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내가 갑자기 숲에서 뛰쳐나가자 늘어져 있던 헌터들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뭐, 뭐야!”
그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움켜쥐고 이쪽을 경계했다.
그러나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맥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사람이네?”
“에이씨, 놀랐잖아.”
아무래도 내가 몬스터인 줄 알았나 보다. 하긴 여기는 던전이니까.
그들이 치켜들었던 무기를 느슨하게 쥐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일부러 혈떡이는 숨을 고르는 척 연기했다.
마치 급한 소식이 있어서 허겁지겁 달려온 것처럼.
“그, 누구……."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입으려는 순간 나는 다급하게 그의 말을 자르고 외쳤다.
“나가셔야 해요!”
뜬금없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헌터들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하고 맹하니 이쪽을 보는 시선 속에서는 이미 경계심을 찾기 힘들었다.
“나가다니?”
던전에서 얼굴을 다 가린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의 정체보다 던전에서 나가야 한다는 말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갑자기 뭔 소리야. 아직 본전도 못 뽑았는데.”
누군가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나는 그들의 의문을 모조리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내 말만 밀어붙였다 포인트는 급하게, 아주 큰일이 난 듯 호들갑 떨면서 말하는 것이다.
“진짜 큰일 났다니까요! 빨리 나가셔야 해요.”
솔직히 이번 일을 시도하면서 ‘큰.일. 났. 다. 니. 까. 요’ 같은 느낌으로 말하게 될까 봐 무척 걱정했다.
다행히 그동안 나도 꽤 노련해졌는지 그 정도로 어색하지는 않았다.
약간 평소와는 다른 어투이긴 하지만…….
그,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진짜 큰일이 나긴 났잖아. 밖에 나가면 깜짝 놀랄걸?
“아니, 다짜고짜 그러면……."
“그래, 뭔 설명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역시 순순히 따라주지는 않는구나.
하지만 상황을 꾸며내는 것보다 나는 적당히 진실을 섞어서 밀어붙이기로 했다.
즉석에서 꾸며내는 건 내 거짓말 실력으로는 무리니까, 그냥 우겨보자.
“자세한 건 나가면 알게 될 거예요! 빨리빨리! 시간 없어요!”
그래, 나가자마자 알게 되겠지.
그리고 시간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퀘스트 공략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고요! 빨리 나가주세요!
저 진짜 시간 없거든요!
“그래도……."
“갑자기 나타나서 나가라고 하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나의 정체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래, 그나저나 당신 누구야?”
헌터들 중 가장 후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느껴지는 기운을 봐서는 마력계 헌터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은은하게 적대감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진짜 급하니까 빨리 나가세요.”
나는 이 상황에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바로 던전 게이트를 연 것이다.
대충 주먹을 꾹 움켜쥐며 탈출석을 부수는 시늉을 하고 게이트를 열자 그제야 헌터들 사이에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뭐야, 진짜 심각한 일인가……."
“이렇게 탈출석까지 쓰면서 귀환 명령 내릴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으음, 그래도 무슨 일인지 알려줘야지…….”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헌터들은 모두 난감한 표정이었다.
몇 명은 열려버린 탈출 게이트가 신경 쓰이는지 안절부절못하며 그쪽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저는 여기 헌터들 내보내라는 임무 받고 온 거예요. 밖에 지금 비상사태니까 얼른 나가보세요!”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헌터들은 결국 못 이기는 척 하나둘씩 게이트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나를 끝까지 경계하던 마력계 헌터도 귀한 탈출석을 낭비하는 것이 싫었는지, 아니면 공짜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는지 결국 다급하게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진짜 갔네.”
모든 헌터들이 사라진 후 서지한이 신기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이게 진짜 되네.
“말 잘 듣는데?”
서지한이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파악을 마친 표정이다.
“그러게요. 이렇게까지 잘 될 줄은……."
약간 얼떨떨하게 중얼거리자 서지한이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쓸 만하네. 성자의 위엄 스킬.”
서지한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연극 같은 짓을 한 것은 모두 성자의 위엄 스킬이 어느 정도 효력이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S급 스킬을 다섯 개 이상 가질 수없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나는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은 성자의 위엄 스킬을 가지고 있기로 했지만 새로운 뿔을 얻을 때마다 새로 얻은 스킬과 성자의 위엄 스킬을 저울질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지르기스와 게오기스 때 까지는 탐나는 스킬이 없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수왕 이노기스였다.
수왕 이노기스의 그림자로 순간이동하는 능력과 자가 재생 스킬.
특히 자가 재생 스킬은 신체 방어와 회피 능력이 낮은 나에게 아주 유용한 스킬이다.
성자의 위엄을 자가 재생 스킬로 교체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게요. 기대했던 것보다는 효력이 좋은 편이지만……."
“확실하게 좋다는 생각은 안 들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성자의 위엄이 나에게 준 혜택은 반 씨 남매가 나에게 협조하게 해 준 것 정도다.
으음, 이것도 반쯤은 그냥 추측이고. 성자의 위엄 스킬이 없었더라도 날 도왔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아무리 반 씨 남매가 도움이 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다른 유용한 S급 스킬 하나를 포기하고 성자의 위엄을 유지한다는 건 너무 낭비가 심하다.
“그래도 하나는 확인됐네.”
“어떤 거요?”
“성자의 위엄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백번 양보해서 저 헌터들이 굉장히 순진한 성격이라고 치더라도 놀라운 성과죠.”
“나도 놀랐어. 오늘 처음 본 사람이 논리도 없이 우겨대는 말을 그대로 믿어주다니.”
“그래도 의심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성자의 위엄 스킬이 불러일으키는 호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에게 의심 어린 시선을 던지던 마력계 헌터를 떠올렸다.
그 사람 때문에 하마터면 망칠 뻔했지.
게이트를 열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탈출석을 쓰라고 했다면 아마 들어주지 않았을 거다.
“아, 그리고 마지막에 헌터 하나가 했던 말 기억나요?”
“어떤?”
“제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했던 거.”
“아아, 그랬지.”
“딱 그 정도인 것 같아요. 그냥 무해하다는 느낌만 주는 거?”
예전에 엘파니스가 이 스킬을 가지고 있을 때 유은담과 반서후는 좀 신기할 정도로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나는 왜 이 두 사람이 엘파니스를 경계하지 않는지 너무 이상하게 느꼈지.
“헌터들한테는 통하는데 왜 보스 몬스터에게는 통하지 않는 걸까요.”
솔직히 보스 몬스터를 처음 설득할 때 이 스킬 덕을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었는데.
“같은 왕끼리는 안 통한다고 봐야겠는데.”
엘파니스를 만났을 때 나는 이미 왕이었다. 그리고 유은담과 반서후는 그냥 헌터였고.
그래서 같은 왕인 나는 상대적으로 성자의 위엄 스킬이 약하게 먹혀들었던 것 같았다.
“으으으. 아 진짜 너무 애매한 능력이에요. 아주 쓸모없냐면 그렇지도 않고.”
“전투용으로는 거의 쓸모없잖아.”
“그렇죠. 하지만 이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아이템이 없으니 대체 불가한 능력이잖아요.”
그래. 이게 가장 크다.
다른 스킬들보다 효용성이 나쁜 게 확실한데 시원스럽게 바꿔버리지 못하는 이유.
바로 대체 불가라는 점 때문이다.
스킬을 한번 지우면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스킬을 다른 스킬로 대체하려면 정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너무 머리 아파하지 말고. 만약 성자의 위엄을 다른 스킬로 바꾸면 어떤 걸로 할래? 근거리 그림자 도약?”
“아뇨. 좋은 스킬이긴 하는데 결국 구조물이 있어야 한다는 단점 때문에 쓰기 힘들 것 같아요. 그리고 결국 반사 신경 같은 신체 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그냥 공간이동이면 몰라도 그림자로 이동한다는 점이 걸린다. 뭐든 제약이 있으면 안 좋아.
“멀리 떨어진 그림자로 이동해서 원거리 공격하는 식으로 쓰면 어때?”
“글쎄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온 상황이면 어딜 가든 몬스터들이 있을 테니 거리 벌릴 위치 자체가 모호할 수 있어요. 그리고 보스전이면 보스 몬스터가 제가 했던 것처럼 광역 스킬로 그림자 다 없앨 수도 있고요.”
"으음."
“거리 제한도 있잖아요. 너무 멀리 있는 그림자는 못 쓴다는 거? 그거 때문에라도 별로예요.”
결국 남는 건 자가 재생 능력이다.
다치더라도 빠르게 신체를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
그렇지만 이것도 엄청 좋은 스킬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자가 재생 능력은 그냥 힐링 포션 마시면 될 것 같은데요.”
“힐링 포션을 무한정 마실 수는 없잖아. 포션 중독도 있고. 특히 너는 포션 중독 걸리기 쉬운 상태니까.”
그렇긴 하지.
하루에 S급 능력치 증가 포션을 두 개씩 먹고 있으니 한 발 삐끗하면 바로 포션 중독이다.
“그래도 아이템으로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라 별로 안 끌리네요.”
“으음."
“어차피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계속 고민해보자고요. 다른 보스 몬스터가 더 좋은 스킬을 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아직 지르기스 뿔 먹는 것도 남았는데 미리 결정할 필요 없겠지.
“그래, 지금 여기서 이걸 토론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맞아요. 어쨌든 성자의 위엄 스킬이 어느 정도 효과인지 확인했으니 됐어요. 다음 분쟁 알림 해결하러 가요."
나는 눈앞에 깜빡이는 알림 중 하나를 선택했다.
남은 알림은 19개.
끊임없이 이동하며 몬스터를 잡고 있는지 알림은 같은 개수를 유지 중이었다.
메시지가 방향 표시로 전환되는 걸 확인한 뒤 서지한을 돌아보자 그가 씩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자."
아, 맞다. 이렇게 이동했었지…….
나는 비틀비틀 어색하게 서지한의 팔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서지한이 나를 안아 들었다.
그래, 효율이 좋긴 해. 체력적으로도 속도적으로도.
계산기를 두드려본 뒤 나는 약간의 부끄러움 정도는 감내할 만하다고 판단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