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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156/231)

156화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싸늘한 말에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반서후도 약간 굳은 표정이었다.

솔직히, 반서진이 왜 이렇게까지 반서후를 싫어하는지는 잘 모르겠…… 아니, 이해가 좀 가긴 하네.

반서후와 잠깐잠깐씩 시간을 보낸 나도 가끔 그가 답답하고 불편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반서진은 거의 평생을 그와 부대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둘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감정들이 쌓여 있겠지.

음, 남의 가정사에 외부인인 내가 끼어드는 건 역시 좀 아니야.

“저기, 반서후 씨.”

그래도 모처럼의 파티가 이렇게 굳어진 분위기로 끝나는 건 사양이다.

내가 조심스레 부르자 반서후가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신하로 들어오라는 제안이라면, 거절하지.”

“네?”

“중립을 지키는 사람도 필요하니까.”

묵직한 그 목소리에 반서진이 코웃음 쳤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구겨 우스꽝스럽게 만든 후 입을 열었다.

“쟹롑을 졔케는〜 셰렘〜”

"쿨럭.”

앗, 순간 방심해서 웃을 뻔했네.

좋아, 간신히 헛기침으로 속여 넘기는데 성공.

“그게 아니라. 이거 받으세요.”

나는 남아 있던 게오기스 세트를 내밀었다.

나프기스가 만들어준 것 중 가장 방어에 특화된 장비다.

사실 아직 반서후에 대한 감정이 엄청 좋은 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로드란에게 주는 게 낫지 않을까 갈등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숨기지 못 한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보는 반서후가 약간 안쓰러워졌던 것이다.

“나에게 이걸……?”

반서후 본인도 얼떨떨한지 아이템을 받을 생각도 못 하고 눈만 크게 떴다. 대신 다른 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 왜 줘! 아깝게! 그, 누구냐. 차라리 그 할아버지한테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반서진은 노골적으로 반서후를 견제했다.

저기, 저도 아깝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한 명만 쏙 빼냐고요.

“우리 세계 사람부터 챙겨야죠.”

로드란과 엘파니스에게는 따로 S급 장비를 만들어서 줄 생각이다.

세트 아이템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쓸모는 있겠지.

“아니, 나는 괜찮……."

“받아요.”

반서진 때문인지 겸연쩍은 표정으로 거절하려는 그에게 나는 아예 장비를 떠넘겼다.

어색하게 그걸 받아 든 반서후는 몹시 당황하다가 작게 말했다.

“……고맙다.”

이 사람도 참 힘들게 사는 사람이야.

반서진과 유은담의 열렬한 반응에 비해 좀 싱거울 정도로 담백한 인사였다.

벌써 좀 후회되려 하네.

하지만 그 표정에 섞인 미안한 감정에 나는 괜히 이긴 기분이 들었다.

반서후는 좀 특이한 사람이긴 하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은 아니다. 이렇게 빚을 지워두면 어떤 방식으로든 갚으려 하겠지.

“에이, 역시 주는 거야? 아까워라. 하긴 네 거니까 누구한테 주든 네맘이긴 하지.”

“반서후 씨도 그동안 사람 모으고 전 세계 던전 기관 여기저기 연락하느라 고생했잖아요.”

“쯧, 아무튼 착해 빠져선.”

짧게 혀를 찬 반서진은 맥주 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털어 마신 그녀는 깡 소리 나게 빈 맥주 캔을 내려놓더니 씩 웃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다들 배는 채웠지?”

여기까지만 하고 이만 자러 가자는 건가? 자리를 파하기는 아직 좀 아쉬운데.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피곤하면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좋은 날에 축포를 안 터뜨릴 수는 없지!”

내 예상과 달리 이어지는 반서진의 말을 한껏 흥을 키운 말이었다.

“축포요?”

“응. 축포.”

“아, 불꽃놀이 같은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주변에서 볼지도 모르고. 그래도 작은 불꽃이라면 괜찮을지도……."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샴페인 같은 거 좀 터뜨리자 이거지.”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은 반서진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냉장고 문이 열리더니 콜라 네 병이 공중을 날아 각자의 앞에만 병씩 안착했다.

“그리고 이거 받아.”

“이건…… 멘토스?”

"응."

“샴페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좀 시시하잖아. 자, 가자!”

신이 난 반서진이 먼저 문을 열고 집을 뛰쳐나갔다. 이쯤 되니 혼자 안 하겠다고 찬물을 끼얹기도 그래서 나도 따라 일어섰다.

그러자 서지한이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나고, 이어서 유은담도 못 이기는 척 엉덩이를 뗐다.

혼자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반서후까지 집을 나서자 결국 모두 반서진을 따라 나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준비됐지?”

질문을 던진 반서진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콜라에 멘토스를 투하했다.

당연히 콜라 분수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깔깔 웃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즐거워져서 그 파티에 합류했다.

그러나 치솟는 음료를 보며 즐거워하던 것도 잠깐이었다.

“앗, 야! 반서후! 나한테 튀었잖아! 방향 제대로 해서 하라고!”

반서진의 타박에 반서후는 묵묵히 병의 주둥이를 반서진에게 돌렸다.

머리부터 콜라를 뒤집어쓴 반서진이 젖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이를 갈았다.

“해보자 이거지?”

“네가 먼저 나한테 튀겼어.”

"뭐? 어쩌라고?”

퉁명스럽게 받아친 반서진이 한쪽 손가락을 들어 빙글 돌렸다.

그러자 치솟던 음료가 물방울처럼 여럿 뭉치더니 쏜살같이 반서후에게 날아들었다. 염력 스킬까지 쓰는 것이다.

“야, 너 치사하게!”

그렇게 말하는 반서후도 방어 스킬을 켜서 음료 방울을 방어하는 중이었다.

결국 병의 콜라가 다 떨어지자 두 사람은 호숫가의 물을 서로에게 뿌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 난장판 사이에서 유은담은 우아하게 자신에게 날아드는 물방울을 얼리며 혀를 차고 있었다.

“재밌어 보이네요.”

“그러게. 잘 노네.”

나와 서지한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 재능 낭비의 현장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렇게 투덕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비로소 한 고비를 넘겼다는 실감이 났다.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다음 싸움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괜찮을까요?”

“어차피 호수 물인데 뭐. 그냥 좀 젖겠……."

무심하게 대답하던 서지한은 문득 내가 원하는 대답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왜 그래?”

“그냥, 갑자기 좀 불안해서요.”

"어떤 게?”

“나프기스요. 사실 따지자면 우리보다 월등히 고등한 생물이잖아요. 전투적으로도, 그리고 미래를 보여준다는 그 유물도 엄청 고등기술의 유산이고요. 그런 생물도 어떻게 못 한 적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내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불현듯 불안해지는 건어 절 수 없었다.

만약 충왕포를 L10까지 올려도 포식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면?

이 모든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는 짓에 불과하다면?

그런 암울한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차라리 생각을 끊어버린 것이다.

“모아야……."

그가 아무리 위로를 해도 원론적인 불안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걸 아는지 서지한의 목소리는 안타까움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생각 안 할래요. 그리고 그냥 푹 쉬려고요.”

나는 크게 심호흡해서 다시 불안을 털어 버렸다.

“응?”

“그때 일어난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할 거예요. 미리 걱정할 필요 없죠. 안 그래요?”

이건 사실 서지한의 방식이다.

그와 내내 붙어 있으면서 몇 가지 좋은 습관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걸 눈치챘는지 서지한이 흐뭇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괜찮을 거야.”

갑자기 따듯한 체온이 손을 감쌌다. 옆에 서 있던 서지한이 가만히 손을 잡아준 것이다.

나보다 훨씬 큰 뜨거운 손.

그 체온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손의 감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아…….

실체화가 풀린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슬슬 풀릴 때가 됐지.

나는 담담했는데 서지한은 몹시 맥이 빠진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서지한의 손 모양으로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렇게, 감촉 없는 손을 한참 동안 잡고 있었다.

* * *

새파란 하늘에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

나는 호수 앞 평상에 벌렁 누워 느긋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평상은 반서진이 어디선가 가져온 건데, 이것 덕분에 호숫가의 분위기가 약간 한국적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어제 그렇게 콜라 축포를 터뜨린 다음 다시 날이 밝아오도록 마셨다.

그런데도 숙취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 피곤하긴 하지만. 새삼, 각성자 몸 만세다.

“쉬고 있어?”

머리 위에 살짝 그림자가 진다 싶더니 서지한이 조심스레 다가와 앉았다.

“네. 오랜만에 느긋하게 있으니 좋네요.”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나른했다. 잔뜩 배가 불러서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이게 극락이 아닌가 싶었다.

“뭔가 후식이라도 좀 먹을래?”

"아뇨. 엄청 배불러요. 서지한 씨 콩나물국 진짜 잘 끓이네요.”

자고 일어나자 서지한의 끝내주는 김치 콩나물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세 그릇이나 먹었더니 배가 터질 것 같다.

“뭐, 보통이지.”

서지한이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바람을 맞고 있었다.

“아, 다른 사람들은 뭐 해요?”

"반서진은 방에 올라갔고, 유은담은 설거지. 반서후는 환경 초월 확인해본다고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간 상태야.”

“다들 부지런하네요.”

뭐야, 반서후 씨. 아이템 안 줘도 된다고 했으면서 누구보다 장비 효과를 열심히 확인하고 있잖아?

속으로는 엄청 기뻤던 게 분명하다. 진짜 서툰 사람이라니까.

“날씨 좋네요.”

“응.”

간단하게 대답한 서지한은 다시 조용히 내 옆을 지켰다. 나도 흘러가는 구름만 말없이 감상했다.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한 이 순간을 즐기는데, 문득 머리에 무언가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서지한의 손이었다.

조심스럽게 뻗어온 손이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해에 달궈져서 내 머리 꽤 따끈할 텐데, 서지한 씨, 따듯해서 기분 좋죠?

“모아야.”

“네……."

대답하면서도 내 의식은 반쯤 수면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식곤증이 오는 것 같은데 이대로 좀 잘까?

“햇빛 비치니까 눈이 금색이 되네.”

"네……. 색이 좀 옅은 편이라.”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는 서지한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집중하고 있는 표정이다.

그 단단한 얼굴이 갑자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예쁘다.”

완전히 기습이다.

어른어른 눈가를 간질이던 잠 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나고 목 끝부터 열기가 확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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