 하나면 좀 불편하긴 하단 말이야. 허허.”
“그럼 많이 드세요.”
“예에, 고마워요.”
인사를 주고받은 신 차장은 다시 부지런히 국을 뜨기 시작했다.
그 박자에 맞춰 다시 식판을 채워주던 김 대리가 심심했는지 슬쩍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서지한 헌터 이름 들으니까 모아 생각나네요.”
"그러게, 모아 씨한테는 정말……. 큰 빚을 졌는데.”
“모아 어머니한테 정말 안 가보실 거예요?”
“내가 무슨 낯으로 찾아뵙겠어. 괜히 가서 상처만 후벼 파게 될라.”
"……신 차장님 탓 아니잖아요.”
"내 탓 맞아. 내가 모아 씨 가입만 말렸어도 그런 일은 안 일어났을 거야.”
흐릿하게 중얼거리는 신 차장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괴로움이 묻어났다.
김 대리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한숨만 푹 쉬고 다시 바쁘게 손을 놀렸다.
신 차장은 애써 치미는 눈물을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아직도 종종 악몽을 꾼다.
그 던전,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던전으로 돌아가 그날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는 꿈이다.
꿈속에서의 신 차장은 팀장으로서 책임감을 다 하려고 모든 사람들을 포탈 안으로 내보낸 뒤 홀로 남았다.
그리고 어둡고 스산한 그 던전에서 홀로 떨며 두려움에 질린다.
동시에 깨닫는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살고 싶다고.
사실은 자신이 나가고 싶다고.
멀리서 몬스터가 나타나고 그 모습을 본 꿈속의 자신은 비명을 지른다.
그 비명소리에 잠에서 깨면 그 소리가 이어져 현실의 자신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방금까지 두렵기 짝이 없던 현실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신 차장은 그때 남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손모아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자신의 악몽이 모아에게는 현실이었다.
혼자 던전에 남은 모아도 사실은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희생을 선택했다.
자신이 했어야 할 선택을 대신해주었다.
이어서 그 모아가 이제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면 신 차장은 견딜 수 없는 기분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런 밤에는 다시 잠이 들지도 못 하고 새벽까지 뜬 눈으로 날을 지새웠다.
그런 날이, 아주 많았다.
“내가 무슨 낯으로 모아 어머니를……."
모아는 백광 길드에 들어온 탓에 죽었다.
자신이 그 길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리고 들어와 달라고 권유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막상 가입하겠다고 할 때는 말리긴 했으나, 내심 모아가 와준 것이 기뻤기 때문에 그렇게 강하게 만류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 탓에 모아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신 차장이 하고 있는 자원봉사는 결국 그 속죄였다.
이들 중에는 던전 사태로 가족을 잃거나 크게 다친 사람, 헌터들에게 해코지를 당한 사람 등 사연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모두 던전으로 인해 삶이 힘들어진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끝. 오늘도 깔끔하게 딱 떨어지네요.”
줄 선 마지막 사람에게 고봉밥을 쌓아주며 김 대리가 뿌듯하게 웃었다.
신 차장 혼자 하게 할 수 없어서 성미에도 안 맞는 자원봉사에 따라나섰지만 은근히 적성에 잘 맞아서 즐겁게 하고 있었다.
“고생했어요.”
“고생은요. 재밌기만 한데요. 저 식당 차릴까 봐요. 사람들 밥 먹이는 거 재밌네.”
“그것도 괜찮지.”
배식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식기를 반납받아 정리하는 것뿐이다.
두 사람이 한숨 돌리며 간이 의자에 앉는 순간, 어디선가 사이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오늘 민방위 훈련 하나?”
김 대리의 혼잣말에 밥을 먹던 사람 중 한 명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훈련일 텐데 뭐. 신경 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