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이 상태로 그냥 날아다니는 건 확실히 눈에 될 테니까, 투명화 스크롤을 쓸게요.”
스크롤을 쓰기 전 나는 날개를 움직여서 가볍게 날아보았다.
쉽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몇 번 연습을 해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날아오를 수 있었다.
- 잘하는데?
“그래요? 그래도 집중력 풀리면 바로 떨어질 것 같은데, 오래는 못 날겠고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면서 잠깐씩 날아야겠어요. 변신 풀릴까 봐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럽다니까요.”
몇 번이나 해도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이 느낌은 정말 기묘하다. 진짜 내가 날고 있다니.
유은담은 몸을 띄우면서도 담담하던데 이것도 계속 쓰다 보면 익숙해지는 걸까?
“별 문제 없이 날 수 있는 것 같네요. 스크롤 쓸게요.”
- 응. 저쪽, 저기 위쪽 섬까지 날 수 있겠어?
“그 정도는 될 것 같아요. 이동해서 조금 쉬고 다시 올라가는 식으로 하죠.”
- 응.
나는 꺼내 든 스크롤을 찢었다. 투명화 스크롤의 열은 빛이 내 몸을 감싸고 전신이 천천히 흐려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투명해졌다.
- 좋아. 가보자.
서지한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그가 가리킨 섬까지 천천히 날아올랐다.
진짜 잠자리처럼 날렵하고 빠르게 날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뛰는 것보다는 빠른 속도였다.
그렇게 섬을 하나둘, 계속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르다 보면 보스 몬스터 나프기스가 있는 가장 높은 섬까지 갈 수 있겠지.
- 날개는 안 아파?
“익숙하지가 않아서 등 근육이 약간 뻐근하긴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사실 등에 힘을 안 주면 되는데, 날개에만 힘주는 게 익숙지가 않아서.”
- 점점 나아질 거야.
“그렇겠죠?”
그렇게 얼마간 날아올랐을까. 내 옆에 함께 둥둥 떠서 쫓아오던 서지한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 저쪽.
“저기요? 아직 덜 올라왔는데 벌써 보스 몬스터예요?”
-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 헌터가 있어.
약 200미터쯤 멀어진 섬이었다.
잘도 저렇게 멀리 있는 헌터의 기척을 알아챘구나.
서지한은 진짜 기척에 예민한 편인 것 같다.
- 슬슬 보스 몬스터가 있는 섬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헌터들이 조금씩 보이는데.
“보스 몬스터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나 감시하는 걸까요?”
-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의 말대로 섬을 계속해서 올라갔더니 헌터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스치기도 했다.
“그런데 저 헌터들, 감시하는 것 치고는 허술한데요?”
- 확실히 그러네.
“감시한다기보다…… 뭔가 자기 할 일에 다들 바빠 보여요.”
헌터들은 몹시 분주해 보였다.
감시하는 게 맞다면 감지 마법을 써가면서 투명화 스크롤을 쓰고 지나갈 우리를 탐색하고 있어야 할 텐데 주변을 살피는 헌터는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허리를 굽히고 무언가에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거죠?”
- 글쎄. 싸우는 것 같지는 않은데, 몇 명은 몬스터 잡고 있는 놈도 있는데 대부분은…….
미간을 찌푸리고 헌터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서지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 저놈들 채집하는데?
“채집요?”
- 응. 다 지금 뭐 채집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쪽에 집중하느라 네가 바로 옆에 지나가도 모르겠는데. 저기, 저쪽 봐.
그가 가리킨 방향을 가만히 쳐다보니 가장 가까운 섬 하나에서 작은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한 발짝씩 이동하는 것이 마치 모내기를 보는 것 같다.
“진짜 채집하네요. 하나 채집하고 앞으로 가서 또 채집하고.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아이템까지 알뜰하게 다 긁어 가는데요?”
- 흠, 여기 헌터들 많이 깔린 거 보니까 경비 인원을 보통 많이 푼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도 어떻게 한 놈도 제대로 경비 서는 놈이 없냐.
아,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
“이 던전 닫히면 이제 던전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한몫 챙겨야겠다 이거죠.”
-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감시는 다른 녀석이 하겠지, 나는 아이템이나 챙긴다- 뭐 이런 거?
“네, 그거요. 어디나 사람 사는 데는 똑같네요. 일에 투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꼭 상황이 제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거든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설마 한두 명 정도는 제대로 일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모두가 일을 안 해버리는 상황.
의외로 자주 겪는 일이다.
특히 헌터들처럼 개인주의와 특권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제 잇속 챙기는 걸 포기할 리가 없지.
“어쨌든 우리 입장에서는 잘된 거죠."
- 그러게.
헌터들이 제 인벤토리 챙기기에 몰두해준 덕분에 우리는 별일 없이 나프기스가 있는 섬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 여기야.
섬을 눈앞에 두고 서지한이 턱짓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날개를 접고 섬 끄트머리에 안착했다.
“굉장히 크네요. 섬 밑면의 흙 색깔도 갈색이 아니라 흰색이고.”
- 응. 그렇지? 변두리에는 일반 몬스터가 좀 있어. 그리고 섬 중앙으로 가면 나프기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가는 동안 되도록 몬스터를 안 만나면 좋겠는데요.”
여기는 거신왕의 던전.
솔직히 이번만큼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었던 적이 없다.
평화노선은 폐기하려던 참이었지만 페르기스에게는 성공했기도 하고, 이 던전은 특수하니까.
“왜 하필 거신왕일까요. 소신왕이면 안 되나요? 소신 있게……."
- 하하, 그러게.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투덜거리는데도 서지한은 마냥 재밌다는 듯 웃어주었다.
“이번만큼은 진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평화적으로 가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 가능하다면 말이지. 높은 확률로 눈 마주치자마자 죽이겠다고 덤빌 것 같지만.
이름만 들어도 느낌이 온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 해서 얼마나 큰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엄청 크겠지. 서지한도 대놓고 ‘그놈은 굉장히 커’라고 했으니까.
“충왕 변이는 일단 풀게요. 천천히 들어가 보자고요. 최대한 몬스터를 피해서……."
- 잠깐만.
“네? 충왕 변이 풀지 마요?”
- 아니, 변이는 풀어. 그런데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서지한은 그 자리에 서서 다른 섬들을 획 돌아보았다.
- 근처에 헌터들이 꽤 있어. 보스랑 만나는 도중에 난입하면 곤란해.
“그래요? 역시 보스 몬스터를 아예 안 지키는 건 아닌가 보네요.”
- 지금은 채집하느라 정신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여기에 소란이 일어나면 분명 올 거야.
“으음. 이 섬에는 헌터 없어요?”
- 보스 섬에는 없어. 괜히 돌아다니다가 나프기스을 자극할까 봐 조심하는 거겠지.
“그래서 좀 떨어져서 지켜보는 거구나.”
나는 충왕 변이를 풀었다. 그리고 마력을 모아 이 섬 전체를 감싸는 성역 결계를 펼쳤다.
마침 섬에는 헌터가 없다니 귀찮은 일을 덜었네.
반투명한 결계가 섬 전체를 감싸고 둥그렇게 둘러쳐졌다. 꼭 스노우볼같다.
혹시나 외부에서 결계를 보고 뭔가 알아챌까 봐 걱정했지만 이 정도면 가까이 오지 않는 이상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러면 되겠죠?”
- 응. 근거리 헌터들은 이걸로 다 차단되고, 원거리 헌터들이 문제긴 한데 어차피 섬이 그리 작은 것도 아니니까 중앙까지 닿는 원거리 공격은 못 할 거야.
“날아서 전투 현장 바로 위에서 아래로 쏘는 공격은요?”
-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쳐내든가 하지 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섬 안쪽으로 진입했다.
부디 아무 몬스터도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러나 우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커다란 나무 뒤에서 커다란 돌 골렘이 나타난 것이다.
듬성듬성 이끼가 붙은 몸에 회색 바윗덩이로 된 몸이 생물이라고 보기엔 영 이질적이었다.
“A급이군.”
어느새 실체화한 서지한이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섰다. 그가 서슴없이 낫으로 골렘을 베려고 했다.
“잠깐만요! 그냥, 그냥 제압만 할 수 없을까요? 가능하면 거신왕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부탁드려요.”
“……노력해볼게.”
떨떠름하게 대답한 서지한이 골렘과 대치하고 섰다.
그리고 나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듯 되도록 다리나 팔 같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위로 낫을 휘둘렀다.
“안 되겠는데?”
잠시 싸움을 진행하던 서지한이 나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말대로 팔다리를 아무리 베어도 골렘은 부스러진 다리를 이어 붙이고 즉시 전투를 이어갔다.
죽이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기세다.
“아…….“
"모아야, 미안."
나에게 짧게 사과한 서지한의 낫에 새카만 기운이 솟아올랐다. 낫은 그대로 골렘을 세로로 베어버렸다.
머리통부터 가슴까지 그대로 양단한 것이다.
갈라진 골렘은 틈에서 짧게 빛을 내더니 곧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죽었네요.”
“응…… 일반 공격하면 계속 재생하거든. 죽이려면 속성 공격으로 썰어야 타격받아.”
“그렇구나. 어쩔 수 없죠. 어서 증거 인멸하고 빨리 들어가요. 다른 놈들 더 오기 전에.”
내가 재빨리 루팅으로 시체를 치워버리자 서지한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안아 들었다
이제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더니 본인도 웃기는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꽉 잡아. 바로 나프기스의 거처까지 간다.”
말을 마친 서지한은 내가 단단히 붙잡고 있는 걸 확인한 후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뺨과 귀를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에 나는 한껏 웅크리고 서지한의 몸에 바짝 달라붙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기묘하게 생긴 조각물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마치 어디 유적지를 찾아온 기분이었다. 그중 몇 개는 우리가 지나가는 순간 반응해서 공격하려고 하기도 했다.
“이 몬스터들 진짜 다 조각상 같네요. 그냥 봐서는 모르겠어요.”
“쉿. 혀 깨물어.”
“조심할게요. 그런데 얘네, 뭔가 먹긴 할까요? 소통 유과 먹을 수 있을까요?”
점점 불길해진다.
대화가 진짜 가능할까? 그전에 소통 유과를 입에 넣어주면 삼킬 만한 소화기관이 있기는 한가?
만약 소통 유과가 안 통해서 대화를 못하면…… 싸워야지 뭐.
찾아오는 온갖 생각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동안 서지한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나는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서지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있는 거대 석상이 거신왕 나프기스야.”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후 나는 단호하게 결론 내렸다.
협상, 무조건 협상이다.
아니면 그냥 죽이고 왕관은 안 먹든가. 진짜로 최선을 다해서 어떻게든 협상을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