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박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믿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의 근거가 있으신가요?〉
화면이 박 교수의 답답해하는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했다.
그 상태로 잠시 기다린 뒤 다시 카메라가 진행자를 잡았다.
〈특별한 근거는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나는 탄식했다. 노골적인 연극이었다.
일견 토론처럼 보이지만 두 교수는 정해진 역할을 맡은 배우에 불과했다.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온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아무 논리가 없을 리가 없다.
결국 박 교수는 김 교수의 주장이 더욱 논리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장치였다.
아무 논리 없는 박 교수 덕분에 김 교수의 모든 주장과 근거가 굉장히 합리적인 말처럼 들리게 만든다.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우리가 대중에게 저 정보를 뿌릴 것을 대비해서 ‘이건 테러리스트가 던전을 닫으려고 명분용으로 꾸며낸 가짜 정보’라는 논리를 만든 거다.
휴대폰을 꺼내 방송의 실시간 반응을 찾아보니 예상대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일색이었다.
- -던전 독식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서 핑계 ㅋㅋ
-핑계도 진짜 성의 없이 지어냈음
-돈 때문에 힘들어서 죽는 사람들 많이 있는데 나도 은행 털어도 됨?
L서지한식 논리 ㅋㅋ
-박교수 진짜 한심하네. 저거 믿는 사람 없지?
저쪽에 전달한 정보가 좋지 않은 형태로 대중에게 전달될 수도 있다는 건 이미 예상했다.
그리고 이런 반응도 이제 몇 번 봤더니 익숙해졌다.
나는 모래알 같은 밥을 억지로 삼키면서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한국에 남은 던전은 나프기스 던전뿐이군요.〉
진행자의 말에 두 교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섰다.
던전 관리청 보안과장이라는 소개 자막이 아래에 흘러나왔다.
〈예. 3대 길드가 모두 힘을 합쳐 던전을 지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던전 내부 순찰도 돌고 계시다고요?〉
〈예.〉
〈만약, 만약 나프기스 던전이 닫히면 한국은 ‘무 던전 국가’가 되는 것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직 독도에 있는 해상 던전이 남아 있습니다.최근에 열린 것인데, 현재 테러리스트들이 점거하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만.〉
〈테러리스트들이 왜 그 던전은 닫지 않고 있는 걸까요?〉
〈공략이 어려워서 아직 보스 몬스터를 잡지 못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독도 해상 던전은 아직 나의 성역 결계로 지켜지고 있는 상태다.
아직 결계 해제 스킬을 가진 헌터가 나타나지 않았는지 다행히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만약 결계가 해제되더라도 거기 머물고 있는 유은담이 1차적으로 나에게 연락을 주기로 했다.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 결계를 뚫고 헌터들이 들어가 엘파니스를 해치지 않도록.
“자기들끼리 추측하고 결론 내리고 난리 났네. 그렇지?”
삐딱한 자세로 화면을 쳐다보던 반서진이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넘어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의 각도로 의자를 젖히고 있어서 보는 사람이 다 아슬아슬할 정도였다.
아, 하긴 염력으로 받치고 있을 테니 넘어질 일은 없겠구나.
“으음, 그래도 해외에서도 관심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건 긍정적이네요.”
“긍정적이라고?”
“그래도 진짜 뭔가 벌어지고 있어서 던전 닫고 있다고 생각해줄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방송에서는 서지한이 나쁜 놈이라 던전을 다 닫고 있다고 몰아가고 있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자국 던전만 닫는 부분에서 이상함을 느껴야 한다.
진짜 테러리스트면 해외 던전도 종횡무진 털어야지 왜 자국 던전만 닫겠어?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냐?”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말이야. 아무것도 안 하는 한 명? 없는 거랑 뭐가 달라?”
“그건……."
“음. 아니 그건 뭐 아무래도 좋아.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건가?
내 의아한 시선에 반서진이 식탁 앞으로 몸을 바짝 붙여 앉았다.
그리고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뉴스를 계속 보니까 갑자기 좀 궁금해지더라고.”
"네?”
“얼마나 강한 거야?”
"음〉.”
“둘이서 보스 잡고 다닌다고 할 때는 그러려니 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면 진짜 대단하잖아.”
반서진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와서 지한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 호승심의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 같아서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전에도 던전을 닫으러 다닌다고 했더니 며칠 내내 한 판 싸워 보자고 했었지.
그 일의 재림인가.
싫어, 싫다고. 던전 닫기도 바쁜데 왜 아군이랑 스파링을 해야 해?
“저기, 반서진 씨.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싸우는 건 좀 싫어요.”
“싸우자는 게 아니라 어디 한 방 날려서 그 위력만 좀 보여 달라 이거지. 나 그렇게 계속 질척거리는 성격 아니야.”
충분히 질척거리고 계신데요.
나는 대답 대신 남은 밥만 크게 한술 떠서 우물거렸다.
이걸 어떻게 회피한다?
태도를 보니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궁금하면 보여줄게.”
뜻밖에도 옆에 있던 서지한이 나섰다.
“모아야, 괜찮지? 한 번쯤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내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은 서지한이 싱긋 웃었다.
나는 우물거리던 음식을 삼키고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서지한 씨만 괜찮다면요.”
“문제없지. 보여줄게. 얼마나 세졌는지.”
“오, 그래? 그럼 여기 근처 공터 찾아둘게. 밥 먹고 있어!”
반서진은 신이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나는 얼른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왜?”
“여기서 공격 스킬 날리면서 소란 일으키면 들킬지도 모르잖아요. 근처 주민이 신고할 수도 있고요. 일단 숨어 사는 처지거든요 우리.”
“아, 그랬지. 음. 어디 무인도라도 찾아볼까?”
“아뇨. 적당한 장소가 있어요.”
나는 남은 밥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던전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이거…… 던전 게이트?”
눈에서 별을 쏟아내고 입에서 무지개 토를 할 기세로 반서진이 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내가 던전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던전 게이트를 열 수 있다는 건 몰랐는지, 그녀는 신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들어가요.”
게이트의 앞, 뒤, 옆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반서진이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나와 서지한도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금방 다시 오셨군요?”
말린 식물이 가득 든 소쿠리를 들고 어딘가 걸어가던 엘파니스가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 옆에는 뭔가 우물거리고 있는 페르기스도 함께 있었다.
잠깐 사이 꽤 사이가 좋아졌는지 페르기스는 보스 몬스터라는 위엄도 어딘가 내다 버리고 마치 가축처럼 얌전한 태도였다.
목덜미에 걸린 짐 바구니를 보니엘 파니스의 소일거리를 돕고 있던 모양이다.
“와, 이거 보스 몬스터 페르기스 아냐? 그리고 이거 뭐야. 성? 폐허?”
던전에 들어선 직후부터 정신없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반서진이 문득 엘파니스 쪽으로 다가오던 로드란을 발견했다.
그리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얼, 능력 있는데? 재, 너 이거야?”
새끼손가락을 곧게 펴고 살랑살랑 흔드는 반서진.
순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들었는데, 아니, 이 사람이 진짜!
반서진을 본 서지한의 표정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원래 이 던전 주인이던 분이에요. 지금은 같이 일하고 있어요.”
아, 표정 수습하기 힘들다.
다행히 로드란과 엘파니스는 반서진의 새끼손가락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지 유순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발랄한 분이시군요. 저는 엘파니스, 이쪽은 제 손자 같은 기사 로드란입니다. 왕의 동료이십니까?”
“아, 그렇지. 당신은 쟤 졸개?”
“신하라고요!”
“그거나 이거나.”
반서진의 거침없는 단어 선정에 기겁하는데 정작 엘파니스는 웃기만 했다.
로드란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고 페르기스는 무척 기분이 상했는지 목에 걸고 있던 소쿠리를 땅에 툭 떨어뜨렸다.
“아무튼, 어서 보자. 서지한 실체화 곧 풀리는 거 아니야?”
그건 맞는 말이다.
“엘파니스 씨, 혹시 근처에 공터 같은 거 있나요? 스킬 위력 테스트를 좀 하고 싶어서요.”
“아, 그런 거라면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여기는 공터만은 남아돌거든요.”
엘파니스는 흔쾌히 대답했다.
“이리로 오시지요.”
엘파니스는 우리를 성 뒤쪽으로 안내했다. 따라가 보니 숲 위로 불쑥 솟은 바위산이 보였다.
그 산을 가리키며 엘파니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 도시를 만들 때 돌을 채취해오던 채석장입니다만, 보시다시피 그저 바위산이라 채집할 아이템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담 없이 저 바위산에 스킬을 쓰시지요.”
“정말 괜찮아요?”
“그럼요. 바위가 다 부서져도 상관없습니다. 부서진 돌은 가져와서 손질해 도시 보수 공사에 쓸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걸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서지한에게 눈짓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럼, 잘 봐.”
반서진과 나를 잠깐 돌아본 서지한이 사신의 낫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새카만 기운이 확 터져 나와 그의 전신을 타고 넘실거렸다.
뒷모습만 보고 있는데도 목에 칼이 들어온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느낌인지 엘파니스, 페르기스, 로드란, 그리고 언제나 여유작작한 반서진까지 바짝 긴장하는 게 보였다.
불꽃처럼 일렁이던 검은 기운이 서서히 낫으로 모여들었다.
낫에서 치솟는 패도적인 기운이 정점에 달한 순간, 서지한이 빠르게 무기를 휘둘렀다.
낫에서 튀어나간 반월형의 거대한 그림자가 바위산을 향해 돌진했다.
피이익- 하는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그리고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산이 세로로 갈라졌다.
쿠르릉.
바위산의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놀란 것처럼 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산은 마치 협곡을 사이에 두고 원래 두 개의 산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쪼개져 있었다.
“이 정도?”
모두 감탄하는 와중에 서지한이 이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