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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158/231)

158화

그걸 그대로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데, 나로서는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을 뿐이었다.

“아, 응. 그런 편이야. 염색도 안 하고 펌도 안 해서.”

“아……. 그래요?”

“응. 하긴, 은담이는 염색도 하고 머리 세팅에도 신경 많이 쓰는 편이지? 확실히 좀 상한 것 같긴 하네. 아. 그래도 세팅할 때는 좀 상한 머리가 더 잘 된다는데 꼭 열심히 관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도 관심 있으면 내가 쓰는 트리트먼트 알려줄게! 마트에서 산거라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야.”

“아……."

한국 던전이 다 닫히고 좀 평화로워지니 이제 이런 곳에도 신경 쓸 여유가 생기나 보다.

하긴, 한창 멋 부리기 좋아할 나이다.

내 동생인 승주는 이런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내가 쓰는 트리트먼트 이름이 뭐냐면……."

“자, 잠깐만요. 누나. 지금 아무 느낌 없어요?”

“무슨 느낌? 아, 머리카락 만지는 건 상관없는데 갑자기 당기거나 하면 아프니까 조심해줘.”

"아니, 제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누나, 저 잘생기지 않았어요?”

"어? 너 잘생겼지. 우리 승주보다 백 배는 잘생긴 거 같아! 다른 사람들도 다 너 연예인 같다고 하더라.”

외모를 열심히 꾸민다는 건 그만큼 외모에 예민하다는 것이다.

나는 유은담이 상처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그의 외모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칭찬해줬는데 어쩐지 유은담은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왜 그래? 은담이 너 잘생겼어. 자신감을 가져! 게다가 꾸미는 것도 엄청 잘 꾸미잖아. 나중에 내 동생이랑도 알게 되면 좀 가르쳐주라. 아마 나이도 비슷하고 성격도 착한 편이니까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아, 음. 네……."

잘생겼다, 유은담! 멋쟁이다, 유은담! 얍얍! 하고 한껏 기합을 불어넣어 줬는데 유은담은 못 이기는 척 시무룩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응이 너무 다른 거 아니……."

고개 숙인 유은담이 혼자서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어저께 고등학교 졸업한 섬세한 청소년이다.

너무 많은 관심은 오히려 짜증 나게 느껴지는 나이니까.

그럼, 난 어른들이랑 대화해볼까.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서지한은 치미는 웃음을 억지로 눌러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내가 말을 걸었더니 다급하게 눈을 피한 후 헛기침을 몇 번하며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그 목덜미가 살짝 붉어져있었다.

“반서진 씨?”

반서진은 허공에 뜬 채 배를 부여잡고 소리 없이 숨넘어가게 웃는 중이었다.

꺽꺽하며 웃는 소리가 진짜로 죽기 직전의 사람 같다.

“너 진짜 대박이다.”

간신히 저승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반서진이 아직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감탄했다.

그리고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뭐 할 거야? 너는 오늘 쉴 거라고 했지? 낚시라도 할래?”

“낚시를요?”

“응. 누가 먼저 개서후 낚나 시합하고 놀자.”

반서진의 그 말에 유은담이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그보다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어디?”

“엘파니스 씨 좀 만나보려고요. 가서 아이템 필요한 거 있는지도 좀 들어 보고, 어제 던전 통합한 것도 이야기해야 하고.”

세트 아이템을 전부 이 세 사람에게 줘버려서 던전에 머무는 식구들에게 약간 미안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필요한 부위의 아이템을 물어보고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 그래?”

“네. 반서진 씨도 같이 갈래요?”

내 물음에 반서진은 서지한을 흘긋보더니 짧게 도리질 쳤다.

“아니, 뭐 딱히. 장비받은 거 성능 테스트하려면 던전 안에서 이것저것 깨부수는 게 편하긴 하는데……. 내가 가서 세트 장비 자랑하면 네가 좀 곤란한 기분이 되겠지?”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섬세한 배려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미처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 한 탓에 반서진이 즉각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너 왜 그렇게 놀라?”

“네? 아뇨, 그, 저는 머, 먼저 가볼게요. 빨리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집요하게 등 뒤로 달라붙는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재빨리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서지한과 함께 던전으로 이동했다.

갑자기 나타난 내가 꽤 성가실 법한데도 엘파니스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두툼한 솔로 페르기스의 등이나 어깨를 문질러주고 있었다.

그 사이 꽤 친해졌나 보다.

“오, 왕이 오셨군.”

느긋하게 엘파니스 앞에 엎드려 볏짚 같은 것을 우물우물 씹는 페르기스가 보였다.

사슴은 나를 발견하고 고개만 가볍게 들어 반겨주었다.

서지한은 인사에 대꾸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아마 로드란을 찾는 것 같았다. 그를 대신해 내가 질문해주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로드란은요?”

"아, 후원의 밭에서 소일거리를 하는 중입니다. 불러올까요?”

"네?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둘이 아주 친해졌네요.”

내 말에 엘파니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꽤 통하는 부분이 많더군요. 페르기스는 제 영역보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 정도랍니다.”

“으음, 내가 여기 머무는 것이 싫었다면 나를 그렇게 빗질하지 말았어야지.”

“적적한 늙은이의 말동무를 해줘서 고마울 따름인데, 싫을 리가 있나.”

"그래……? 그, 목 옆 부분을 좀 강하게 문질러주게. 앗, 그래. 거기……."

전에 왔을 때도 둘이 잘 지내고 있어서 놀랐는데, 이건 내 생각보다도 훨씬 친해 보이는 모습이다.

페르기스의 거대한 몸이 엘파니스의 작은 솔 아래에 흐늘흐늘하게 늘어지는 것은 꽤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어제 던전이 또 확장되더군요. 저 멀리 섬 같은 것이 떠다니기 시작하는 걸 봤습니다. 저도, 로드란도 무척 신기하게 구경했답니다.”

무심하게 페르기스를 솔질하며 엘파니스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 말대로 페르기스의 영역과 반대방향에 나프기스의 영역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왕의 패권이 널리……. 으음……. 영광이네……. 감축, 음."

페르기스도 뭔가 웅얼거리며 축하해주는 것 같긴 하는데 눈이 벌써 반쯤 감기고 있었다. 엘파니스의 손길에 완전히 취한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좀 더 빨리 찾아왔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큰일을 마쳤으니 휴식을 취하셔야지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 지내시기에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내 질문에 엘파니스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왕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평안합니다.”

“으응…… 그렇네. 침입자도 없고……."

페르기스는 이제 그냥 슬슬 자는 게 낫지 않을까?

내 말이 귀에 들어가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모습인데 그 와중에 대답만은 꼬박꼬박 챙겼다.

이걸 기특해해야 하나.

“사실 저나 페르기스나 요즘처럼 평온하게 지낸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그럼 지금까지는……."

“예. 이번에는 또 누가 죽을까, 최후의 전당은 이길 수 있을까, 두 번째 피난이 가능할까 고민하는 와중에 갑작스레 예상치 못 한 죽음을 전해 듣는 등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요.”

“아.”

“얼마 가지 않을 평화라고 해도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이 자리에 더 많은 이들이 살아남아 함께 왔다면 하고 종종 생각한답니다.”

잔잔하게 미소 짓는 엘파니스는 모든 상념을 내려놓은 듯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상상도 못 할 슬픔과 고통이 느껴져서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 했다.

느긋하게 엎드려있던 페르기스가 조용히 눈을 뜨더니 엘파니스를 흘긋 쳐다본 후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어쩐지 이 둘이 빠르게 친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를 만났을 때 페르기스는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제 종족의 대부분을 잃고 어린 기사와 단둘이서 던전을 지키는 엘파니스의 모습은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겠지.

사슴의 눈동자에는 깊은 동정심이 담겨 있었다.

“그, 새로 얻은 던전에 장비 아이템을 만들어주는 장치가 있더라고요.”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띄울 겸 나는 일단 본론을 꺼냈다.

엘파니스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긴 했지만 조용히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착용하고 있는 장비 아이템이 없는 듯해서. 혹시 필요한 거 있나 들으러 왔어요.”

“장비 아이템이라면 저는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있네만.”

엘파니스는 새하얀 법복을 걸치고 있을 뿐 아무런 무기도, 액세서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입고 있는 옷이 장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평소에는 벗어서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있지요.”

그렇게 말한 엘파니스는 솔을 잠깐 내려놓고 화려한 금장식이 된 조끼 같은 갑옷을 꺼내 보여주었다.

“저 만날 때는 왜 안 입고 오셨어요?”

우리와 처음 만났을 때 엘파니스는 지금과 같이 새하얀 법복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장비 아이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로드란은 검을 착용하고 있긴 했지만.

“친선을 도모하러 가는데 무장을 하고 이야기하러 갈 수는 없지요.”

엘파니스의 조용한 대답에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는 진짜로 모든 것을 다 내던질 각오로 내 앞에 고개 숙였던 것이다. 로드란을 살리기 위하여.

언젠가 그가 잠깐 지나가는 말로 내가 인간이라 정말 기쁘고 고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긴, 내가 충왕류나 수왕류였다면 대화는 시작조차 불가능했겠지.

전투능력이 미미한 이 사제와 A급 인왕류 기사 정도는 단숨에 찢겨 죽었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래도 필요한 부분 있으면 말씀하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사실 그동안 겪어온 산전수전이 있는 터라 장비 아이템은 나름대로 갖추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아, 페르기스는……."

“나도 있네. 이미 입고 있지.”

"입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슴의 매끈한 몸에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나의 의아한 표정에 페르기스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갈색으로 변했다.

“엑?"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페르기스가 제 앞에 새하얀 가죽을 펼쳐 놓았다.

“내가 입고 있던 건 이거라네.”

아니, 동물이 가죽을 입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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