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 * *
무척 피곤해서 잠들면 10시간은 내리 잘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내가 잠든 것은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눈을 뜬 후 시계를 보니 대략 5시간 정도 잔 듯했다.
“벌써 일어났어?”
엘파니스의 이불을 반듯하게 개어놓고 방을 나오자 서지한이 귀신같이 눈치채고 바로 찾아왔다.
막 일어나서 잠이 덜 깬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모호한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으음……."
“좀 더 자도 돼. 몇 시간 되지도 않았어.”
서지한이 권유했지만 다시 눕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그가 엘파니스의 화로 위에 올려놓고 휘젓고 있는 것이 뭔지 신경 쓰였다.
저 화로는 엘파니스가 찻물을 데울 때 쓰는 물건인데.
“그건 뭐예요?”
“아, 이거? 갈비탕이야.”
"갈비탕? 먹고 싶었어요?”
"아니, 너 먹이려고. 더 안 잘 거면 여기 앉아.”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으니 서지한이 얼른 한 그릇을 가득 채워 내 앞에 내려놓았다.
갈비찜인지 갈비탕인지 모를 만큼 고기밖에 없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음식을 앞에 두니 뒤늦게 허기가 몰려왔다.
“서지한 씨는 안 먹어요?”
"나는 만들면서 많이 먹었어. 여기 숟가락.”
수저를 쥐여 준 서지한이 흐뭇한 표정으로 내 앞에 마주 앉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막 한 술 뜨려는데, 복도 옆 작은 방에서 유은담이 불쑥 튀어나왔다.
“으, 잘 잤다. 어. 누나 일어났네요?”
“은담이 안녕.”
“안녕하세요. 오, 밥이다. 진짜 배고팠는데 잘 됐다! 형, 나도 한 그릇 줘.”
반가운 얼굴로 유은담이 냉큼 내 옆자리에 앉았다.
순간 서지한의 눈썹이 꿈틀 하고 튀었지만, 그는 곧 한숨을 내쉬더니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 일어났다.
그리고 한 그릇 가득 채워 유은담의 앞에 내려놓았는데…….
“형. 이 갈비탕, 뼈밖에 없는데?”
아마 내 그릇에 쌓여 있는 고기에서 발라낸 것이 분명한 뼈가 유은담의 그릇에 가득 들어 있었다.
거기에 국물을 좀 넣었을 뿐 어떻게 봐도 갈비탕이 아닌 상태다.
“사골곰탕이야.”
태연한 서지한의 말에 유은담이 다시 자신의 그릇과 내 그릇을 번갈아보았다.
“이 뼈에 붙어 있어야 할 게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야.”
서지한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는데 유은담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지 화도 안 내고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국물이 투명한데……?”
"그런 버전이야.”
“……국물밖에 없는 데?”
"칼슘은 많이 들어 있어.”
"칼슘밖에 없는 것 같은데.”
"먹기 싫으면 먹지 마.”
그런 대화를 지켜보고도 내 그릇에 있는 고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먹을 만큼 염치가 없는 성격은 아니어서, 나는 조용히 내 그릇을 유은담에게 내밀었다.
“누나 고기 좀 가져갈래? 아직 수저 안 댔어.”
“네? 아, 아뇨. 괜찮아요.”
서지한의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남의 그릇에 있는 고기를 가져가고 싶지 않아서 그런지.
유은담이 싱긋 웃으며 거절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누나 호숫가 집 근처에 제가 은폐 결계 쳐놨어요. 아직 수색이 들어오지는 않았는데 근처에 헌터들이 많기에 혹시나 해서요.”
"그래? 안 그래도 걱정돼서 얼른 먹고 성역 결계 치러 가려고 했는데. 고마워.”
“별말씀을. 천천히 드세요.”
착하게 대답한 유은담이 그대로 시선을 돌려 서지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기특한 저에게 뼛국물만 주는 서지한 형은 별로 고맙지 않은 것 같지만.”
“서지한 씨, 고기 더 없어요?”
내 말에 서지한은 결국 국자 가득 고기를 퍼서 유은담의 그릇에 채워주었다.
“와, 형 잘 먹을게. 고마워.”
부글부글 끓는 듯한 그의 얼굴을 향해 유은담이 방글방글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많이 먹어라.”
이를 악문 서지한이 억지로 웃음 짓더니 다시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그제야 그릇의 고기를 한 점 떠서 맛보았다.
“서지한 씨. 진짜 맛있어요!”
"그렇지?”
서지한이 흐뭇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냥 빈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었다.
아주 정성 들여 끓였는지 고기가 흐물흐물해서 씹을 것도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꽤 굶은 위장에 넣어도 아무 부담이 없을 것 같다.
“구조해온 사람들은 다 돌려보냈어요?”
한 입 먹으며 묻자 서지한이 담담하게 그간 일어난 일을 보고했다.
“응. 각국 대피소 위치 확인해서 그 근처에 내보냈어.”
“대피소면, 그쪽 헌터들이랑 마찰은 없었고요?”
“뭐, 대피소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 근처 안전지대에 적당히 내려준 거라 그쪽 헌터들 만날 일도 없었어.”
그렇군. 잠들기 직전까지 솔직히 좀 걱정했는데 우려와 달리 모두 깔끔하게 해결된 모양이다.
다시 갈비탕에 코를 박고 흡입하는데, 갑자기 잊고 있던 인벤토리가 생각났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 많은 보스 몬스터를 죽이고 루팅 하는 와중에 단 한 번도 뭘 얼마나 획득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마석도 꽤 먹은 것 같은데, 서지한의 실체화 시간을 더 늘릴 수 있겠군.
밥을 먹으면서 인벤토리를 열어보니 이름도 제대로 기억 안 나는 보스 몬스터의 뿔과 마석으로 너저분했다.
나는 유은담의 눈치를 살짝 본 후 그 중 마석 하나를 꺼내 서지한에게 내밀었다.
“이거 흡수해두세요.”
"아, 응.”
서지한이 자연스럽게 마석을 받아 들었다.
유은담은 흘긋 마석을 쳐다보긴 했지만 관심 없는 표정으로 갈비탕을 흡입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많은 뿔을 또 언제 먹는담.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갈비탕을 거절하고 뿔 중 가장 작은 것이라도 계승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지한이 정성 들여 끓인 음식 앞에서 차마 안 먹겠다는 말이나 오지 않았다.
그래, 까짓 거 다음 끼니부터 뿔 먹지 뭐.
당분간 맛있는 거 먹는 건 어차피 글렀는데.
“그 마석 다 흡수하면 18시간이죠?”
"응."
인벤토리에는 마석이 아직 열 개도 넘게 남아 있었다.
전부 흡수한다면 앞으로 30시간이 넘는 실체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하나를 완전히 흡수하는데 48시간씩 걸린다는 점이 좀 문제긴 하지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반서진은 구조 활동, 반서후는 모르겠어. 뭐, 어디 있겠지.”
"빨리 먹고 저도 합류해야겠네요.”
"더 안 자고?”
“충분히 잤어요.”
서지한은 하고 싶은 말이 몹시 많은 표정이었으나 겨우겨우 눌러 참는 듯했다.
나는 어쩐지 그게 재밌어서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갈비탕 그릇 안으로 숨겼다.
“그런데 너 지금 랭킹 몇 위야?”
그러나 이어진 서지한의 질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랭킹.
지금까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당장 보스 몬스터가 사람들 앞에서 개판을 치니까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흠, 이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점수가 1000점 오르니까 얘는 그냥 놔둬야겠군’.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래, 랭킹요? 잠깐만요. 지금 바로 확인해볼게요!”
“걱정돼서 나도 랭킹보드 확인해봤는데 아직 네 이름 없더라고. 그래도 확인해보고 위험수위면 앞으로 보스 몬스터는 내가 잡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내가 너무 놀라자 서지한이 안심시키려는 듯 급히 덧붙였다.
아, 하긴 랭킹 10위 안에 들면 어차피 모두에게 내 순위가 공표되니까 서지한이 물을 필요도 없었겠구나.
급히 보드를 확인해보니 나의 현재 순위는 12위였다.
진짜, 진짜 아슬아슬했다.
솔직히 보스 몬스터를 그렇게 많이 죽여 댔으니 1위에 내 이름이 박혀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랭킹 1위는 여전히 서지한이었다.
“12위예요! 와, 다행이다! 바르기스 잡을 때까지만 해도 149위였는데 12위로 확 뛰었네요. 그래도 분명 10위권 안에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예요.”
내가 하루 종일 아무리 날고 뛰었어도 지난 5년간 쌓아온 헌터들의 점수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네가 싸우는 동안 다른 랭커들도 놀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내 점수나 유은담 점수도 꽤 올랐어.”
서지한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 외 요인을 지목했다.
하긴, 그렇겠네.
그나저나 랭킹보드 가장 위쪽에 서지한의 이름이 있는 건 언제 봐도 좋다.
뭔가, 안정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서지한 씨 여전히 1위네요! 다른 사람이 1위 자리 가져갔으면 좀 섭섭할뻔 했어요.”
"응? 왜?"
“네? 그냥 랭킹 1위는 서지한 씨가 하는 게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 그래?”
서지한이 살짝 뺨을 붉히는 순간, 갑자기 유은담이 쾅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입 꼬리를 파르르 떨며 웃어 보인 유은담이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서둘러 구조 활동하러 가보겠다며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이런, 나도 이렇게 느긋하게 먹고 있을 때가 아닌데.”
다시 서둘러 살코기를 수저로 뜨는데 서지한이 턱을 괴고 가만히 바라보다 슬쩍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네? 뭐가요?”
“보스 몬스터. 나랑 같이 다니면서 보스 몬스터만 내가 잡을까? 아니면, 미리 네 지인들 던전에 대피시켜 놓는 게 좋아?”
기껏 한국을 안전하게 만들어놨는데 가족들은 그걸 누릴 수 없게 된다니.
내키지 않아서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이자 서지한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지.”
"다른 방법이요?”
“문제 해결은 문제 원인을 제거하는 게 정석이잖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대한 길드 간부들 죽이겠다고요?”
나의 떨떠름한 질문에 서지한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어 거부했다.
“말도 안 돼요. 그리고 전에 은담이가 말했던가요? 대한 길드만 엮인 문제가 아니라 다른 언론이나 공무원들도 얽힌 일이잖아요. 어디부터 얼마나 손대야 할지도 모르는데.”
"모아야, 너는 걱정할 거 없어. 솔직히 이렇게 심각한 재난 앞에서 그런 쓰레기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 진짜 싫잖아?”
“좋지는 않죠.”
“그렇지?”
“하지만! 제가 랭킹 보드 점수만 관리 잘하면 사람 안 죽어도 되잖아요. 얼굴 잘 가리고 다녔으니까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을 거예요.”
나는 보란 듯이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 서지한에게 보여주려 했으나, 던전 안이라서 인터넷이 안 됐다.
좋기만 할 줄 알았던 던전에 이런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니.
하루빨리 거처를 다시 호숫가로 옮겨야겠다.
솔직히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남은 갈비탕을 한 입에 털어 넣고 자리를 나섰다.
“이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