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오! 오셨군요.”
엘파니스가 푸근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그는 도토리 같은 나무 열매의 껍질을 까서 속 알맹이만 골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왕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평안합니다.”
공손하게 말을 받은 엘파니스는 다 까놓은 열매를 쑥쑥 모으더니 옆에 놓인 나무 쟁반에 넓게 펼쳐 놓았다. 그리고 로드란에게 슬쩍 눈짓했다.
로드란은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쟁반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전에 왔을 때보다 쟁반이 엄청 많이 늘어났네요.”
쟁반을 들고나가 볕 좋은 곳에 늘어놓는 로드란을 곁눈질하며 말하자 엘파니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늙은이가 할 일이 없으니 소일거리만 찾게 되더군요.”
“소일거리 치고는 스케일이 엄청 큰데요.”
들어오면서 보니 이 성의 볕 좋은 곳에는 모두 엘파니스의 저 나무 쟁반이 펼쳐져 있었다.
쟁반 위에는 도토리 같은 열매나, 나뭇잎 따위가 바삭바삭하게 말려지고 있었다.
몇몇은 엘파니스가 먹을 식량이나 찻잎 용도로 쓸 식물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잘 손질된 아이템이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협조하겠다며 엘파니스는 채집과 가공에 몰두했다.
비록 내가 채집하는 것보다 양도 적고 등급도 떨어졌지만 나름대로 적절한 용도가 있었다.
이것들은 마켓에 팔거나 반서후와 유은담 쪽 제작계 헌터들에게 공급해서 일반 아이템을 만드는 데 소모될 예정이었다.
너무 고등급 아이템만 공급하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각자 뭔가 말릴 것들을 담은 채 잔뜩 널린 쟁반들을 보니 마치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 온 기분이었다.
푸근하게 웃고 있는 엘파니스의 분위기 탓에 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분은……?”
내 옆에 선 엄마를 짧게 눈짓하며 엘파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은담과 반서후, 그리고 서지한 외의 인간을 여기에 데려온 건 처음이다 보니 매우 의아한 표정이었다.
“우리 엄마예요.”
내가 소개하자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엄마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엘파니스는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깊게 절했다.
“어머, 세상에, 왜 이러세요!”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갑자기 바닥에 머리를 박자 엄마는 경악해서 엘파니스에게 달려갔다.
나도 너무 놀라서 엄마와 함께 허겁지겁 엘파니스를 일으켜 의자에 앉게 했다.
엘파니스의 깍듯한 태도에 이제 그럭저럭 익숙해졌지만 불시에 튀어나오는 이런 순간은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
“이렇게 깍듯하게 하실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불편하다니까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는 의자에 앉은 채 멋쩍게 허허 웃기만 했다.
어딘가 약간 흐뭇한 기색도 엿보였는데, 엘파니스가 이런 식으로 나를 후레자식으로 만들며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가끔 의심이 든다.
“휴, 아무튼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설명드릴게요.”
분위기를 보니 두 사람 간에 의사소통 문제는 없어 보인다.
엘파니스는 나의 신하가 된 후 서지한과도 소통 아이템 없이도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나의 신하라는 공통점 때문인가 했으나 이걸 보니 아닌 것 같다.
흠, 아마 엘파니스가 내 가신이 되어서 나와 같은 종족인 사람들과는 대화가 통하게 된 걸까?
그럼 이제 유은담이나 반서후와도 그 때 그 차를 마시지 않아도 바로 대화가 되겠군.
시스템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으니 이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이쪽은 엘파니스 씨야. 나한테 이 던전을 주고 이것저것 알려주신 분이셔.”
“던전을 줬다고?”
“아, 그 원래 여기 던전 보스 몬스터셨는데……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해줄게.”
“보스 몬스터라고?”
나를 돌아본 엄마는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지만 일단 엘파니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딸이 신세를 졌습니다.”
“허허, 별말씀을요.”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기다린 후 나는 엘파니스에게 설명했다.
“나중에 일이 터지면 엄마가 이 던전으로 피신하게 될 수 있거든요. 그때 얼굴을 몰라서 서로 공격하거나 하면 큰일이니까 미리 소개할 겸 찾아왔어요.”
“그렇군요. 잘하셨습니다.”
어 차피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나보다 엘파니스가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별다른 부연설명이 없어도 엘파니스는 단숨에 내 의도를 알아채고 납득했다.
“그럼 소개해드렸으니 이만 갈게요.”
“벌써 가십니까?”
“일단 엄마 보내드리고 나중에 또 올게요. 몸조심해서 건강히 지내고 계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엘파니스가 멈칫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저는 건강히 있을 테니 왕께서도 건강하십시오’라고 약간 울먹이며 대답했다.
어쨌든 꼭 또 오시라며 당부하는 엘파니스를 뒤로하고 나는 엄마에게 다시 게이트를 열어보라고 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지만 한번 해보느냐 안 해보느냐가 중요한 거니까.
“좋은 분 같네.”
“그렇지? 가끔 꼭 손녀 보듯 볼 때가 있으셔. 아무튼 걱정할 필요 없는 아군이니까 믿어도 되는 사람이야.”
만약 엘파니스가 배신할 마음을 먹으면 그를 나에게 종속시키고 있는 유대감을 통해 즉시 감지할 수 있다.
전투능력이라곤 전혀 없는 엘파니스가 나를 배신할 이유도 없지만.
“그리고 던전에서 나올 때는 들어갔던 곳으로 나오게 되니까 참고해둬.”
간단한 주의사항 몇 가지와 마지막으로 내가 반쪽을 먹은 소통 유과 한 접시를 엄마의 몸에 새기는 것으로 할 일을 마무리했다.
“이 정도면 대충 된 것 같네. 그나저나 엄마 시간 괜찮아? 너무 오래 여기 와 있어서 감시하는 사람들이 수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일단 따라오는 사람은 없어 보였는데.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화장실 좀 오래 쓰나 보다 하겠지.”
“화장실에서 온 거야? 그러면 더 오래 끌면 안 되겠다.”
고개를 끄덕인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문을 슬쩍 눈짓했다.
“그냥 가긴 좀 그렇고, 그 청년한테 너 잘 부탁한다고 인사나 좀 하고 가야겠다.”
“안 그래도 되는데.”
“그래도 사람이 경우가 있지. 네가 신세 지고 있는 사람이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엄마의 본심은 서지한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거겠지.
나도 딱히 마다할 이유는 없어서 방을 나와 엄마와 함께 계단으로 향했다.
“여기 풍경은 참 좋은데 주변에 식당이 하나도 없네. 밥은 어떻게 하고 있어? 너 요리도 잘 못하잖아. 엄마가 반찬 좀 싸서 오든가 해야지.”
2층 창문으로 주변 풍경을 잠깐 둘러본 엄마가 혀를 찼다.
“밥은 괜찮아. 먹을 거 많아.”
“그러고 또 라면 같은 거만 먹는 거 아니야?”
나는 차마 며칠째 보스 몬스터의 뿔을 먹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대충 웃으며 얼버무리자 엄마가 혀를 끌끌 차며 염려 어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오랜만에 들으니 좋네. 꼭 각성하기 전 예전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고.
“밥을 제대로 먹어야지. 이런 객지에서 아프면 서러워서 어떡해.”
“괜찮다니까. 진짜 잘 먹어. 서울에서 자취할 때는 이런 잔소리 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때는 주변에 먹을 곳도 많고 내가 반찬도 보내줬으니 그랬지. 여기는 주변에 밥집 하나 없네.”
“정 먹고 싶으면 순간이동 아이템으로 맛집까지 가서 바로 사 올 수 있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계단을 내려오자 이쪽으로 후다닥 걸어오는 서지한이 보였다.
그는 자주 입는 검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늘 침착한 그에게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모아야, 어머니는 잘 챙겨드렸어?”
서지한이 그렇게 말한 순간 엄마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인데.
“어머니……?”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린 엄마는 곧 능숙하게 사회생활 모드로 돌입하더니 가면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우리 모아를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들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아, 예! 벼, 별말씀을요!”
엄마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는 서지한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짧은 악수가 끝난 뒤 서지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벌써 가시나요? 간단하게 상을 좀 차렸는데……."
서지한의 말대로 1층에는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그가 워낙 섭섭해하는 탓에 부엌으로 몇 걸음 옮긴 나는 식탁 위의 상차림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정말 서지한의 요리 올스타쇼가 따로 없었다.
절대 간단하게 차린 수준이 아니었다 어디 한정식 집에서 바로 받아왔나 싶을 정도로 푸짐한 음식들이 식탁위에 빼곡했다.
“이걸 지금 만든 거예요?”
아니, 엄마랑 2층으로 가서 잠깐 이야기하고 엘파니스 만나서 인사하고 방으로 돌아와서 다시 이야기 좀 나눈 그 짧은 사이에 이걸 다 만들었다고?
게다가 있던 반찬을 꺼내온 것도 아니었다. 냉장고에 있던 음식은 어제 내가 엘파니스에게 모두 털어줬으니까.
무슨, 초능력 있는 거 아니야? 이미 특수 능력을 잔뜩 가진 각성자이긴 하지만.
“별거 아니야.”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서지한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뿌듯함이 드러나 있었다.
엄마조차도 할 말을 잃고 식탁과 서지한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한 마디 했다.
“그래, 너 진짜 잘 먹고 있네……."
아까 많이 먹고 있다고 했던 건 보스 몬스터의 뿔 얘기였지만, 서지한이 내 밥을 챙기는 것도 사실이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밥상을 두고 그냥 갈 수 없었던지 엄마는 못 이기는 척 식탁에 앉았다.
식사시간은 무난하게 홀러 갔다.
간간이 엄마가 ‘이걸 진짜 청년이 만들었다고?’라고 묻긴 했지만.
뭐, 엄마도 놀랄 만큼 음식이 맛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밥 먹는 내내 나는 ‘거 봐, 소문과는 다른 사람이라니까’라는 말과 비슷한 소리를 한 20번 정도는 한 것 같다.
마침내 밥 한 공기를 깨끗하게 비운 엄마는 잘 먹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떠나는 그 얼굴에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은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처음과 달리 굉장히 안심한 표정이었다.
엄마가 안심했으면 된 거지.
“아, 너무 배부르다. 배 터질 것 같아요. 오늘 지르기스 뿔 먹는 건 포기해야겠어요.”
식탁 의자에 앉아 배를 두드리는 나를 서지한이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모아 너 엄마 많이 닮았구나.”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얼굴 아빠 닮았다는 이야기 많이 듣는데. 딸은 아빠 닮는다잖아요.”
“아니, 얼굴 말고 성격이.”
그런가? 잘 모르겠다. 서지한은 그렇게 느꼈나 보지.
아, 배가 부르니까 모든 게 귀찮다.
“아, 그런데 서지한 씨.”
“응?"
“역시 성인 남녀가 한 집에 사는 건 엄마가 보기에 좀 안 좋아 보이나 봐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앞에 앉아 있던 서지한의 얼굴이 싹 굳었다.
하얗게 질린 서지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께서 나 나가라고 하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