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 화 (145/231)

145 화

메시지가 떠오른 후 반서진이 씨익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야, 다시 한 번 잘 부탁한다. 잘해보자!”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나는 가볍게 반서진의 손을 마주잡아 악수를 받아주었다.

그녀에게 던전 출입 권한을 부여하는 절차까지 마치고 나자 반서진이 슬쩍 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유은담이랑 반서후도 이거했어?”

“아뇨. 두 사람은 아직……."

“쯧쯧, 걔네가 판단력이 좀 딸려.”

혀를 차며 두 사람을 험담한 그녀가 문득 조심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나 여기 와서 아이템 채집해도 돼?”

“아, 네. 얼마든지 하세요. 몬스터들은 다 동료니까 죽이지 마시고요.”

"물론이지! 미쳤다, 미쳤어. 던전인데 탈출석도 안 들고 어디서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고. 와. 이게 현실이라니. 진짜 믿기지가 않네……."

어차피 아이템은 사방에 깔려 있어서 다 채집하지 못할 정도였다.

던전 두 개 분량의 영토를 나와 엘파니스 둘이서 채집하고 있었으니 이만저만 낭비가 아니었다.

반서진이 신이 나서 감탄사를 터뜨리며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시스템 창에서 신하 목록을 열어보았다.

예전에는 서지한, 엘파니스, 로드란 세 명 뿐이던 단출한 목록이 어느새 스크롤바까지 생길 정도로 빵빵해져 있었다.

그건 이번에 복속시킨 페르기스의 공로가 컸다. 그가 내 아래로 들어오면서 페르기스가 이끌던 무리도 함께 복속된 것이다.

엘파니스가 나의 신하가 되자 로드란까지 복속된 것과 같은 원리였다.

이름이 적혀 있는 로드란과 달리 페르기스의 부하는 A급 수왕류, B급 수왕류와 같은 분류명으로 적혀있었다.

아마 통성명을 하지 않아서 그런것 같다. 어차피 이름이 적혀 있었어도 누가 누군지 모르니 상관없었다.

각 분류 옆에는 괄호와 함께 숫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건 아마 인원수인 것 같다. 이름을 알게 되면 목록이 더 길어지겠네.

그리고 계속 스크롤을 내리자 비로소 반서진의 이름이 나타났다.

영입순 정렬인지 반서진의 이름은 목록 가장 아래에 있었다.

- 괜찮겠어?

어느새 실체화가 풀렸는지 반투명해진 서지한이 슬쩍 다가왔다.

“뭐가요?”

- 어머니도 오시는 던전에 반서진을 풀어놓는 거 말이야. 너도 쟤 불편해 하잖아.

반서진이 무슨 짐승도 아닌데 풀어놓다뇨.

으음, 그녀가 엄마를 인질로 잡기라도 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하긴 서지한은 헌터들을 안 믿으니까.

확실히, 반서진은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뭔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 상상이 안 된다.

반서진은 뭐든 목적이 있다면 앞에서 대놓고 말할 성격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배신할 속셈을 가지고 있다면 신하가 된 순간 유대감의 끈을 통해 그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 그녀에게 느껴지는 건 마치 투명한 유리창 같이 맑은 느낌뿐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바로 느낄 수 있으니까.”

내 말에 서지한은 비로소 왕이 신하들에게 가지는 유대감을 떠올렸는지 조용해졌다.

“그나저나,피곤하네요.”

큰 거 한 방 쓰느라 마력을 다 끌어다 썼더니 온몸이 노곤했다.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내일 공략을 위해서 저는 이만 쉬러 가야겠어요.”

모두에게 들리도록 크게 말하자 다들 선선히 수긍해주었다.

반서진은 자신이 합류한 기념으로 술파티라도 해야 한다고 아쉬워했으나, 우선순위는 중요하니까.

파티는 한국 던전을 다 닫고 나서도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한국의 던전은 하나.

거신왕 나프기스의 던전이다.

* * *

나프기스 던전은 지금까지 내가 와본 어떤 던전보다도 특이한 환경이었다.

미리 서지한에게 던전에 대한 정보를 듣긴 했지만 진짜 눈으로 보는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짜로 섬이 떠 있네요……."

- 신기하지?

수많은 섬들이 하늘에 둥둥 뜬 상태로 해파리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간간이 자기들끼리 부딪히는 섬도 있었다. 내 머리 위에서 섬과 섬이 부딪혀 흙 조각이 후드득 떨어졌다.

- 재수 없으면 던전 게이트 타고 들어오자마자 아래로 곤두박질 칠 수있어.

“우리도 좀 그랬잖아요.”

게이트를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래로 몸이 흑 꺼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다행이 땅과 30cm 정도 떨어진 높이라 다치지는 않았지만 진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탄력 넘치는 벼룩의 다리에 리스펙트.

- 이번에도 내가 실체화해서 같이다니는 게 좋겠지?

서지한이 씨익 웃으며 자연스럽게 팔을 벌렸다.

페르기스 던전에서 나를 안고 다닌것처럼 그가 나를 안고 섬과 섬으로 도약하며 다니겠다는 뜻이었다.

섬 사이의 거리는 가까운 것은 20미터, 먼 것은 100미터 정도로 그의 도약력이면 충분히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이런 때를 위해서 혼자서 은밀하게 연습하던 것이 있었다.

“잠깐만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응?

나는 늘 사용하는 모포를 꺼내 덮은 후 벼룩 모습을 해제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옷을 꿈지럭꿈지럭 입은 뒤 모포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 다 갈아입었어?

서지한은 오늘도 내가 모포를 꺼내자 바람처럼 뒤돌아섰다.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이 보였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되나 보다.

“네.”

내 대답에 서지한이 다시 이쪽으로 조심스레 돌아섰다.

그리고 나의 옷차림을 눈에 담자마자 목부터 머리까지 붉은 물이 확차올랐다.

- 무,무슨 그런 옷을…….

평소와 달리 나는 등이 뚫린 옷을 준비해 입었다.

지금부터 쓸 스킬과 관련된 복장이었다.

등이 시원한 것이 좀 허전하긴 한데 이 던전은 추운 편이 아니라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서지한에게는 훤하게 드러난 내 등이 자극이 강했던 모양이다.

“이상해요?”

- 이, 이상한 게 문제가 아니라. 왜 그런? 아니, 예쁜데. 그게. 그 상태로 안고 움직이면 맨 등에 내 손이 닿는, 그, 너는 괜찮아?

차마 눈을 못 마주치고 횡설수설하던 서지한이 마지막으로 외치듯 물었다.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별로 안 추워요.”

- 그게 아니라! 아!

뭔가 할 말이 가득한데 입에 담지 못하겠는지 그가 단말마를 터뜨렸다.

서지한의 온몸이 새빨개진 모습을 구경하는 건 재미있지만, 시간이 별로 없으니 좀 서둘러야겠다.

던전이 여기 하나밖에 없으니 언제 헌터들이 내부순찰을 하겠다 나설지도 모른다.

“이 옷, 비행능력 써보려고 특별히 챙겨 입은 거예요.”

혼자서 ‘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서지한의 눈에 그제야 이성의 빛이 들어왔다.

차근차근 내 옷을 관찰하던 그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 날개용으로 뚫은 거구나. 그 옷 입은 상태로 날개 있는 충왕류로 변신하게?

“그것도 생각하긴 했는데, 그건 나중에 다른 나라 도시에서 사람들 지키러 다닐 때 불편하겠더라고요. 자칫하면 몬스터로 오해받을 수도 있고, 공격당할 수도 있고.”

- 아, 응. 그건 그렇지.

“그래서 부분변이를 연습했어요.”

- 대체 언제?

그가 깜짝 놀랐다.

나와 거의 24시간 붙어 있는 사람이니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내가 뭔가 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샤워할 때 조금씩요. 옷 입고 있을 때 하면 옷 찢어 먹으니까.”

- 하루 종일 공략하고 남은 시간엔 채집하고 집에 와서 자기 전 잠깐 씻는 그때마저 스킬 연습을 했다고?

나는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비행스킬 계속 가지고 싶었거든요. 은담이가 높은 데서 여유롭게 스킬 쓰는 거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데요. 고지대에서 아래로 포격할 수 있으면 장점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 그렇긴 하지.

“전장도 한 눈에 볼 수 있고, 조준도 쉽고, 지상에서 정면에 있는 몬스터 쏘려다가 뒤에 있는 사람이 맞을 일도 없고, 위에서 아래로 딱딱 집을 수 있다고요.”

- 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무리하다가…….

“자자, 이제 변신 해볼게요.”

가만히 두면 서지한의 잔소리가 시작될 것 같아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적당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작위적인 박수를 보냈다.

- 와와, 다시 돌아온 손모아의 변신쇼!

“기대하시라고요!”

그의 장단에 맞춰 연극조로 그럴듯한 무대 인사를 올린 후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충왕변이를 사용하며 몸이 변하는 것을 세세하게 제어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변이하는 것을 막고 등만 가만히 내버려둔다.

날개 뼈 사이에서 간질간질한 감각이 느껴졌다.

제대로 되고 있는지 앞에 앉은 서지한이 작게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변이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작업을 마친 후 눈을 뜨고 어깨너머를 살펴보았다.

반듯하게 치솟은 날렵한 두 쌍의 날개. 새카만 벨벳으로 만든 것처럼 우아했다.

- 무슨 날개야?

“……검은 물잠자리 날개에요.”

충왕변이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말을 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부분변이는 전신변이보다 훨씬, 훨씬 어려웠다.

비유하자면, 혀 뒤에 물 한 모금을 두고 그걸 삼키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혀 앞으로 가져오지 않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목구멍에 가랑가랑하게 물을 두는것.

그걸 꿀꺽 삼켜버리면 바로 전신변이가 되어버린다.

손으로 충왕포를 쓰는 연습을 할때도 참 어려웠는데, 원래 정해진 방법이 아닌 방식으로 스킬을 쓰는건 진짜 힘든 것 같다.

- 나비 날개가 더 예쁘지 않겠어?

“그건 너무 커서 전투 중에 손상될 위험이 커요.”

- 그렇긴 하지. 면적이 넓을수록 힘드니까. 그런데 색은 투명한 날개가 더 낫지 않았을까?

“너무 벌레 같잖아요. 다른 나라 던전 터졌을 때 도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구하러 다닐 때 쓸 스킬인데 사람들이 보고 벌레 같으면 안 되잖아요.”

- 그렇긴 하지.

“이거 쓰는 내내 긴장해야 해요. 한 발 삐끗하면 순식간에 충왕포 쏘는 벌레 괴수로 변신하게 될 테니까요.”

도시에 나타난 끔찍한 최종 보스몬스터가 나였다니?! 같은 전개는 정말 사양이야.

- 으음, 그 상태로 작아질 수 있어? 여기 돌아다닐 거면 작게 다니는 게 눈에 안 띄고 좋을 것 같은데.

“날개는 되는데 여기 사람 몸 부분은 충왕변이에 해당이 안 되는 부분이라 작아질 수가 없어요.”

그렇구나…….

“저도 생각은 해봤던 부분이에요. 혹시 작아질 수 있으면 옷은 서지한씨 인형 옷 빌려 입으면 되니까.”

내 말에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 하던 서지한이 몹시 아쉬운 눈으로 내 날개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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