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반응 있어요?”
“아니. 눈에서 빛이 안 나는데? 관심 없어 보여.”
나는 실망스러웠지만 바로 다른 선물을 손에 들고 나프기스에게 내밀었다.
말은 안 통하지만 번갈아가며 뭔가 선물을 내밀면 이쪽의 의향을 좀 이해해주지 않을까?
"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일단 살기는 없긴 하네.”
서지한의 말대로였다.
그와 싸울 때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살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는 거신왕의 얼굴.
나는 그가 우리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가져보았다.
“말이 통하면 좋을 텐데.”
“그러게.”
하나씩 가져온 모든 선물을 내밀어봤지만 거신왕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수석을 내밀었을 때 빛이 꺼져 있던 눈이 잠깐 노랗게 번쩍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거, 멀리서 보면 정말 강매 현장같이 보이겠는데.”
온갖 물건이 산란하는 주변을 슬쩍 둘러본 서지한이 가볍게 웃었다.
보스 몬스터를 묶어놓고 번갈아가며 물건을 들이대는 모양새가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손님을 묶어놓고 물건을 강요하다니. 보통 강매가 아니네요.”
“그렇지?”
그의 농담을 받아줬더니 서지한이 다시 웃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계속 묶어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데…….
“이대로 풀어주기도 그렇고, 시간도 없는데 곤란하네요. 풀면 공격하겠죠?”
“그렇겠지. 그러면 죽여야지 뭐.”
서지한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아쉬웠다.
뿔과 던전이 아까워서만은 아니었다. 이 던전은 이미 멸망한 어느 세계의 마지막 유산이었다.
보스 몬스터를 죽인다는 건 그 세계의 마지막 조각을 부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슬슬, 이놈도 인내심이 다 닮아가나 본데.”
서지한이 나프기스을 턱짓했다.
얌전히 누워 있던 나프기스는 조금씩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사슬이 달각달각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내 기운으로 덮어서 강화시켰는데도 그리 오래는 못 버티네.”
“이 정도면 많이 버텼죠.”
“하긴. 그럼 끝내야겠군.”
사신의 낫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뭉클 치솟았다.
낫을 뒤덮은 날카로운 기운이 본래 무기의 서너 배 크기까지 성장했다.
그러나 서지한은 낫을 휘두르지 않았다.
“어? 뭐야, 좀 이상한데?”
묶여 있는 나프기스의 몸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마치 마른 점토가 갈라지듯 갑옷과 검, 투구에 자잘한 금이 가더니 그 사이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자살……? 아니면 공격당하기 전에 사슬을 풀려고 무리하는 걸까요?”
“사슬을 풀려고 이러는 거면 사슬 주변만 금이 가야 하는데, 온몸이 너덜너덜 해지고 있잖아. 뭘 하려는 거지?”
나프기스의 영문 모를 행동에 나는 상황을 파악할 생각으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느다란 균열 틈에서 부슬부슬 떨어지는 조각들.
왜 이러는 거지?
어, 잠깐. 틈 사이로 약하게 빛 같은 게…….
“모아야!”
나보다 서지한의 반응이 훨씬 빨랐다.
나프기스의 몸에 난 균열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그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고 휙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보스 몬스터와 훌쩍 거리를 벌린 그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거리까지 나를 안고 멀어졌다.
“뭐죠?”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후 나는 서지한의 품에서 내려왔다.
아직도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
서지한은 알고 있을까 해서 물었지만 그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설마 자폭 같은……?”
내가 추측하는 순간 나프기스을 묶고 있던 사슬이 모조리 박살났다.
미미하게 새어 나오던 균열의 빛은 어느새 찬란한 수준까지 변해 있었다.
“자폭…… 일 수도 있고. 아예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는데. 어차피 저게 자폭해서 죽으면 우리 목적은 달성되는 거잖아.”
“그런데 그게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나도 그래. 갑자기 죽을 이유가 없지. 하지만 저놈들이 죽을 때 빛을 내는 건 봤잖아?”
그렇다.
아까 서지한이 죽인 골렘도 죽기 전 반으로 갈라진 몸의 안쪽이 빛나긴 했지.
“일단은 좀 멀어졌다가 다시……."
나프기스가 뭘 하고 있든 여기 계속 있는 건 별로 좋은 판단이 아닌 것 같았다. 한번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와야지.
그러나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무섭게 얼굴을 굳힌 서지한이 나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프기스로부터 등을 돌렸다.
서지한의 품에 완전히 감싸이기 직전 나는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았다.
바로 앞에서 폭탄이 터진 것 같다.
하지만 충격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지한은 최대한 나를 감싸 지키려는 듯 움직였다.
“괜찮아?”
“……네.”
한차례 빛이 지나간 후 아플 정도로 나를 꽉 끌어안고 있던 그가 긴장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잠깐 눈이 좀 부셨던 것 외에는.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한 듯한 그를 보고 있으니 어쩐 지 뺨이나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괜히 기침이 나올 것처럼 목 안이 스멀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나프기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부터 확인했다.
“눈부셔요.”
“……응. 안 죽은 건 확실하네.”
“보스 몬스터는 뭐가 달라도 다르긴 하네요……."
나프기스가 있던 자리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놈이 석상이던 시절보다도 배 이상 커진 빛의 기사였다.
그냥 형용사가 아니었다.
몸이 LED 전등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새하얗게 빛나는 것이 진짜 눈부셨다.
적어도 무드등 정도의 밝기였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재도 소통 유과 먹을 수 있을 것처럼 생기지는 않았네요. 애초에 모호한 인간 형태로 번쩍거리고 있어서 어디가 입인지도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느낌에 발끝부터 긴장이 밀려왔다.
일부러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 생각으로 아무 말이나 해봤다.
“……어차피 사슬도 없잖아.”
서지한도 긴장감을 감추려는 듯 한 박자 늦게 내 말에 대꾸했다.
“그런데 저 빛나는 나프기스도 연구 결과에 있어요?”
“아니, 나도 이런 건 처음이야. 이건 좀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여차하면 그냥 도망치는 게 낫겠는데.”
빛나는 나프기스는 석상 나프기스과 전혀 다른 몬스터였다.
아무런 연구가 되지 않은 보스 몬스터.
어떤 공격을 할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정보가 전혀 없었다.
상황은 우리가 상정했던 것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지금 도망치는 건 어때요?”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군.”
가만히 서 있던 나프기스가 빛의 검을 치켜들었다.
검에서 치솟은 빛이 하늘로 솟구치더니 분수처럼 펼쳐져 결계를 형성했다.
성역 결계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확 답답해지는 걸 보니 봉쇄 결계 같은 거군. 이동 방해 역장이랑 비슷한 느낌이야.”
성역 결계와 완전히 반대되는 능력이다. 절대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아 순식간에 식은땀이 솟았다.
시험 삼아 공격 스킬로 깰 수 있나 확인 해봤지만 성역 결계처럼 아무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이길 수 있겠죠?”
내 걱정 어린 질문에 서지한이 나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도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으나 금세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괜찮아. 내 속성은 어둠이잖아. 어둠은 빛에 강하거든.”
반대 아냐?
순간 머릿속에 그 말이 떠올랐지만 꿀꺽 삼켜버렸다.
더 이야기할 여유는 없었다. 결계를 완성한 나프기스가 이쪽을 돌아보더니 걸음을 옮기려 했던 것이다.
“이런, 일단 가야겠다.”
이쪽으로 접근하는 나프기스을 보고 서지한이 서둘러 검은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짧게 ‘걱정하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빠르게 몸을 날렸다.
나프기스가 내가 있는 곳까지 오기 전에 그 앞을 막아서려는 것이다.
본인도 미지의 보스 몬스터 앞에서 불안이 없는 건 아닐 텐데 그는 꿋꿋하게 의연한 태도였다.
심지어 케르기스에게 한번 죽은 전례까지 있어서 트라우마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모아 너는 성역 결계 치고 아무것도 하지 마! 지원 공격도 하면 안 돼! 나프기스가 너한테 덤비지 않게……."
달려가던 서지한이 문득 생각난 듯 외쳤다. 그러나 그의 말을 끊고 나프기스의 공격이 달려들었다.
아까 결계를 칠 때 보여줬던 것과 비슷한 빛줄기가 나프기스의 검에서 솟아 올라 서지한을 후려쳤던 것이다.
“어이쿠, 맞을 뻔했네. 이번에는 좀 빠르다?”
날렵하게 몸을 날린 서지한이 공격을 되갚으려는 듯 기운을 끌어올렸다.
낫에서 뭉클뭉클 치솟은 검은 기운이 예리하게 나프기스을 향해 날아갔다.
“……어?”
다음 순간 공격을 날린 서지한도, 나도 몹시 당황했다.
매섭게 날아가던 서지한의 공격이 나프기스의 빛 앞에 힘없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역시 어둠보다 빛이 세잖아요!
“젠장.”
짧게 욕설을 내뱉은 서지한이 이어서 2격, 3 을 날렸으나 마찬가지의 결과였다.
그의 공격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원거리 공격은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아예 몸을 날려 낫으로 나프기스을 직접 베려고 했다.
사신의 낫이 나프기스의 정강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마치 허공을 벤 것처럼 나프기스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공격을 받은 부분의 빛이 약간 일렁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마치 물줄기를 베기라도 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