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그러고는 바로 호숫가로 이동했다.
불타오르던 인근 마을은 화재가 진압되었는지 폐허가 되어 있긴 했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였다.
미처 대피하지 못 한 사람들이 좀 남아 있긴 했지만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았다.
유은담에게 들은 대로 집에는 엄폐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덕분에 평범한 숲으로 위장되어 있어서 누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집의 위치가 있을 만한 곳까지 접근하자 갑자기 눈앞에 익숙한 집이 확 나타났다.
“신기하네요.”
“편리하지.”
나도 마력계 헌터인데 왜 이런 걸 못하지?
나중에 은담이한테 어떻게 하는 건지 배워야겠다.
나는 바로 성역 결계를 펼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불과 이틀 정도 비웠을 뿐인데 무척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익숙하게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자 서지한이 자연스럽게 주스를 따라서 건네주었다.
“어디 보자, 한국 뉴스 포탈은 여전히 뉴스 속보로 난리네요.”
옆으로 살짝 비켜서 서지한이 앉을만한 공간을 내어주자 그가 머뭇거리다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나는 그에게 화면이 잘 보이도록 각도를 조정하면서 기사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속보〉 US, 한국군 파병 요청.
〈속보〉 사우디아라비아, 대피소 피난 대상 선별 결정에 잡음.
〈속보〉영국 대피소에서 비백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폭행 발생.
〈속보〉구조 활동 우선순위 선정에 인종차별 있다. 세계 인권위 문제 제기.
〈속보〉터키 국경 봉쇄, 지원 요청 잇따라.
〈속보〉전 세계 곳곳에서 통신 라인 두절 발생. 비상시 단파 방송 안내.
국제 탭은 여전히 난리였다.
어느 지역이 더 심하고 덜 심하다고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지역이 경고 표시로 새빨갰다.
나는 특히 심각해 보이는 지역 몇 개를 머릿속에 입력한 뒤 한국 지역뉴스 탭으로 이동했다.
대한 길드 헌터들 단체 소송, 던전 공략 권리를 보장하라.
A 중학교에서 급식 횡령 적발, 당국 파악에 나서…….
금년 채소 물가 하락, 시름하는 농민들.
던전 해방 사태로 수출길 막혀, 한국 경제에 드리운 암운.
〈사설〉 과연 한국은 정말로 안전지대인가?
정부, 공식 성명에서 헌터 서지한 직접 언급. 수배해제.
뭐랄까, 채소 물가가 하락하거나 수출을 못 하게 된 건 큰일이긴 하는데.
국제 기사에 비하면 엄청나게 평화롭게 보이는 뉴스들이다.
그나저나 마지막 기사가 신경 쓰이네.
“서지한 씨, 수배 해제됐대요. 성명 내용 궁금한데 한번 볼까요?”
"응? 난 괜찮지만, 네가 궁금하면 봐야지.”
“서지한 씨는 안 궁금해요?”
"저들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어차피 없어.”
“같이 협력하자거나……."
“우리가 일방적으로 돕는 거겠지. 그리고 그건 저들이랑 대화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하긴, 그런가.
괜히 대화하면서 이것저것 맞추면 더 골치 아플 수도 있지.
속으로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고.
하지만 뭐라고 했는지는 알고 싶어서 공식 성명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내용은 맥이 빠질 만큼 상투적인 것이었다.
국민의 생명권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아무튼 열심히 할 테니 국민들도 침착하게 대처해서 극복하자는 내용이다.
하긴 이 이상 무슨 내용을 더 쓰겠냐마는.
그래도 말미에 서지한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그의 앞으로 청구된 모든 비용과 처벌을 면제한다는 내용은 꽤 괜찮았다.
“댓글 봐도 돼요?”
“응? 괜찮아.”
스크롤을 계속 내리다 멈칫 묻자 서지한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대단하다.
지난날 헌터 관련 기사의 댓글은 기사 내용보다 서지한을 욕하는 것에 더욱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 정도로 욕을 먹으면 나는 댓글창을 여는 것조차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은데.
서지한은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진짜 괜찮은 거겠지?
hae**** 06:51:03
감정이야 어떻든 잘한 거는 잘했다고 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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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r**** 06:52:04
동의함.
⇧ 33 ⇩ 12
ragi**** 06:54:08
서지한헌터미안해!서지한헌터미안해!서지한헌터미안해!서지한헌터미안해!서지한헌터미안해!
⇧ 45 ⇩ 18
↳ ggok**** 06:52:04
시끄러워.
⇧ 52 ⇩ 2
↳ jon**** 06:52:04
예민충아미안해! 예민충아미안해! 예민충아미안해! 예민충아미안해!
⇧ 3 ⇩ 3
↳ na**** 06:52:04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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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qj**** 06:54:08
내가 말했잖아~ 서지한이 잘하는 거 맞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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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pgpd**** 06:52:04
님들 이 사람 지난 댓글 보기 해보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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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fn**** 06:52:04
서지한 사형 안 하면 국회에 불 지른다며? ㅋㅋ 태세 전환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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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djf**** 06:54:08
나는 민간인인데 서지한한테 고마움. 던전 있어봐야 헌터들이나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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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ds**** 06:54:08
던전 닫고 있다고 했을 때 솔직히 안심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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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jds**** 06:52:04
헌터 관련 일하는 민간인도 많은데? 실직자 어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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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jdf**** 06:54:08
던전 다 닫혀서 짤릴 때는 욕 엄청 했는데 덕분에 살았다. 이건 인정함. 던전 주변 환경미화 담당 직원이었는데 던전 터졌으면 나부터 죽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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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이었다면 절대 볼 수 없었을 서지한을 옹호하는 댓글들이 달려있었다.
여전히 거친 말들이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띄어서 나는 내심 서지한도 기뻐하지 않을까 그를 흘끔거렸다.
“왜?”
기대와 달리 서지한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하긴, 옹호하는 댓글만큼 그를 마음에 안 들어하는 댓글도 가득했다.
스크롤을 조금 더 내리자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이기적인 발언들이 난무했다.
byung**** 06:51:03
근데 미리 알았으면 던전 다 안 닫고 주변 통제만 해도 됐던 거 아냐? 너무 극단적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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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hf**** 06:52:04
니가 통제하던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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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dk**** 06:52:04
던전 통제가 장난인 줄 아나. 몬스터가 얼마나 많은데 걔네 튀어나오는 걸 다 통제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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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kdjf**** 06:52:04
진심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함?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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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ung**** 06:52:04
그건 헌터들이 알아서 생각해야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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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 06:51:03
지금이라도 서지한한테 사과해서 다행임. 보상금도 지불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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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in**** 06:52:04
그건 오버지 어차피 한국 던전은 다 닫혔으니까 서지한도 필요 없음 ㅋㅋ 수고했고 잘 가라.
⇧ 2 ⇩ 0
kang**** 06:51:03
보스 몬스터가 드랍한 아이템은 회수해야 한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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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 06:51:03
한국 던전 다 닫혀서 이제 헌터들 필요도 없는 데 왜 사과하는 거야? 사실 잘못하긴 했잖아. 국가재산인 던전을 막 닫고.
⇧ 45 ⇩ 23
↳ rain**** 06:52:04
아직도 이딴 소리 하는 놈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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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 06:51:03
던전 닫힌 거 아깝다.
⇧ 97 ⇩ 194
kang**** 06:51:03
던전 닫힌 거 아깝다 생각하는 애들 집 근처에 던전 터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추천
⇧ 142 ⇩ 2
치솟는 환멸감에 나는 바로 댓글창을 닫아버렸다.
그 이후 다른 기사들을 모두 살펴봤지만 다행히 내 이름은 없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활동하지 않아서 그런지 유은담이나 서지한이 보스 몬스터를 잡았다는 보도도 없었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우리를 알아채지 못 한 것 같네요.”
"으음."
“이대로 랭킹보드 점수만 잘 관리하면 굳이 가족들을 피난시킬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서지한 씨가 대한 길드 사람들 죽일 필요도 없을 것 같고요.”
후자에 힘을 실어 단호하게 말하자 그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랭크는 그렇다 쳐도 점수는 여유가 얼마나 있지?
보스 몬스터 한두 마리 정도는 더 잡아도 괜찮은가?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체크해둬야겠다.
다시 랭킹 보드를 열어 확인해 보니 아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은담이는 여전히 2위인데 반서후 씨 랭크가 엄청 떨어졌네요.”
"노느라 그런 거 아냐?”
"아니죠. 민간인들한테 보호막 쳐주느라 몬스터 토벌 기여도가 낮게 계산된 걸 거예요. 차라리 나한테도 타인한테 보호막 쳐줄 수 있는 스킬이 있었으면 그렇게 지원했을 텐데.”
“흐음. 얼마나 떨어졌는데?”
"원래 3위였는데 9위까지 떨어졌어요. 반서후 씨 속상하겠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대답은 의외의 장소에서 들려왔다.
소파 뒤에서 갑자기 반서후가 나타난 것이다.
“별로. 내 랭크에 관심이 많군. 더 중요한 고민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아니, 뭐야, 이 타이밍.
깜짝 놀라 멍하니 반서후를 쳐다보자 그가 자연스럽게 소파 앞으로 돌아와 우리 앞에 섰다.
어쩐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다.
그도 그간 고생이 많았는지 얼굴이 초췌해져 있었다.
“고민거리요?”
“네 이름이 나온 외신기사.”
"네?”
그는 얼어붙은 나에게 담담히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그러곤 지친 움직임으로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눈짓했다.
“읽어봐.”
나는 바쁘게 종이를 훑어보았다.
외신이라는 말 그대로 건네받은 종이는 온통 외국어뿐이었다.
그나마 영자로 적힌 것이 있어 살펴보니 짧은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영문으로 된 내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King Of Human, Moa Son.
더듬더듬 읽어보니 현장에 투입되었던 헌터들 중 일부가 King Of Human 이 갑자기 나타나 보스 몬스터를 죽이고 사라졌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또 다른 미스터리한 헌터 몇몇이 간헐적으로 현장에 나타난다고 적혀 있는 걸 보니 다른 사람들의 활동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방금까지 랭킹 보드에 이름이 없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물벼락이라도 맞은 느낌이다.
순식간에 차게 질리는 내 안색을 본 반서후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보도되지는 않았으니까 걱정 마라. 아직 엠바고 상태인 기사니까.”
그 말에 왜 인터넷 기사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이름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내 안색이 조금 나아졌는지 반서후가 쯧 혀를 찼다.
“그렇게 성대하게 싸워댔으니 아무도 모르고 지나가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그,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제 이름도 그렇고 인왕인 건 어떻게 알았을까요?”
워낙 정신없는 상황이었으니 누군가 ‘당신 누구야?’하고 묻는 질문에 무심코 대답해버렸나?
하지만 대답은 상상도 못 한 내용이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는군. 보스 몬스터가 나타날 때 뜨는 거랑 마찬가지로.”
“네? 무슨 시스템 메시지요?”
왜? 시스템 메시지가 저 사람들한테 내 이름을 왜 알려줘?
그런 자기소개 부탁한 적 없는 데?
‘손모아 등장!’ 뭐 이런 거라도 떴다는…….
아, 휴먼 킹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아니겠구나.
“상태 이상 알림 메시지라더군. 인왕 손모아의 등장으로 상태 이상 위압에 걸린다는 메시지.”
"네? 그건 보스 몬스터들이 나타날 때 뜨는 거잖아요. 저는 보스도 아니고……."
“아니, 모아 너 보스 맞잖아. 던전도 가지고 있는 어엿한 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