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지한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 말에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보니 다른 보스 몬스터를 마주쳤을 때 상태 이상 위압에 걸리지 않았던 것도 대충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엘파니스에게서 정식으로 던전을 인계받고 본격적으로 서지한과 보스 몬스터 공략을 다니던 무렵.
당시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그럼 그때부터 내가 나타나면 보스 몬스터 전용 알림 메시지가 나한테 붙어 다녔다 이거야?
“저 오면 그런 메시지 떴어요? 왜 지금까지는 말 안 해줬어요?”
"나한테는 안 떴어. 실제로 모든 헌터가 그 메시지를 본 건 아니고, 개중에도 약한 헌터들에게만 메시지가 보였다더군.”
“으음, 사실 나는 보스 몬스터한테 위압 걸린 적이 없어서.”
반서후와 서지한이 차례차례 대답했다.
그렇군, 하긴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르기스를 잡던 시기까지만 해도 상태 이상에 걸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이후 지르기스의 뿔을 먹고 충왕포를 업그레이드 한 이후부터 그런 상태 이상이 완전히 사라졌지.
“저도 꽤 강해졌나 봐요.”
어엿한 헌터가 된 것 같아서 뿌듯하게 중얼거리자 서지한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새삼스럽게? 너 엄청 강해. 그렇게 된 지도 좀 됐고.”
서지한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듣자 더욱 쑥스러워졌다.
랭킹 1위의 인정을 받아서 그런가? 아니, 다른 사람보다 서지한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부분이 기쁜 걸지도.
“아, 아까 이 기사 엠바고라고 했죠?”
“그래.”
반서후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쓰기만 하면 특종감인 기사인데 이게 엠바고에 걸렸다고?
저들 입장에선 딱히 발표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나?
“현장에 내가 있었다는 증언을 듣고 그쪽 업계 아는 사람이 나에게 연락이 왔더군. 일단 협상해서 엠바고로 넘겨달라고 요청했어.”
반서후 씨, 진짜 발이 넓으시군요.
"그런데 그걸 순순히 들어줬어요?”
반서후 씨, 의외로 아는 사람이 정말 많네.
내가 갔던 모든 현장의 헌터들이 ‘인왕 손모아’ 메시지를 접했다면 협상해야 했을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그래. 저들도 괜히 떠벌렸다가 좋을 거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왜요?”
“고급 정보니까. 네가 갔던 국가의 헌터들 중 일부만 이 정보를 입수했을 텐데, 혼란스러운 시기이니 뭐든 유리해 보이는 정보는 본인들만 가지고 있고 싶다는 거지. 한국 언론 쪽은 아무것도 모를 거다.”
사실이라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 하긴 한국에는 몬스터가 안 나타나서 제가 간 적이 없으니 다른 국가들이 입 다물어버리면 한국은 아무것도 모르겠네요.”
"맞아. 그리고 그 나라 헌터들도 현재 투입률 100%라 이 건에 대해 별도로 조사할 인력도 없는지 그냥 덮는 것 같더군. 게다가 지금 같은 비상사태에 이유 없이 도와주는 이쪽을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은 거겠지. 비위를 맞춰주겠다는 거야.”
반서후는 피곤한 듯 검지로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하, 그럼 이 엠바고는 언제까지 걸려 있는 거예요?”
“민간에서 소문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없을 테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거다. 만약 기사화되더라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되지는 않도록 협상해뒀어.”
어쩐지 아까 자고 나왔을 때 반서후가 안 보인다 싶었더니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인 모양이다.
성격적으로는 좀 안 맞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반서후는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언젠가는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대한 길드도 알게 된다 이거군요. 가족들 대피시켜야겠네요.”
"그러는 게 좋겠지."
짧게 대답한 반서후는 또 할 일이 있다며 휙 떠나버렸다.
나는 몇 시간이라도 잤는데, 그는 전혀 안 잔 것 같아서 좀 걱정된다.
“그런데, 반서후 씨 가족들은 괜찮을까요?”
내 가족들이 위협받는다면 나와 비슷하게 활동하고 있는 반서후나 유은담의 지인도 무사하지는 않을 거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입을 열자 서지한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쪽은 걱정 안 해도 돼. 혹시라도 대한 길드에서 뭔가 수작 부렸다간 종친회와 그 수많은 친인척의 지인, 사회적 인맥, 개인적 인맥으로 이어진 사람들을 전부 상대해야 할 걸. 벌집을 들쑤시진 않을 거야.”
“뭔가, 엄청 대단한 집안사람 같네요. 든든하겠어요.”
“음. 그렇지. 다만, 집에서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바로 귀환해야겠지만. 다행히 지금까지는 그런 말이 안 나오는 건지, 아니면 저 녀석이 무시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장단점이 있네요.”
반서진이 그렇게나 숨 막혀하던 집안이었지만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나쁜 점만 있다면 그걸 왜 유지하려고 할까.
뭐든 이득이 있으니 계속 지켜나가는 거겠지.
“그렇지. 최소한 인맥 부분에서는. 저 집안이 숨 막혀서 해외로 도피한 친인척도 꽤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이번 정보는 그쪽을 통해서 얻은 것 같네.”
“친인척이 그렇게 많은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요?”
“같은 나라에 사는 것도 싫다는 거지.”
“그렇게 싫어하는데 반서후 씨 부탁은 왜 들어준 걸까요.”
싫어하면서도 돕는 가족 간의 미묘한 정이라는 걸까?
으음, 하긴 나도 친척이 뭔가 부탁해오면 싫어하는 사람이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되도록 도와줄 것 같긴 하네.
“저래 봬도 저 녀석 윗사람에게는 늘 깍듯하거든.”
서지한이 싱긋 웃었다.
“흔히 말하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타입이에요?”
"응."
“반서후 씨 또래랑 결혼은 그른 것 같은데 연상으로 찾으면 꽤 승산이 있을지도요.”
“연상? 한 50세 이상으로?”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는 잠시 실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드문드문 웃기도 하고 야유하기도 했다.
앞으로 긴 싸움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짧은 웃음은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슬슬, 엄마한테 연락해보고 싸우러 가죠. 아, 엘파니스 씨한테 또 사람 들어올 거라고 전해주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시 구조해서 보내도 된다고 말해주고요.”
"알았어.”
서지한이 게이트를 열고 사라진 사이 나는 바로 엄마에게 연락했다.
엄마와 전에 나눠가진 소통 유과가 아직 꽤 여유 있게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던전 터지고 엄마한테서 연락이 전혀 없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불현듯 치미는 불안감을 안고 엄마와 연결되는 소통 유과를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아이템: 소통 유과’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아이템: 소통 유과’: 지속시간 10분 0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