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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154/231)

154화

허공에서 맥주 캔이 모여들어 가볍게 부딪쳤다. 호응하지 않을 줄 알았던 반서후가 팔을 내밀어 준 것은 좀 의외였다.

다들 평소보다 얼굴이 좀 풀어져있는 것이, 한국의 던전이 모두 닫힌 게 기쁜 모양이었다.

“금방 닫고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잘 구운 오징어를 쭉 찢어 마요네즈에 담그며 반서진이 입을 열었다.

유은담도 젓가락을 들어 근처의 탕수육을 집으며 동의했다.

“그러게요. 나프기스 던전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거기 보스 몬스터가 그렇게 센 놈은 아니었을 텐데. 속도도 느리고요. 아, 혹시 대한 길드에서 뭔가 했어요?”

“한국에 남은 마지막 던전이니 경계가 삼엄했겠지. 평소보다 힘들었을 거야.”

반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추측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은 석상 상태의 나프기스밖에 모르겠구나.

“경계는 그렇게 삼엄하진 않았어요. 평소보다 보초 서는 헌터들이 많긴 했는데, 다들 아이템 채집하느라 정신없더라고요. 가볍게 그냥 지나갔죠, 뭐.”

“어, 그래요? 그러면 진짜 보스 몬스터 때문에 이렇게 오래 걸린 거예요?”

내 대답이 의외였던 듯 유은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셈이지.”

“나프기스 진짜 별로 안 강한데. 그놈 얼리면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아쉽다, 저랑 같이 갔으면 편했을 텐데.”

“그렇지도 않을걸.”

내 앞 접시에 멀리 있는 음식들을 가져와 차곡차곡 채우던 서지한이 코웃음 쳤다. 하나같이 내 취향의 음식들이다.

좀 무리해서 팔을 뻗어야 하는 거리에 있던 터라 가까운 데 놓인 과자나 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걸 어떻게 눈치챈 서지한이 자신의 긴 팔을 쭉 뻗어 자연스럽게 내 접시에 놓아주고 있던 것이다.

“왜? 내가 얼리고 누나가 쏘면 끝일 텐데. 누나 정도 대미지면 그놈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날걸? 그럼 게임 끝이지.”

“2차 변신이 있더라고.”

유은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서지한이 무심히 대답했다.

“2차 변신?”

유은담의 반문과 함께 반서후, 반서진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쏠렸다.

정작 시선을 받은 서지한은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귀찮은 표정이라 내가 대신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에는 설득을 하려고 묶어놓고 이것저것 선물을 내밀었는데요……."

“선물을? 하하핫.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입 꼬리에 오징어 다리를 매달고 반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너무 빈손으로만 다녀서 설득에 실패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아무거나 뭐든 좀 노력해보고 싶었거든요.”

“지금까지, 라는 건 만난 보스 몬스터마다 다 그렇게 설득하고 다녔다는 소리야?”

“네. 전에도 말했잖아요. 설득이 우선이라고.”

“아니, 나는 네가 만나자마자 포격부터 날리고 던전 접수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 생각이랑 좀 다르네.”

확실히 반서진이 내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면 충왕포로 일단 보스 몬스터 몸을 절반 정도 날려버린 다음 죽을래? 내 신하 될래? 하고 협박했겠지.

그리고 아마 잘 통했을 것 같다.

워낙 사나운 분위기니까…….

“어쨌든 죽이고 싶지 않았다고요. 최대한 평화롭게 던전을 인계받고 싶었고요. 거기 몬스터들도 우리 편 되어서 싸워주면 좋잖아요.”

"그래그래. 아무튼 그래서?”

"그렇게 한참 설득했는데, 갑자기 나프기스 몸이 조각조각 나더니 안에서 빛 덩어리로 된 거인 같은 게 튀어 나왔어요.”

“빛? 빛이면……. 아, 속도가 너무 빨랐어? 흔히 말하는 빛과 같은 속도라서 서지한이 상대가 안 되었다던가?”

확실히, 나프기스가 빛 버전이 된 이후에는 속도가 월등히 빨라진 탓에 서지한도 좀 버거워했던 듯하다.

내 표정을 읽어낸 반서진이 씩 웃었다.

“정답?”

“속도가 문제가 아니었어.”

약간 자존심 상한 표정의 서지한이 툭 내뱉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노골적으로 재밌어하는 반서진이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공격이 안 통한다는 게 문제였지.”

"공격이 안 통한다고? 물리 공격이?”

“전부 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잠깐, 공격이 안 통하는데 어떻게 잡았어?”

반서진의 입가에서 오징어가 툭 떨어졌다. 재빨리 그걸 주워 돌돌 말아 다시 입에 밀어 넣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잡은 건 아니고, 나프기스 쪽에서 갑자기 우호적으로 변했어요.”

"우호적으로?”

“네. 이대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왕관을 저한테 씌워주고 계승시키더라고요.”

"……왜?”

“그건 저도 확실하게는 모르겠어요.”

"확실하게 모른다는 건 대충이라면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뜻이야?”

나는 나프기스을 따라가서 본 미래를 보여주는 유물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그놈이 본 미래에서 네가 뭔가 큰일을 하는 걸 봤다는 거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요. 하지만 좀 이상한 점이……."

“이상한 점?”

“나프기스가 거기서 저를 죽이려고 했다면 분명 저는 죽었을 거예요. 하지만 나프기스가 미래에서 뭔가 보고 원래 흐름과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제가 산 거예요.”

"응?"

“결국 나프기스가 본 미래는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아서 제가 죽었을 때의 미래일 텐데.”

나를 죽이고 나프기스는 뿔을 가져갔을 것이다.

어쩌면, 뿔은 못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바짝 접근했을 때 유심히 내 뿔을 관찰했으니까.

마치 아는 것을 보듯이.

나프기스는 지금까지 본 보스 몬스터 중에 가장 강했다.

만약 최후의 전당이 열린다면 왕좌에 앉을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나의 뿔을 가진 채 최후의 전당에 앉은 후, 그 이후 벌어지는 일을 본건 아닐까?

그리고 그 미래가 ‘그때 던전에 들어온 그놈을 살려둘 걸’하고 생각하게 하는 미래였던 건 아닐까.

그래서 본인이 본 미래를 바꾸려고 나를 살려준 게 아닐까?

“뭘 본 걸까요?”

“걔가 말 안 해줬어?”

“네. 말을 못 하는 것 같더라고요.”

만약 나프기스가 자신의 후회 어린 미래를 바꾸기 위해 나를 살려준 것이라면 그때 미래시의 유물로 본 것은 바꿀 수 있는 미래라는 뜻이다.

그러면 내가 펜트하우스에서 서지한 없이 홀로 우는 미래도 바꿀 수 있겠지?

하지만 어떤 흐름으로 그런 미래에 도달하는지 모르니까…….

“에이, 뭘 어두워지고 그래! 어쨌든 그놈이 널 살려 줬으면 네가 뭔가 큰일을 하나 보지, 뭐! 자자, 건배나 하자. 어쨌든 한국은 안전해졌잖아!”

침울해지는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반서진이 다시 맥주 캔을 내밀었다.

거기에 내 캔을 가볍게 부딪치며 나는 머릿속을 잠식하는 불안을 털어버리고 대충 마주 웃었다.

“으음, 완전히 안전해졌다고 하긴 좀……."

“응?”

“아직 어딘가에 발견되지 않은 던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바다 속이라던가.”

“바다?”

“네. 그 외에도 여기저기 있을지도 모르니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요. 계속 찾아봐야죠.”

기껏 분위기를 띄우려던 참에 이런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벌써 너무 풀어지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은담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 그래도 조금쯤은 쉬어도 될 거예요. 누나 너무 고생했잖아요. 혼자 던전 닫으러 계속 다니고……."

“서지한 씨가 있어서 혼자는 아니었는걸.”

“그래도요. 지한이 형이야 체력 능력치도 빵빵하니까 별 걱정 없지만, 누나는 체력 능력치도 없죠? 한눈에 봐도 점점 지쳐가는 게 느껴지던데요.”

“맞아. 네가 고생한 건 사실이지. 그, 혼자 많이 부담됐을 텐데 미안하다.”

유은담이야 그렇다 쳐도 반서후까지 이렇게 말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조금 놀랐다.

내가 가만히 쳐다보자 반서후는 괜히 눈을 피하며 맥주만 들이켰다.

“하긴, 그래서 좀 쉬려고요.”

진짜 지치긴 했다. 다시 달리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다.

나는 가만히 수긍하고 다시 맥주캔을 기울였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쌉싸름한 액체에 지난날의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떡하죠?”

"그 사람들?”

반서후와 유은담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한국 던전 다 못 닫았을 때를 대비해서 반서후 씨랑 은담이가 모으던 그 헌터들요.”

“아, 그거요? 그 사람들이야 뭐 어딘가 쓸 데가 있겠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구나.

다시 테이블 위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굴러 나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내가 모르는 사이 세 사람이 꽤 가까워졌다는 게 느껴졌다.

그 사이 나는 혼자 조용히 고민하고 있었다.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세 개의 세트 아이템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해서.

하나는 반서진에게 주기로 결정하긴 했는데 나머지 두 세트가 문제다.

솔직히 집에 올 때까지만 해도 내심 세 개 중 하나 정도는 로드란에게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엘파니스를 많이 챙겨주지 못 한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셋이서 둘러앉아 있으니 반서진에게만 아이템을 주는 것도 좀 찜찜해졌다.

유은담에게 한 세트를 준다고 해도 마지막 한 세트는 어떡하지?

으음, 어떡할까. 으으음, 으으음…….

그래. 반서후와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서지한의 죽음을 알았을 때 눈물까지 떨궜던 절친이었다.

이래저래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기도 하고 솔직히 아직도 거리감을 느끼지만…….

우리 세계 사람부터 챙겨야지! 우선 반서진부터.

“저기, 반서진 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내 말투가 다소 비장하게 들렸는지 반서진이 약간 당황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 나?”

“네. 드릴 게 있어요.”

더 뜸 들이지 않고 나는 바로 인벤토리에서 세트 아이템을 꺼내 나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독 저항 옵션이 붙어 있는 바르기스 세트다.

“어…… 설마.”

“이거, 반서진 씨가 써주세요.”

나는 반서진에게 장비를 내밀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는지 반서진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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