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나는 얼굴을 꼼꼼하게 감춘 후 페르기스에게서 받은 게이트 생성 권한을 이용해 던전에서 살짝 나왔다.
과연, 아까 벼룩으로 들어갔을 때와 달리 보안요원과 감지장치들이 즉각 반응했다.
삐-삐-삐 하고 요란하게 울리는 경보음과 공간 전체를 번쩍번쩍 붉게 채우는 점멸등.
예전 같았으면 이런 소란에 놀라 움츠러들었겠지만 지금은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누구냐!”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하는 것이 인지상정…… 이겠지만.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아, 뭘 묻고 그래요. 당연히 당신들이 지금 철통 경비를 서는 원흉이겠죠.
“소속을 밝혀라!”
기겁하고 뛰어온 헌터 하나가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이어서 그의 등 뒤로 보안요원들이 우후죽순 몰려왔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지?”
던전에서 튀어나왔죠.
어?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서지한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 한 건가?
사자의 낫을 인벤토리에 넣어놔서 그런가? 아니면 얼굴을 완전히 다 가려서?
워낙 갑작스러워 미처 생각이 미치지 않은 걸지도.
뭐,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서지한이었다고 결론 내리겠지만.
“얼굴을 보여줘!”
“마스크 내려!”
나는 우르르 몰려든 보안요원들을 무시하고 말없이 성역 결계를 펼쳤다.
범위는 아주 좁게 잡았다. 던전 게이트를 간신히 감싸는 정도?
자, 이걸로 이 던전은 봉쇄되었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던전에 들어올 수 없다.
“빌어먹을, 무슨 짓거리냐!”
보안요원 중 한 명이 거칠게 외쳤다. 이어서 그의 몸이 푸르스름한 기운에 뒤덮였다.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서 있던 서지한이 반사적으로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 헌터가 나에게 덤벼드는 순간 성역 결계가 희미하게 빛을 내뿜었다.
헌터는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방향만 180도 반전되어 휙 날아가 버렸다.
“뭐, 뭐야, 이거?”
간신히 착지한 헌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이상하지.
분명 앞을 보고 뛰었는데 결계에 닿는 순간 무슨 회전문에 들어간 것처럼 빙글 돌아서 퇴장당했잖아.
“이상한 특수 스킬을 사용한다! 주의해라!”
정신을 차린 그가 외치자 다른 헌터들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용감한 사람은 있어서 내 눈을 피해 헌터 두세 명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 소용없었다.
그나저나 참 마음에 드는 방식이란 말이야.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다. 게다가 물리적인 결계가 아니어서…….
“원거리 공격 준비해!”
원거리 공격에 깨지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냥 스킬을 통과시켜 버릴 뿐.
“마력계 헌터들 불러와!”
“빌어먹을, 이 새끼들 뭐야?”
아무튼 결계는 멀쩡하게 동작하는 것 같다. 볼일은 끝났으니 이제 던전으로 돌아가야겠다.
“경보음 소리 엄청 크네요. 깜짝 놀랐어요.”
던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짧게 푸념했다.
소방 사이렌 소리는 장난으로 느껴질 만큼 요란한 경보음이었다. 아직도 귀가 먹먹했다.
“좀 그렇지? 나는 머리까지 아플 정도야.”
“아, 서지한 씨는 감각 예민하니까…… 그렇겠네요.”
“응.”
얼른 다녀오길 잘했다. 괜히 더 머물렀으면 서지한의 부담만 늘어날뻔했잖아.
“일단 퀘스트 하러 가죠. 방금 알림 메시지 다 세어봤는데 20팀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요.”
나는 시야 한쪽에 있는 분쟁 알림을 훑어본 뒤 그중 가장 가까운 거리가 표시되고 있는 메시지를 선택했다.
그러자 메시지가 빨간 세모 모양으로 변하더니 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쪽, 방향 확인했어요.”
“거리는?”
“420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게 미터인지 뭔지 모르겠네요.”
“가보면 알겠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서지한은 갑자기 나를 돌아보며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짧게 재촉했다.
“자, 여기.”
“네?”
여기라니? 무슨 뜻이야?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여 납득하더니 이번에는 등을 보였다.
“아, 이거 말고 이쪽이 더 편할까?”
서지한은 그대로 쪼그려 앉아서 양팔을 뒤로하고 나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업히라고요?”
“응. 내가 뛰는 게 빠르기도 하고, 너 체력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
“왜? 싫어?”
싫으냐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잖아.
“이상하잖아요. 두 다리 멀쩡한 성인이 누구한테 업혀가는 건 역시 좀……."
“에이, 이게 훨씬 빠르잖아.”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냉큼 서지한의 등에 탑승하기는 좀 그렇다.
내가 민망해서 괜히 몸을 빼자 등을 내민 채로 기다리던 서지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어, 앗, 잠시만요!”
그냥 업힐걸.
성큼성큼 다가온 서지한은 내 무릎 뒤로 손을 넣더니 가볍게 나를 안아 들었다. 흔히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였다.
바짝 밀착한 서지한의 가슴팍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나는 어디를 잡아야 할지 허둥지둥하다가 어색하게 그의 어깨쯤을 짚었다.
그러자 서지한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손을 당겨 제 목에 단단히 둘러 주었다.
“그렇게 허술하게 잡으면 떨어질 수 있어. 물론 내가 널 놓칠 리는 없지만.”
싱긋 웃는 그 얼굴을 감히 마주 보지 못 하고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떨어 뜨으렷다.
“불편한 데는 없지?”
몸은 불편한 곳이 없지만 마음이 아주 불편해요.
"응?"
“그, 역시 이건 좀 그런 것 같은데요. 그냥 내려서 제가 걸어가는 게……."
서지한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
어디를 봐야 할지 부끄러워서 쩔쩔매며 시선을 돌리는데, 그가 굳이 눈을 맞추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씩 웃었다.
“왜? 설레?”
지근거리에서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의 파괴력이란.
나는 그 말에 부정도 하지 못할 만큼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마냥 당하기만 하는 건 억울하다. 이런 농담도 한두 번이지, 나도 한 번쯤은 반격할 수 있거든요?
“네. 반할 것 같아요.”
꾹 하고 나를 안아 든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서지한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말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의 턱과 귓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한참 동안 이동했다.
나도 서지한도 뒤늦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거 봐요. 서지한 씨도 부끄러울 거면서 왜 그런 농담을 해서는…….
분쟁 알림 표시를 따라 십 분 가량 달렸을까. 서지한이 천천히 속도를 줄여 멈춰 섰다.
달아올랐던 얼굴은 바람에 모두 식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저기 있군. 이 이상 접근하면 기척 느낄 거야.”
땅에 나를 내려놓은 서지한이 한 방향을 턱짓하며 제안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저쪽, 나무 사이에……."
나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한참 동안 관찰한 후에야 헌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거진 나무와 풀들 사이로 몇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거리는 한 50미터쯤 떨어져 있는 것 같다.
“발견했어?”
“네.”
“투명화 스크롤 쓰고 접근해서 처리할까?”
처리라. 그 단어가 주는 섬뜩함 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약간 고민하다가 마스크를 당겨 쓰고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그것도 괜찮겠지만……. 좋은 생각이 났어요.”
“어떤 생각?”
“제가 가서 나가 달라고 해볼게요.”
“농담이지?”
“해보고 안 되면 서지한 씨 방식대로 해요."
“그냥 게이트 열고 뒷덜미 쳐서 거기 던져버리면 안 돼?”
“확인해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
서지한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투명화 스크롤을 쓰고 천천히 헌터들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나는 그들의 지척까지 다가가 나무 뒤에 바짝 몸을 붙인 채 상황을 살펴보았다.
전투가 막 끝난 참인지 다들 한숨 돌리고 있는 기색이었다 인원은 모두 다섯 명. 평범한 던전 공략 파티다.
“좀 주웠냐? 나는 길드 상납금도 못 채우게 생겼어.”
작은 바위에 걸터앉은 헌터 하나가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아무래도 아이템 획득률이 저조한가 보다.
“아니. 똑같지 뭐. 상납금 안 냈으면 탈출석 정도는 샀을 텐데.”
“그래도 이번에는 포션 별로 안 써서 포션 값은 굳었네.”
“아, 상납금 못 채우면 다음 공략 때 우선순위 떨어지는데……."
“아직 공략 기간 좀 남았잖아. 벌고 나가면 되지. 그래도 요즘 탈출석 엄청 비싼데 우리는 상납금만 내면 길드에서 대주니까 좋은 거지.”
저마다 신세한탄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친근하다. 적어도 예전 내가 소속되어 있던 공략 팀보다는 훨씬 제대로 된 팀으로 보였다.
“진짜 괜찮겠어?”
서지한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앞으로 할 행동을 가만히 시뮬레이션해보았다.
“네. 사실 확신은 없지만, 수틀리면서 지한 씨가 나서 주세요.”
“그래.”
“갈게요.”
나는 심호흡을 하고 투명화를 해제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헌터들 사이로 다급하게 뛰어나갔다.
"다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