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계단은 꽤 길었다.
중간부터 개수를 세기 시작했는데 100개쯤 세었을 무렵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시냇물이 흐를 때 날 것 같은 맑은 소리가.
“이거 물소리 맞죠?”
확인차 물었더니 서지한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과 거기에 떠다니는 섬밖에 없는 여기에 강이나 호수가 존재할 수 있나?
나프기스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몸은 좀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 너는? 무리했잖아.”
“저도 괜찮아요.”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서지한의 상처는 치명적인 것부터 서서히 나아 없어졌다.
대각선으로 길게 베인 것도 깨끗하게 아물었고 덩달아 옷까지 완벽하게 고쳐진 상태다.
“그래도 빨리 나아서 다행이네요.”
이노기스의 S급 회복 스킬을 서지한에게 주지 못해 아쉬웠는데, 상처가 이만큼 빨리 회복되는 걸 보니 그나마 마음이 좀 놓였다.
“이건 만들어진 몸이니까. 아마 이 상태로 죽을 만큼 치명상을 입어도 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너무 위험하게 싸우지는 말아요. 아마잖아요. 확실한 게 아니니까.”
서지한이 피 웅덩이 위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던 모습이 떠오르자 누군가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처럼 답답해졌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따지자면 나는 이미 죽은 몸이잖아. 어차피 이 몸도 마석 에너지로 만든 몸이니까 죽어도 실체화가 풀리는 것뿐이겠지.”
담담하게 말하는 그를 나프기스의 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췄다.
나는 어쩐지 서지한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서 바로 옆에 있는 그에게 한쪽 팔을 꼭 잡았다.
“응? 왜 그래?”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서지한은 약간 놀란 듯 물었다.
“……그냥요.”
“그래?”
그는 더 묻지 않고 싱긋 미소 짓더니 내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손바닥을 타고 넘어오는 온기에 서늘해지던 마음이 약간 달래지는 듯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간신히 표정을 분간할 수 있는 옅은 빛과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는 반복적인 공간.
그 속에서 긴장감은 계속 높아지기만 했다.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하는 걸까?
그리고 나프기스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왜 준 걸까요?”
적막을 참지 못 하고 다시 입을 열자 서지한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응? 뭐가? 아, 뿔?”
“네. 거기서 그럴 이유가 없었잖아요.”
나는 저만치 걸어가는 빛 덩어리를 보며 목소리를 줄여 속삭였다.
“그냥 너한테 쫀 거 아냐?”
당연하다는 듯한 서지한의 말에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멍해졌다.
농담? 아, 농담이구나, 이거.
“네?”
“한눈에 보기에도 네 뿔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거겠지.”
“……그렇다고 보기에는 제 공격이 안 통했는데요.”
조용히 그의 추측에 반박하자 서지한이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으음, 하고 짧게 생각에 빠졌다.
그러곤 활짝 웃으며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귀여워서 그랬던 거 아냐?”
“……네?”
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 간격 속에서 나의 머리가 냉정하게 평가했다.
서지한 씨, 농담 센스 정말 안 좋구나. 하지만 긴장 풀어주려는 노력이 고마운걸.
그리고 나의 심장이 평가했다.
으아악, 미쳤나 봐. 너무 두근거리잖아! 서지한 씨 웃는 얼굴이 더 귀여운 것 같아요!
“후우우.”
깊게 심호흡하며 속으로 반복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서지한 씨는 그냥 호의로 분위기 풀 겸 농담한 것뿐이야.
착각하지 말자. 전에도 이런 적 있었잖아. 하하, 새삼스럽게 왜 그래, 손모아?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무시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연하다. 머리의 지능은 100이고 심장의 지능은 0이니까.
“왜? 나는 네가 엄청 귀엽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웃는 얼굴을 유지한 상태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귀엽다. 오늘부터 그냥 지능 0으로 살까?
아니, 무슨 소리야. 머리에 힘 줘서 참아야 지.
“그만 하세요.”
다시 차분하게 말하자 서지한이 낮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저 거신왕 입장에서는 네가 엄청 작게 보일 거 아냐.”
“작아서 귀여워하는 거라면 서지한 씨는 왜 그 지경으로 만들었죠?”
“검은색이 취향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덕분에 굳어 있던 어깨가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내려가고 있는데 문득 서지한이 앞쪽을 턱짓했다.
“거의 다 온 것 같아.”
거세게 들리는 물소리 위로 서지한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멀지 않은 곳에 출구로 추측되는 통로가 보였다.
빛이 쏟아지는 그 통로 속으로 나프기스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도 서둘러 뛰어들었다.
“오……."
등 뒤에서 들리는 서지한의 감탄.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 것은 온통 새하얀 분수대였다.
“물소리는 이거였구나……."
나프기스의 원래 크기에 맞춘 듯 분수대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까마득한 상공에서 떨어지는 물은 이미 분수라기보다 폭포에 가까운 위압감을 주었다.
그 위용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곧 뒤에 펼쳐진 풍경에 우리는 다시 감탄했다.
풍경의 중심에는 수정으로 깎은 듯 반투명한 빛깔의 제단이 있었다.
제단 위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들이 조명을 한껏 받고 빛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나프기스의 몸에 맞춘 듯 거대했다.
“빨리 따라가야겠는데?”
어느새 저만치 걸어간 나프기스을 손짓하며 서지한이 재촉했다.
나프기스는 제단을 오르는 계단 앞에 가만히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와본 던전 중에 제일 신비한 느낌이네요.”
“그러게.”
우리는 서두르는 도중에도 사방 여기저기에 놓인 신기한 것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던 중 서지한이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저거 몬스터 아냐?”
던전 이동 포탈처럼 생긴 원형 판 위에 돌무더기가 우르르 쌓여 있었다.
그 근처에는 정교하게 만든 비행체가 떠다니고 있다가 돌무더기를 향해 빛을 쏘았다.
그러면 빛을 받은 돌무더기 안에서 골렘 형태의 몬스터가 만들어져 걸어 나와 다른 포탈을 통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몬스터 탄생의 비밀?”
“이것들, 살아 있는 생물은 확실히 아닌 것 같네?”
진짜 특이하다.
나프기스 이전에 왔던 던전은 최소한 거주민들이 생물체였다. 하지만 여기는 나프기스 본인조차 생물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
저 구조물 외에도 대체 어디에 쓰는지 모를 기하학적인 형상의 구조물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돌멩이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고 있는 현장을 뒤로하고 제단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실컷 계단 내려왔더니 이번엔 올라가야 하네.”
까마득하게 높은 계단을 보며 푸념했더니 서지한이 재빨리 나를 안아 들고 땅을 박찼다.
놀랄 틈도 없이 나는 순식간에 제단 꼭대기에 올라서 있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제단 위로 올라오자 나프기스는 어느새 한 조형물 앞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기가 최종 목적지인가 보다.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중앙이 뻥 뚫린 거대한 둥근 금속테. 크기는 나프기스의 원래 몸을 다 비출 만큼 거대했다.
아무리 봐도 용도 불명이라 어리둥절하게 다가갔더니 나프기스가 금속테의 정 중앙에 서도록 손짓해서 가리켰다.
“여기에 서라는 거 같은데?”
서지한이 먼저 자리를 잡더니 별 위험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손짓해 불렀다.
우리가 지정한 위치에 서자 옆에서 있던 나프기스가 손을 뻗어 조형물 안으로 빛을 쏘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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