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231)

168화

“모아야, 이제 좀 쉬어.”

"아니에요. 아직 좀 더 할 수 있어요.”

“너 쉬어야 해.”

“괜찮다니까요. 서지한 씨 아직 실체화하고 있는 거 보면 15시간도 안 싸웠잖아요.”

“실체화 한번 풀렸다가 쿨타임 돌아와서 다시 쓴 거야. 실체화 풀린 동안에는 아이템 못 쓰니까 유령 상태로 거기 있었고.”

아, 그래? 그러면 대충 20시간 정도 싸운 건가.

뭐야, 하루도 안 싸웠잖아.

예전에 야근할 때는 30시간 연속으로 철야로 일한 적도 있다.

지금 같은 비상사태에 이 정도 싸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예전에는 더 길게 일한 적도 있어요. 아직 할 수…… 우웩.”

말을 하던 도중 갑자기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와 그대로 게워내고 말았다.

급히 고개를 돌려 토하는 모습을 서지한에게 노출하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서지한도 몹시 놀란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말리고 싶었는데 내내 참은 거야. 이제 좀 쉬자, 모아야.”

고맙게도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서지한이 심각하게 말했다.

“20시간 내내 한 번도 쉬지 않고 마력 스킬 계속 쓰는 거 보통 일 아니야. 게다가 너는 네 마력도 아니고 아이템으로 증폭시킨 거잖아. 이미 너무 무리했어. 먹지도 자지도 않고 20시간……. 쉬어야 해.”

서지한이 마치 만성피로가 전문의라도 되는 것처럼 엄숙하게 선언했다.

눈앞에서 위액까지 토해버린 마당에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민망해서 나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엘파니스 씨한테도 가봐야 하니까.”

“잘 생각했어. 잠깐, 안 쉬고 또 어딜 가겠다고?”

“던전이 어떤 상황인지 확인해야죠.”

“그냥 내가 갈게.”

“아니에요. 어차피 잠깐 보고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요.”

서지한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대로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밤새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는지 인터넷을 확인해보니 상황이 호전된 지역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오, 여긴 군대로 방어선 잘 만들고 있네.

“군대가 통해서 다행이네요.”

"그렇지.”

던전 안에서는 우리 세계의 무기가 아무 소용이 없었지만 던전 밖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처음에는 다들 몬스터라는 말에 헌터만 투입해서 막았지만, 현대무기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한 후로는 적극적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여유가 좀 생겼네요. 잠깐은 쉬어도 되겠어요.”

“상황이 안 좋으면 계속하려고 했어?”

서지한의 질문에 나는 어깨만 으쓱해버렸다.

해야지 뭐. 어쩌겠어.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 상태는 기진맥진 그 자체였다.

허리를 펴고 서 있는 것도 좀 힘들게 느껴질 정도다.

이 이상 기력이 떨어지기 전에 어서 엘파니스에게 가는 게 좋겠다.

“으아, 죽겠다.”

막 게이트를 열고 이동하려는데 반서진이 나타났다.

내 위치를 말해준 적이 없는 데, 아마 유은담에게 전해 들었나 보다.

그들끼리도 정보공유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야, 괜찮냐? 난 진짜 딱 죽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반서진이 주머니에서 마실 것을 꺼내 건네주었다.

나와 서지한이 그걸 받아 들고서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자 답답했는지 반서진은 염력으로 음료의 뚜껑을 따서 우리 입으로 쑤셔 넣었다.

“우붑.”

“빨리 마셔. 당 보충해야지. 뭘 보고만 있어. 목구멍에 디렉트로 꽂고 쏟아부어. 입술이 쪼글쪼글한 게 제대로 탈수 상태구만.”

반서진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음료수를 마셨다.

진짜 탈수 상태였는지 온몸이 수분을 환영하는 것이 느껴졌다.

“으, 진짜 죽겠다. 죽겠어. 넌 괜찮냐? 좀 쉬긴 했어?”

“이제 쉬려고요. 반서진 씨는 괜찮아요?”

서지한이나 유은담과 달리 그녀는 능력치도 그렇게 높지 않을 텐데 이 페이스에 맞춰 싸웠다면 여간 무리한 게 아닐 거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묻자 반서진이 힘없이 히죽 웃었다.

“어. 나는 중간에 리타이어 한 번했거든. 4시간 정도 자고 다시 합류한 거야.”

“잘하셨어요.”

“넌 언제 잤어? 눈 밑이 거뭇한데?”

"안 잤는데요.”

나의 대답에 반서진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진짜 독하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솔직히 시간 가는 줄도 몰랐지 뭐예요.”

"그러다 죽어도 제사 안 지내줄 거니까 몸 사리면서 해. 나 제사 딱 질색인 거 알지?”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해도 반서진이 왜 내 제사를?

짧은 의문이 들었으나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옆에 선 서지한이 ‘잘 말했다’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반서후 씨랑 은담이는요?”

"유은담은 아직 싸우고 있어. 쌩쌩하던데? 젊은 게 좋긴 좋아.”

"반서후 씨도 싸우고 있어요?”

"걔? 몰라. 어디서 방어막 쓰고 있겠지.”

시큰둥하게 대답한 반서진이 던전으로 가는 게이트를 열었다.

“난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어. 호숫가 집은 멀쩡하긴 하는데, 언제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니까 자긴 좀 그렇고 던전 가서 자려는데 너도 갈 거지?”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요. 대피시킨 사람들도 봐야 하고.”

"아, 맞다. 그게 있었지.”

반서진의 얼굴이 진심으로 귀찮다는 듯 팍 찌푸려졌다.

아무리 봐도 체력이 한계에 달한 모습이라 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제가 처리할 테니까 반서진 씨는 좀 쉬세요.”

“네가 한다고? 그냥 서지한 시키지 그래?”

“서지한 씨한테도 부탁할 거예요.”

내 던전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건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수용해야 할지 모르는데 계속 그 사람들을 거기에 두는 건 불가능하다.

우선 오늘 구조한 사람들은 각국의 안전지대가 확인되는 대로 바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래도 지금 바로 돌려보내는 건 무리니까 당분간은 던전에서 보호할까하고 생각하며 게이트를 넘는 순간, 나는 즉시 생각을 바꿨다.

“와, 정말 핫 플레이스인데.”

반서진이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엘파니스가 머무는 폐허는 내 예상보다 훨씬 북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을 다 우리가 구조한 거라고? 이렇게 많이?

너무 부지런하게 구조한 거 아냐?

“잘 찾아보면 어디서 적당히 숨어 들어온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네.”

서지한조차 헛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 보탰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만 해도 어림 잡아 수천 명은 될 듯했다.

바닥에 앉거나 폐허의 벽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수많은 사람들.

아연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그가 뭔가 외치자 사람들 사이로 동요 어린 소란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나를 발견한 모든 사람들이 고마운 표정으로 공손하게 두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아 붙이더니 고개를 숙이며 꾸벅꾸벅 절을 했다.

저기, 합장하지 마세요.

뭔가 예의를 차리고 싶은 마음에 알고 있는 동양 예절을 다 끌어 모은 것 같은데 방법이 너무 틀렸다.

그래도 그 마음만은 전해졌다.

“약간 부처님이 된 기분인데요.”

머쓱한 내 말에 서지한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거기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어서 엘파니스를 찾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폐허 안쪽, 그나마 멀쩡한 엘파니스의 성에 도착하자 피투성이가 된 민간인의 다리에 약초를 붙이고 있던 그가 나를 알아보고 벌떡 일어났다.

“오셨군요!”

아무래도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는 몹시 지친 기색인 와중에도 희색이 만연했다.

말없이 사람들을 마구 쏟아 넣은 내 탓임이 분명해서 나는 면목 없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엘파니스 씨. 갑자기 이렇게 사람들 막 보내서 미안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아닙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요.”

“별일 없었나요?”

“예. 그, 말이 안 통해서 약간 곤란하긴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말이 안 통해요?”

“예. 왕과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은 저희도 안 통한답니다.”

"그렇군요. 진짜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이 사람들은 곧 내보낼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엘파니스는 무척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내심 무척 곤란했는데, 일단은 그들이 내 세계 사람이라 막 대하지도 못하고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제 최후의 전당이 시작된 건가요?”

내 질문에 엘파니스는 약초를 붙인 민간인을 일으켜 내보낸 뒤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음, 그런 셈이긴 하지만 좀 다릅니다. 이건 전야제니까요.”

"전야제.”

내가 그 말을 따라 하자 엘파니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엉겁결에 나를 따라온 반서진은 내 뒤에서 열심히 눈치껏 상황을 때려 맞추고 있는 표정이었다.

곧 몬스터들이 나오니까 빨리 던전 닫자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최후의 전당 같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

“예. 이 기간 동안 던전 안에 갇혀있던 왕들은 밖으로 나와 서로 화평을 제안하고 동맹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저는 그런 의도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죽이기에 바쁘던데요. 아, 서로 사이좋아 보이던 충왕 두 마리는 봤어요.”

엘파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던전의 왕들 중 호전적인 부류만 먼저 나온 겁니다.”

“그럼 아직 밖으로 안 나오고 안에 있는 보스 몬스터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습니다. 전야제에 참여하는 건 득도 있지만 실도 있으니까요.”

"으흠.”

그렇군.

밖으로 나와서 친구 찾기도 하고 약한 놈 죽여서 뿔도 빼앗으며 제 힘을 늘리는 건 이득이다.

하지만 이득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동족이 죽을 수도 있고, 자신도 죽을 수 있으니까.

내가 제일 센 줄 알고 나와 봤는데 사실 내가 최약체? 같은 상황이 펼쳐지면 진짜 답이 없는 것이다.

처음 만났던 그 불사조도 ‘이 몸 등장!’하고 울부짖자마자 몸에 필요 없는 큰 구멍이 뚫려버려서 사망했고.

그런 리스크를 감당하느니 뿔이나 자원을 못 얻더라도 던전 안에서 자리보전하며 기회를 노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왕도 꽤 있다는 것이지.

뭐, 그 결과로 강해지지 못 한 탓에 결국 다른 왕들에게 죽는 엔딩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성향 차이라는 것이다.

“알겠어요. 아직 안 나온 왕들이 있다는 거, 참고할게요. 다들 들었죠?”

"응. 던전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이 있었다는 추측이 맞는 거였구나.”

서지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엘파니스의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까서 내 입에 밀어 넣었다.

“대충 알겠으니까, 모아 너는 쉬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대피소 찾아서 내보낼게. 얘 누울 곳 있지?”

"아! 물론입니다. 정말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제가 미리 모셨어야 했는데. 이리 오시지요.”

재빨리 대답한 엘파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안내했다.

솔직히, 사람들 내보내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데 눈꺼풀이 갑자기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깨어 있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그럼 부탁할게요. 서지한 씨.”

"응."

“국적 확인하고, 사람들 안 다치게 잘 보내줘야 해요."

“알았어.”

“다친 사람도 포션 줘서 치료하고 내보내고요.”

“그래.”

“자기 전에 호숫가에 성역 결계도 쳐야 하는데……. 아, 그리고 그 근처에 마을에 쳐놨던 성역 결계도 해제해야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처음에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하나하나 대답해주던 서지한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끝내 웃는 가면 같은 얼굴이 된 그가 결국 실력행사에 나섰다.

“으왓!”

내 무릎 뒤로 손을 넣어 단숨에 안아 든 그가 엘파니스를 향해 턱짓했다.

“침대로 안내해.”

결국 나는 일단 서지한을 믿고 엘파니스가 마련해준 잠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듯이 잠이 들었는데, 어렴풋이 할아버지네 집 이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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