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231)

159화

“그 하얀 모습이 장비빨이었다고?”

"그렇네.”

페르기스는 담담하게 긍정했다. 그리곤 되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이군. 자네도 알겠지만, 이곳의 전사들도 시스템이 제공하는 많은 장비로 능력을 보충하고 있지 않나? 마찬가지라네.”

갑자기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장비? 얘네들 다 장비 착용하고 있는 거였어?

“물론 이 장비는 우리 종족을 위해 맞춤 제작된 것이니 자네가 입을 수는 없겠지. 나도 자네의 장비를 입을 수 없고.”

그러면서 페르기스는 자신의 발굽을 들어 올렸다.

“보다시피 내 발굽은 이런 모양이라서 말일세. 자네처럼 발굽이 갈라져 있지 않아 거기에 끼우는 고리 모양 아이템 같은 건 사용할 수 없다네.”

“반지?”

페르기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신발 같은 것은 얼추 발을 끼워 넣으면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불편해서 말이야.”

다시 아이템을 챙겨 새하얀 모습으로 변한 페르기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을 돌아보니 서지한도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아마 내 표정도 비슷할 것이다.

“그, 하지만 몬스터들이 장비 아이템을 주는 예는 없잖아?”

죽은 서지한을 루팅 했을 때 나는 그가 가진 모든 장비 아이템과 인벤토리의 물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몬스터를 루팅 했을 때 그들의 인벤토리까지 털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아. 피난민 말인가?”

“아, 응.”

“피난민들은 피난을 겪으면서 원주민과는 성질이 좀 달라진다네.”

페르기스의 말에 엘파니스가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미리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모를 수 있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원주민의 영혼석이 피난을 하게 되면 마석으로 변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아, 네.”

“그것과 같이 피난민이 죽을 경우 시스템은 그 피난민에게 부여한 자원을 모두 회수합니다. 장비, 소비 아이템 등 모든 것을요. 그리고 그 피난민의 존재는 자원으로서 처리되어 부산물의 형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나는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던 엘파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지고 계신 왕관도 피난을 하게 되면 시스템이 대부분을 회수해갈 겁니다. 다만 최후의 왕좌에 앉은 왕은 왕의 힘을 두 개까지 계승하여 던전과 함께 이동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손에 넣은 왕의 힘 중 두 개를 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재능중 두 개를 택하거나.”

“그래서 왕들이 뿔 하나만 가지고 있었군요. 뿔마다 스킬을 두 개씩만 준 거고.”

“그렇습니다.”

하긴, 그러지 않으면 만약 어느 세계에서 나처럼 뿔을 많이 모은 강력한 왕이 탄생할 경우 굳이 최후의 전당을 열 필요가 없겠지.

최종 결정권자를 정할 필요도 없이 그 왕이 모든 것을 가지게 될 테니까.

두 개까지라.

그러면 채집 히든 스킬은 무조건 가져가고, 나머지 하나는 충왕포를 가져가야겠네.

스킬 등급까지 계승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계승이 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만 계속 강화하는 게 좋겠다.

“언젠가는 왕께서도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올 겁니다. 무겁고 힘든 결정이 되겠지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파니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단어를 고르는 듯 잠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다시 들어 맑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지요.”

엘파니스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겪은 일이 너무 많은 이 할아버지는 자주 많은 말을 미소 속으로 숨겨 버린다.

“음, 오랜만에 오셨는데 제가 주책을 부려 너무 무거운 말만 하고 말았군요.”

모두가 생각에 잠긴 탓에 분위기가 순식 간에 엄숙해졌다.

그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엘파니스가 허허롭게 웃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풀려는 의도인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새로 얻은 던전은 어떻습니까? 멀리서 보기에 참 신기한 광경이라,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은데 허락이 될는지요?”

아, 새로 얻은 던전…… 아직은 던전에 속해 있는 존재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보니 엘파니스는 다른 던전의 보스들이 몹시 궁금한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준비, 땅! 하고 던전에서 나갈 수 있게 되자마자 서로 죽여댈 사이일 테니 흥미가 없는 게 이상하긴 하네.

“표정이 안 좋으시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좀 미묘해요. 만나게 해도 되나 싶고. 걱정도 되고.”

“음, 그자가 몹시 난폭한 성정인가요?”

엘파니스가 염려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껍게 접히는 눈꺼풀 위로 걱정이 소복하게 쌓이는 것 같다.

“난폭한지도 잘 모르겠네요. 사실 좀 이상한 형태로 복속해버렸거든요.”

나는 나프기스을 잡고 그 던전을 계승받은 과정을 짧게 정리해 말해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엘파니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질문했다.

“말을 전혀 할 수 없다니, 하기 싫어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애초에 입도 없던걸요.”

“그렇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요. 제 아래 복속된 관계니까 엘파니스가 가더라도 해치지는 않겠지만, 여러모로 특이한 존재라서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눈썹을 내리며 엘파니스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하지만 곧 기운을 차리더니 다시 나의 계획을 물어왔다.

“그러면 왕께서 가장 염원하던 첫 번째 목표는 다 이루셨군요. 이제 최후의 전당이 열릴 때 까지는 휴식하며 힘을 비축하실 예정이십니까?”

"아뇨, 일단 한국 던전을 다 닫았는지 다시 한번 확실하게 확인해보려고요. 발로 뛰면서 샅샅이 뒤져보고 그때까지도 던전이 조용하면 다른 나라에 있는 던전을 차례차례 살펴보고 닫으러 다녀야죠.”

"여기서 더 많은 던전이 통합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음,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피난을 할 때 가져갈 수 있는 영지의 넓이는 한계가 있으니……."

“땅 욕심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어쨌든 던전을 좀 닫아두면 나중에 휩쓸려서 죽을 민간인들 피해를 줄일 수 있잖아요.”

“그렇군요. 왕께서 이렇게 부지런하시니 저로서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목표 하나를 성취하면 해이해지는 이들도 많거든요.”

엘파니스가 흐뭇하게 웃으며 기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손녀라도 보는 것 같은 친근한 시선에 무겁던 마음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나중에 던전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면 그때 이 던전으로 우리 종족 사람들을 피신시키게 될 수 있어요. 그러면 되도록 잘 돌봐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던전이 열리더라도 밖으로 나오지 말아 주세요. 다들, 모두에게 드리는 말씀이에요.”

내 말에 페르기스가 의아해하며 끼어들었다.

“우리 도움이 필요 없는가? 예전에는 분명 같이 싸워달라든가, 아군이 되어달라든가 하는 말을 했던 것 같네만.”

“그건,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히려 괜히 나왔다가 다른 몬스터들과 함께 덤터기로 공격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나중에 상황이 좀 바뀌고 급해지면 부탁할 수도 있긴 해. 그래도 되도록 우리 쪽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만 요청할게.”

"알겠네.”

“알겠습니다.”

그 이후 나는 엘파니스가 권하는 차를 마시며 오랜만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페르기스가 커다란 대접에 든 차를 핥아먹는 모습은 좀 웃겼다.

두 사람은 아이템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떠나기 직전 나는 반강제로 필요한 아이템 목록을 받아왔다.

그렇게 아이템을 만들어다 건네주고 종종 수다도 떨며 사나흘 쉬었을까.

충분히 휴식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나는 다시 반서진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호출해 호숫가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유은담이랑 반서후는 해안선 쪽, 나머지는 내륙이다. 이거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살펴보며 반서진이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네. 던전을 다 닫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보고되지 않은 던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야산이나 공해를 직접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으음, 괜한 헛수고 같다고 생각되지만 네가 원한다면 협조할게.”

어차피 할 것도 없고, 라며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반서진이 담담하게 수긍했다.

“고맙습니다. 하루 10시간씩 돈다고 해도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예요. 저랑 반서진 씨는 날아서 확인할 수 있지만 비행이 불가능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도와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유은담을 쳐다보자 그가 질색하며 반서후를 흘겨보았다.

“으, 제가 서후 형 안고 날아야 하는 거예요? 싫은데.”

“나도 싫지만, 사람이 좋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어. 때로는 싫은 것도 해야 하는 거야.”

달갑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인지 그렇게 말하는 반서후의 얼굴도 좀 굳어져 있었다.

“어쩜 저렇게 하는 말마다 다 꼰대 같을까.”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반서진이 중얼거렸다.

반서후는 그걸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지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음, 어차피 수색을 위한 거라면 굳이 같이 다닐 이유는 없을 것 같군. 나는 다른 방향으로 알아보도록 하지.”

“다른 방향이요?”

“그래, 내부적으로 숨기고 있는 내용이 있는지 던전 관리청 쪽을 좀 더 털어보고 해외 정보원도 알아봐야겠어.”

“정보원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헌터들도 좀 있고 우리 쪽 캠프에 사람들을 인맥도 쓸 생각이야.”

하긴, 어차피 다음 스텝은 해외 던전 공략이다.

혹시나 상층부에서 숨기고 있는 던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좋고 해외 정보를 미리 모으는 것도 좋았다.

나는 흔쾌히 반서후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요.”

“아, 나도. 나도 따로 다닐게. 어차피 수색이잖아. 다 같이 몰려다닐 필요 없지. 최대한 흩어지자.”

어쩐 일로 반서진이 반서후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 말을 하며 유난히 서지한을 빤히 보았는데, 끝까지 침묵하던 서지한은 결국 못 이기는 척 뚱하게 대답했다.

“나는 모아랑 다닐 거야.”

"넌 그럴 줄 알았어.”

반서진은 서지한의 노려보는 듯한 시선에도 싱긋 웃을 뿐이었다.

어쨌든 할 일이 정해진 듯 했기에 나는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그럼 다들 고생해주시고, 저녁에 다시 봐요.”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제각각 이동 스크롤을 써서 임무 장소로 흩어졌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