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화
“신기하네요.”
“응.”
가만히 서서 서로 벽을 세우는 던전의 경계를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지난 며칠간의 폭풍 같은 나날이 떠올랐다.
엘파니스를 만나고 난 후부터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독도 던전을 포위한 수백 명의 헌터들을 뚫고 탈출해서 지르기스, 게오기스, 이노기스를 공략하고 페르기스를 설득해내는 이 순간까지 단 일주일 남짓 걸렸을 뿐이다.
지르기스를 만나러 갈 무렵만 해도 나는 보스 몬스터라는 이름 앞에서 잔뜩 긴장했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아침마다 보스 몬스터를 잡으러 가는 나날 속에서 어느새 그것도 익숙해져 버렸다.
이제 딱히 긴장도 되지 않는다.
“이제 국내 던전도 하나 남았네요.”
생기자마자 서지한이 닫은 키르기스 던전과 가장 최근에 독도에 생긴 엘파니스 던전을 제외하면 기존에 한국에 있던 던전은 총 6개.
그중 바르기스, 지르기스, 게오기스, 이노기스 던전 보스는 모두 잘 손질되어 내 인벤토리에 들어와 있고 페르기스는 복속시켰으니 남은 건 하나뿐이다.
“그래, 진짜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야.”
비록 산 넘어 산이라 한국의 던전을 다 닫는다고 해도 전 세계의 다른 던전에서 튀어나올 몬스터들과 최후의 전당, 포식자라는 고비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 안전해질 테니 그것만으로 이 고생은 할만한 가치가 있는 고생이다.
“거신왕 던전은 어떤 곳이에요?”
하나만 더 닫으면 일단 한시름 돌린다는 생각이 들자 의욕이 치솟았다.
내 질문에 서지한이 먼 곳을 바라보던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거신왕 나프기스? 좀 특이해. 지금까지 제일 연구가 적게 된 던전이기도 하고.”
“어…….”
지금까지 서지한이 보스 몬스터에 대해 말하던 태도와 사뭇 다르다.
약한 놈, 엄청 약한 놈, 금방 잡을 수 있는 놈 같은 수식어만 듣다가 ‘특이하다’라는 말을 들으니 어쩐지 불길해졌다.
엄청 강한 거 아냐? 이름도 ‘거신’이잖아.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속성 공격만 가능하면 잡는데 별 문제없으니까. 나도 어둠 속성 공격 있고 충왕포도 전기 속성 있잖아?”
“으음, 네……."
그래, 서지한이랑 같이 가는데 무슨 걱정이야!
만약 진짜 위험한 던전이라면 내가 가고 싶다고 해도 서지한이 말렸을 거다.
“공략에 대한 건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말해줄게. 그보다 손님이 온 것 같아.”
서지한이 짧게 나무 아래를 턱짓했다.
근처 수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우거진 수림 사이로 드문드문 커다란 그림자가 얼비쳤다.
“내려가 볼까요?”
“응. 자, 여기 내가 도와줄게.”
그가 팔을 뻗어 자연스럽게 나를 받쳐 들더니 단숨에 나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거의 5~6미터쯤 되는 높이를 계단이라도 오르내리듯 된 것이다.
하긴, 평소 보스 몬스터와 전투하던 때의 그의 도약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긴 했다.
“저쪽.”
서지한이 턱짓한 방향에서 풀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불쑥 사슴 머리가 나타났다.
“내가 잘 찾아왔군.”
페르기스였다.
나의 신하로 복속된 덕분에 소통 유과 시간이 끝났는데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나는 사슴을 향해 눈인사를 건네다가 멈칫했다.
뿔.
페르기스의 황금빛 우람한 뿔이 사라져 있었다.
아, 그렇지. 내가 퀘스트 보상으로 뿔을 받았으니까 그의 머리에 있던 뿔이 사라지는 게 당연하겠구나.
“으음……."
좀 복잡한 기분이다.
다른 보스 몬스터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사슴은 뿔이 있으면 수컷, 없으면 암컷이 아니던가?
혹시 나 때문에 이 사슴이…….
아니, 원래 암컷이었던 것일지도 모르잖아.
솔직히 궁금하긴 하는데 묻지 않기로 했다. 얘가 수컷이든 암컷이든 무슨 상관이람.
“왜 그러는가?”
“아, 아니야……."
대충 얼버무리자 페르기스는 약간 의아해하긴 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해냈군. 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대단해.”
페르기스는 꾸밈없는 태도로 솔직하게 나를 칭찬했다.
혹시 뭔가 의도가 있는 말인가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미 게임이 끝났으니 이전처럼 기싸음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가.
“아, 응. 고마워.”
“그보다 그대, 이미 영지를 가지고 있었군. 그대는 원주민이 아니던가?”
던전은 피난민들이 자신의 터전을 들고 도망친 것이다.
당연히 피난한 적이 없는 원주민은 뿔을 먹어 왕이 되더라도 던전을 가질 수는 없었다.
페르기스가 보기에는 신기할 수밖에 없겠지.
“어떤 분이 줬어.”
엘파니스의 사정을 구구절절 이야기하기도 좀 그렇고 갑자기 친밀하게 구는 것도 이상해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페르기스는 더 토 달지 않고 그것만으로 납득했다.
“그렇군. 그대는 어진 왕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뭐지? 왜 이렇게 칭찬을 하는 거지?
갑자기 너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니 오히려 좀 어색할 지경이다.
음, 하긴.
이쪽 라인을 타기로 했으면 열심히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이 좋지.
게다가 생사여탈권이 내 손에 달려있는 거나 다름없으니.
“이쪽은 나의 가신들이네. 이 던전에 있는 모든 자들이 나의 가족과 같은 자들이지만 이들은 특별히 가까운 사이라 새로운 왕에게 인사를 시키고자 해서 모아봤다네.”
페르기스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그의 뒤에 서 있는 커다란 소, 가젤, 말 같은 몬스터들은 뭔가 했는데 그런 이유로 데려온 거였군.
“전부 A급이네.”
그들을 쓰윽 훑어본 서지한이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초식동물들이라 덩치만 크고 좀 약한 몬스터들이 아닌가 했는데 깜짝 놀랐다.
내 시선을 받은 몬스터들이 우물쭈물하며 어색하게 앞다리를 굽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페르기스 때문에 갑자기 끌려온 것 같은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인사라.
“엘파니스랑 서로 소개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던전 통합도 되어버렸고.”
내 고민을 읽은 듯 서지한이 슬쩍 말을 건넸다.
하긴, 이제 서로 알고 지내야 할 텐데 내가 소개해주는 게 좋겠지.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저 영역의 원래 주인인가?”
“응.”
말귀를 빨리 알아듣는 사슴이다.
페르기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 선 몬스터에게 눈짓을 했다.
아마 물러가라는 뜻이었는지 몬스터들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아직 몇 마리 남아 있는데?”
“잔걱정이 많은 아이들이라.”
서지한이 나무 여기저기에 시선을 주며 말하자 페르기스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지한은 약간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나는 크게 나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신하로 복속시키면 그 존재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페르기스에게서 느껴지는 건 홀가분한 호감이었다. 거기에 약간의 고마움까지 느껴졌다.
“영역까지는 꽤 먼 길이 될 듯하니, 내가 좀 돕도록 하지. 나의 다리는 아주 빠르다네.”
살짝 눈을 휘며 웃어 보인 페르기스가 바닥에 얌전히 앉아서 등을 내밀었다.
이 모습,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페르기스 진짜 크구나.
앉았는데도 등이 내 가슴보다 높았다.
저 등에 타려면 껑껑 기어 올라가야겠는데.
그래도 모처럼 호의 어린 제안을 했으니 받아볼까.
“아, 고마……."
“필요 없어.”
내 대답마저 가로막으며 서지한이 단호하게 페르기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모아는 내 팔이 더 편할 거야. 그렇지? 탑승감도 더 좋고. 그리고 내가 더 빨라.”
땅을 박차고 한 번에 몇 미터씩 휙획 날듯이 뛰는 서지한이니 페르기스보다 느리지는 않겠지.
하지만 저기, 서지한 씨. 인간으로서 탑승감을 자랑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래도 페르기스가 모처럼 제안을…….”
“모아야? 설마 나보다 저 사슴의 등이 더 좋다는 건 아니지?”
서지한 씨, 경쟁하고 이기는 거 좋아하는 건 알겠어요.
그래서 랭킹 1위까지 되신 거도 알겠고, 하지만 탈것계의 랭킹 1위도 노리시는 건가요?
“그, 서지한 씨도 내내 피곤……."
“모아야?”
나는 페르기스의 기다란 허리가 탐났지만 결국 서지한의 팔에 들어갔다.
그가 워낙 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도 했고, 페르기스의 등에 탔다간 그 기다란 등이 사신의 낫에도 토막이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서지한은 그제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 팔이랑 사슴 등 중에 아무리 봐도 후자가 더 타는데 적합한 것 같은데.
사슴한테 타는 건 안 되지만 사람 팔에 타는 건 괜찮은 거야?
나는 정말 모르겠다. 서지한의 기준…….
어쨌든 서지한과 페르기스가 서로 경쟁하며 달려준 덕분에 우리는 금방 엘파니스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또 새로운 손님이 오셨군요.”
여느 때와 같이 푸근한 인상으로 반겨주는 엘파니스는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무슨 일인지 다 눈치챈 표정이었다.
“이번에 새로 합류한 페르기스예요. 던전 통합이 되어서 같이 지내셔야 할 것 같아 소개할 겸 데려왔어요.”
“그렇군요.”
빙그레 웃는 엘파니스의 어깨너머에서 로드란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 두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간 페르기스가 냄새를 맡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갑자기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그럼 저는 돌아가 볼게요.”
“늘 금방 가시는군요. 차를 많이 준비해두었는데……."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엘파니스가 섭섭한 말투로 나를 붙잡았다.
차? 좋긴 하지만, 지금은 집에 가서 일단 소파에 몸을 좀 묻고 싶다.
“곧 같이 시간 보낼 일이 많을 거예요.”
에둘러 거절하자 엘파니스는 더 권하지 않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페르기스가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로드란은 페르기스의 얼굴이 다가올 때마다 움찔움찔하고 있었는데 엘파니스는 신경도 쓰지 않는 표정이다.
“나중에 또 올게요. 잘 지내고 계세요.”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둘을 소개해주고 호숫가 집으로 돌아가자 밥을 먹고 있던 반서진이 나를 반겼다.
"어어.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