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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157/231)

157화

“그……

가만히 내려다보는 서지한의 시선이 너무나 간지럽다.

심장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얼굴이 너무 뜨거워져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다.

왜, 왜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지?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목구멍에서 나오는 건 이상한 소리뿐이었다.

“모아야.”

마치 꿈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몽환적으로 들리는 목소리.

서지한의 어깨너머로 펼쳐진 새파란 하늘이, 햇살이 눈이 시릴 만큼 빛났다.

더 이상은 안 돼.

“저!”

“으, 응?”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나는 서지한을 밀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평상 아래로 구르듯 내려와 반듯하게 섰다.

그 바람에 우리를 감싸고 있던 의미심장한 분위기도 산산조각이 났다.

“어? 어?”

“국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다녀올게요!”

“내가 같이……."

“에이, 뭘 같이예요! 금방 다녀올게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서지한을 뒤로하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가는 도중 설거지를 마쳤는지 이쪽으로 오던 유은담이 슬쩍 말을 걸었으나.

“어, 누나? 어디……."

“은담아, 나중에!”

가볍게 회피했다.

간신히 집 안으로 들어온 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닫은 문 위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고 말았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온몸을 풀어놓는 것 같았다.

“으, 미쳤어! 미쳤어. 거기서 왜 빨개지는 건데? ‘정말 예쁘다’라니. 그건 또 뭔데! 왜 그런 소리를……. 아악!”

얼굴을 감싸고 무릎에 얹은 채 한참 열을 식혔다.

설렘이 간간이 발작같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작게 외쳐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널뛰던 가슴도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릎에서 얼굴을 든 순간 나는 굳어버렸다.

“흐응.”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 2층에 있던 거 아니었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반서진이 허공에 둥둥 떠서 엎드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없었는데? 그리고 기척도 못 느꼈는데?

아, 기척은 염력으로 떠서 왔으니 못 느꼈을 수도 있겠구나.

당황해서 굳어버린 나를 반서진은 말없이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얼굴 가득 펼쳐진 능글맞은 웃음 때문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왜…… 왜 계속 쳐다보세요?”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염소도 한 수 접어줄 것 같은 바이브레이션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니, 그냥 좋을 때다 싶어서.”

"뭐, 뭐가요?”

약간 경계하며 묻자 반서진으로부터 터무니없는 소리가 돌아왔다.

“남자친구 처음 사귀어?”

"남!”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 말을 그대로 외치려다 간신히 말을 멈췄다.

좀 식었던 얼굴은 다시 터질 듯이 달궈져 버렸다.

더워지기까지 해서 나는 손부채로 얼굴을 식히며 대꾸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엥?”

내 대답에 이번에는 반서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깜짝 놀라 입까지 벌리고 경악했다.

“뭐? 너네 설마 안 사귀어?”

"네? 당연하잖아요.”

“뭐? 뭐가 당연한데? 아니, 나는 뭐가 당연한지 하나도 모르겠어. 지금, 이 상황에 당연한 거 하나도 없거든? 내가 너희 계속 지켜봤는데, 그 말은 전혀 당연하지 않아. 당연?”

“……반서진 씨가 뭔가 착각하고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같이 심각한 상황에 그런 거로 놀고 있을 때도 아니고요.”

반서진은 내 말을 끝까지 경청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뜬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리고 충격적인 피드백을 남겼다.

“너…… 꽤 꼰대구나. 어린 나이에 어쩌다가……."

안쓰러운 듯 나를 바라보던 반서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드라마도 안 봐? 오히려 이럴 때 사랑이 싹트고 연애를 하고 그러는 거잖아. 지구가 멸망해도 사랑은 남는다. 뭐 그런 거. 좋지 않아? 낭만적이고.”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잖아요. 정신 바짝 차려도 모자랄 판에……."

“너 진짜 꼰대다……. 요즘 애 같지가 않네.”

“요즘 애라니. 그런 말 하는 반서진 씨가 더 꼰대 같거든요.”

우리는 잠시 네가 꼰대, 아니 네가 더 꼰대 같은 대화를 투덕거리며 나누다가 결국 최강의 꼰대는 반서후이므로 나머지는 모두 꼰대가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렸다.

뭐야? 이 대화.

덕분에 마음은 좀 침착해졌으니 다행이지만.

“흐음, 근데 서지한 정도면 괜찮지 않아? 얼굴도 그 정도면 괜찮고, 가족도 없잖아. 그리고 너한테도 꽤 잘해주지 않나?”

“반서진 씨는 남자의 가족 유무를 정말 중요하게 보시는군요.”

"응. 종갓집 같은 게 딸려봐, 진짜 최악이잖아. 그런 남자랑은 연애도 하면 안 돼. 아니, 말도 섞지 마.”

네…….

반서진의 심각한 종갓집 트라우마를 기억해낸 나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 사이 그녀는 서지한에게 이것저것 점수를 매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서지한이 나이가 좀 많네. 그건 좀 흠이지. 남자가 나이가 많은 건 큰 흠이야.”

"네? 그래도 딱히 대화하면서 나이가 많아서 불편하다고 느낀 점은 없는 데.”

“아재 개그 같은 거 하지 않아? 재미도 없는 농담 해놓고 웃어주길 요구한다거나. 그런 거 진짜 질색이야. 그렇지?”

“으음, 딱히 농담은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네.”

반서진은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치며 고민하다가 허공에서 빙글 몸을 뒤집었다.

마치 물속에 있는 돌고래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자 그녀의 능력이 조금 부러워졌다.

염동력, 좋겠다.

나는 그냥 뭐 부수는 특기밖에 없는 데. 또는 벌레 되기.

“나이, 나이라. 아. 유은담은 어때?”

"네?”

“남자가 수명이 더 짧아서 연하를 만나는 게 좋대. 확실히, 서지한을 봐도 그렇지. 수명이 짧긴 해. 벌써 죽었잖아.”

“저기요. 서지한 씨가 들으면 기분 상하겠어요.”

원래 언사가 거침없는 편이긴 하지만 적나라할 정도로 필터가 없어 무심코 딴지를 걸고 말았다.

반서진은 히죽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여기 없잖아.”

내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모습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서진은 생글생글 웃는 낯을 숨기지도 않고 다시 슬쩍 나를 찔러보았다.

“너무 그렇게 재미없는 말만 하지 말고. 넌 어때?”

“뭐가요?”

“서지한. 남자 친구로 괜찮지 않아? 너도 호감 있는 거 아냐?”

"네, 네?”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손부채가 의미가 없어질 만큼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반서진은 다시 입꼬리를 잔뜩 늘려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어우, 야. 표정으로 대답을 다 하네. 내가 다 부끄럽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이런 대화도 서지한 씨가 알면 불쾌해할 수 있으니 그만 하는 게 좋겠어요.”

"걔가? 불쾌? 왜?”

“네?”

“에이, 너무 빼지 말고. 딱 말해봐, 어때? 서지한.”

반서진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해서 부추기는 그녀의 말에 나는 결국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놓았던 마음을 살짝 뱉어내고 말았다.

“그, 그게. 서지한 씨는 솔직히 너무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오오, 걔가 얼굴은 괜찮지. 그리고? 잘생겼고? 또?”

“랭킹 1위이기도 하고, 성격도 좋고, 이런저런 생활력도 저보다 엄청 좋아서……. 사실 서지한 씨 앞에서는 서툰 모습만 잔뜩 보여줬기 때문에……."

“흐흐, 아호호. 아무튼 그래서?”

"괜히 넘겨짚었다가 불편한 사이 되고 싶지 않아요.”

“엥? 그게 결론이야?”

“그게 결론이에요. 서지한 씨는 그냥 서지한 씨예요. 반서진 씨가 착각하는 거라니까요.”

“아닌데, 나 촉 되게 좋은데. 아니, 뭐 촉이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챌 수준이긴……."

혼자서 뭔가 꿍얼거리던 반서진은 갑자기 표정을 확 바꿔서 제안했다.

“그래, 그 딱딱한 호칭이 문제야! 그거부터 바꿔보는 건 어때? 오빠라든가. 아니, 이게 좀 그러면 자기라든가. 나중에 자기라고 한번 불러봐. 아! 달링도 좋다. 엄청 좋아할걸 걔.”

“네?”

“왜? 좋잖아. 아참, 꼭 내가 있을 때 해주라. 그 말 들은 서지한 표정이 너무너무 보고 싶거든.”

"반서진 씨. 지금 엄청 재밌어하고 있죠?”

“들켰어?”

반서진이 능청스럽게 윙크를 날렸다.

놀림감이 되는 건 사양한다. 나는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그만하고, 나가봐야겠어요. 반서진 씨도 나가려던 거 아니었어요?”

"아, 한참 재밌었는데. 맞다. 너 나도 계속 반서진 씨라고 부를 거야?”

"왜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경계 어린 시선을 던지자 반서진이 귀엽다는 듯 싱긋 미소 지었다.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만데. 딱딱하게 반서진 씨는 무슨 반서진 씨야. 호칭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서진이 언니라고 불러. 너 유은담도 은담이라고 부르잖아.”

어…….

고민된다. 이 사람과 이 이상 허물없는 사이가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 표정에 반서진이 거꾸로 뒤집혀있던 몸을 바로 돌리더니 두 손을 모아 얼굴을 묻고 흑흑 거리기 시작했다.

“나랑 가까워지는 게 싫은 거야? 셔진이는 슬뽀요.”

“……나가볼게요.”

“앗, 야, 잠깐만. 야야. 너 은근히 칼 같다.”

문을 벌컥 열고 돌아서자 반서진이 당황하며 둥둥 뜬 채 따라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내가 누워 있던 평상으로 걸어갔다.

기척을 느낀 서지한이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넘칠 것 같다.

조금만 방심하면 찰랑거리는 것이 넘쳐서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았다.

주워 담을 수 없는 그것에 아직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서지한 씨. 많이 기다렸어요?”

그래서 나는 호칭이라도 거리를 둔다.

제멋대로 날뛰려는 그것에 뚜껑을 달아 덮는 것이다.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니, 괜찮아. 반서진이랑 이야기하다가 온 거야?”

“네. 잠깐.”

나는 반서진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흘깃 그녀를 스쳐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윙크만 할 뿐이었다.

“반서후는? 갔어?”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반서진이 의아해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가족이라 눈에 안 보이면 찾게 되는 걸까.

“아니요. 형은 물속에 있어요. 환경 초월 시험해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아직 안 나왔다고?”

반서진의 물음에 유은담은 어깨만 으쓱했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서지한과 약간 거리를 둔 채 서 있었다.

아까 있었던 일의 여운이 남아서 그런지 가까이 서기가 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누나?”

“응?”

내 대꾸에 유은담은 잠시 말없이 서지한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마치 연예인을 연상시키는듯한 화사한 미소를 선보이더니 성큼 내 옆으로 다가왔다.

“왜?”

그 기세가 너무 거침없어서 나도 모르게 움찔 물러날 뻔했다.

집 안에서 반서진과 나눴던 유은담에 대한 대화가 살짝 머리를 스쳤다.

가까이서 보니 이렇게 애 같은 티가 나는데 이런 애가 무슨 남자람.

반서진 씨도 참.

“머릿결 엄청 좋네요.”

가까이 다가온 유은담이 호숫가에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내 머리카락을 한 꼬집 따서 살짝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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