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231)

127화

- 던전은 군사력에 직결되어 있는 전략자원이잖아. 치밀하게 숨기고 있는 나라들이 꽤 많을 거야.

“즉, 실제로는 60개가 아니라 100개나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거네요.”

- 최악의 경우 200개나 300개에 육박할지도 모르지. 간혹 던전이 생성될 때가 됐는데도 어디에도 던전이 터졌다는 이야기가 안 나올 때도 있었어. 숨긴 거지.

“으음, 그 외에 심해나 사람이 안 사는 오지에 던전이 생겨서 미처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은요?”

- 그럴 수도 있지.

가만히 대화하다가 갑자기 든 어떤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서지한이 처음 나와 만났을 때, 던전이 한 달에 한번 주기로 터진다고 말했었잖아. 그런데 사실 훨씬 짧은 주기로 생성되고 있었다면?

한 달이 아니라 한 주에 하나씩 생기고 있는데 우리가 4개 중 1개만 발견하고 ‘오, 한 달에 1개씩 생기는구나’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그래서 알려진 것의 수배에 달하는 던전이 바닷속에 있다거나…….

- 왜 그래?

톡톡 튀어가던 내가 갑자기 꼼짝도 않고 멈춰 있자 서지한이 의아해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아니에요.”

괜찮을 거야.

설령 진짜 심해 어딘가에 생성된 던전을 눈치 채지 못 하고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몬스터가 나오는 건 그렇게 위험하지 않겠지.

몬스터들이 심해에서 도시까지 헤엄쳐오다가 다 죽을지도 모르고.

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걸 상상해서 괜히 걱정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지금은 일단 눈앞에 놓인 상황에 집중하자.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느냐니까……."

-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늦겠다.속도 좀 낼게요.”

복도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마침내 게오기스 던전 전송 포탈이 있는 방 앞에 도착하자 어제 지르기스 던전에 들어갈 때는 없었던 보안요원들이 방 앞을 경계하고 있었다.

여기서 톡톡 튀었다가는 이목을 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문 옆으로 기어갔다.

- 안에도 지키는 사람 있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은 안으로 들어가 봐야 이동 포탈을 쓰는 게 불가능했다.

내가 기다리는 건 보안요원들의 교대시간이었다.

서지한이 반서진을 구해올 때 집어왔던 문서는 대부분 시민의 민원이나 업무 개선 요구사항 같은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중 ‘보안인력 예산안’은 꽤 눈여겨 볼 만 했는데, 던전 관리청의 보안을 담당하는 인력의 총원과 그들의 근무시간 그리고 급여 등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과연 각성자- 라는 말이 나올 만큼 보안인력들에게 어마어마한 보수가 지급되고 있는 것은 꽤 흥미로웠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헌터들의 근무시간에 주목했다. 거기에서 도출할 수 있는 교대시간이 가장 중요한 정보다.

던전 하나가 털렸으니 던전 관리청의 보안이 삼엄해질 것은 당연했다.

예상하건대 무인 경비를 하던 많은 구역들에 보안 요원이 추가되겠지.

그런 내 추측을 증명하듯 원래는 무인 체제이던 전송 포탈에도 감시인원이 생겨났다.

즉, 이전처럼 내가 쓰고 싶을 때 전송 포탈을 써서 이동하는 건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헌터들의 교대시간에 몰래 비집고 들어가면 아무도 우리를 알아챌 수 없을 거다.

- 다시 생각해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어. 그런 쓸모없어 보이는 문서에서 이런 정보를…….

가만히 기다리는 사이 서지한이 새삼 감탄사를 흘렸다.

그는 문서와는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서 그런지 그것들을 보고도 ‘이 새끼들, 쓸데없이 돈 많이 받네’ 하고 태워버리려 했었다.

“제가 직장생활을 하며 그래도 배운 게 있긴 해서 다행이에요.”

- 잘했어.

서지한이 손을 뻗어 내 벼룩 머리를 쑥쑥 쓰다듬는 손을 했다.

대단해. 아무리 실제로 닿지 않는다고 해도 벼룩 모습인 나에게 이렇게 거리낌 없이 접촉하다니.

그러던 중 나는 문득 꽉 닫힌 문의 경첩 부근에서 약간의 틈을 발견했다.

철문이라 미세하게 휘어진 라인을 따라 약간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 밑에 틈이 약간 있네요. 몸 밀어 넣으면 들어갈 수 있겠는데요?”

- 진짜? 아, 그러네. 근데 너무 좁은데? 진짜 들어갈 수 있겠어?

나는 대답 대신 몸을 납작하게 찌그러뜨렸다. 마치 종잇장처럼 납작해진 내 모습에 서지한이 흠칫 놀랐다.

“저도 몰랐는데 이 벼룩, 몸이 아주 유연하더라고요. 이 상태로 틈에 비비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 그러다 끼면 큰일이니까 하지 말자.

맞는 말이다. 다시 몸을 원래대로 부풀렸더니 그 일련의 모습을 바라본 서지한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돌아가면 문틈에 문풍지라도 붙여서 보수공사를 해야겠어. 벌레가 자꾸 나오는 게 나무집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틈만 있으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니까요. 이번에 저도 깜짝 놀랐잖아요.”

- 그래…….

문틈 아래에서 소곤소곤 이뤄지던 우리의 대화는 문득 보안요원 하나가 입을 여는 것으로 중단되었다.

워낙 작은 소리라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들었나?

“아, 교대 시간 5분 지났는데도 안 오는데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던 남자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아, 우리 목소리 들은 거 아니구나. 다행이다.

“이놈들 맨날 교대 때마다 이러네. 밖에서 담배 피우고 있는 거 아냐?”

대꾸한 것은 함께 경비를 서던 남자였다.

먼저 투덜거린 남자는 20대 후반, 이 남자는 40대 후반 정도로 꽤 늙어 보였다.

“그러게요. 그나저나 오늘 밥은 뭐 먹을까요?”

“국밥이지 뭐. 후딱 먹고 집에 가서 자고 싶다.”

“수육 추가 어때요?”

“콜.”

새벽 근무를 마치고 먹는 뜨끈한 국밥과 수육. 생각만 해도 몸이 녹는 것 같다.

나도 예전에는 야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허겁지겁 24시 국밥집을 찾곤 했었지.

수육에는 술도 마셔야 한다는 둥 한참 떠들던 두 남자는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형님, 그거 들었어요?”

“뭐?”

“아침에 한 명 끽, 됐다는 거."

남자는 손날을 세워 자신의 목 앞에 그어 보였다.

“무슨 소리야?”

“여기 그 덩치 크고 성격 더러운 놈 하나 있었잖아요.”

“그런 놈이 한둘이어야지. 이름이 뭔데?”

“이름은 모르죠. 안면 트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어서.”

거기까지 듣고도 나이 많은 남자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젊은 쪽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형님 진짜 아예 들은 거 없나 보네. 몰라요? 입구 경비하다가 안쪽으로 들어온 사람 하나 있었잖아요. 낮 근무하다가 새벽 내부 경비로 전환된 놈.”

“아아, 알겠다. 여기 창문가에서 계속 담배 피우던 걔?”

“네. 그놈이요.”

“그놈이 죽었다고?”

그제야 나이 많은 남자가 깜짝 놀랐다.

나는 그쯤에서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어제 내가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던 헌터. 우리 엄마를 밀쳤던 그 헌터다.

“진짜 죽었어? 우리도 위험한 거 아니야? 무슨 일이 있어서 죽었대?”

그가 노골적으로 몸을 사리며 닦달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아무리 경비라고 해도 갑자기 죽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면 얼른 몸을 빼야 하니까.

이해한다. 월급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는 없지.

“아니, 진짜 죽었다는 게 아니라.위로 불려 갔다고 하던데요.”

“왜? 담배 때문에?”

“그런 거면 차라리 다행이죠. 그게 아니라, 윗분들 욕한 채팅방 내역을 그분들한테 보냈대요. 그것도 여러 명한테요.”

“뭐? 다른 놈들이 욕한 걸 일러바쳤다고?”

“아뇨. 자기가 욕한 걸 보냈대요.”

깜짝 놀란 남자의 얼굴이 금방 미묘하게 바뀌었다.

채팅방 내역을 보냈다길래 상사를 욕한 다른 사람들을 팔아넘겨서 윗선에 눈도장을 찍으려고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왜? 미쳤나?”

“모르죠. 말로는 싹싹 빌면서 자기는 모른다고 했다는데. 일단 욕한 건 사실이니 빼도 박도 못하지만, 그 내역을 본인이 안 보낸 건 확실한 듯해요. 근데 그놈이 보낸 걸로 되어 있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에 빠진 나이 많은 남자가 가설 하나를 제시했다.

“신입 중에 하나가 보낸 거 아냐?그놈 신입들 겁나 갈궜잖아.”

신입이라. 역시, 사람을 험하게 대하는 인간은 한 사람에게만 그러지 않지.

우리 엄마뿐만이 아니라 신입이 든 뭐든 살면서 마주치는 만만한 사람에게 다 그랬던 모양이다.

“신입이 어떻게요?”

“요즘 애들은 기술 좋잖아. 거 해킹 같은 거 해서 보낸 거 아냐?”

젊은 남자가 멍청이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제 동료를 응시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형님, 요즘 애들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크시네.”

“너 나 무시하냐?”

“제가 감히 어떻게요.”

몇 마디 더 하려고 우물거리던 형님은 기분이 상한 것보다 궁금함이 더 컸는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놈은 어떻게 됐어? 진짜 죽었어?”

“글쎄요. 대한 길드 헌터들이 와서 검은 차에 실어 갔다는데. 살려달라고 눈물 콧물 난리였대요.”

“무섭네. 이미 콘크리트에 담겨서 바다에 떨궈진 거 아니냐.”

“그러게요. 아무튼 그래서 채팅방들 급하게 다 터졌잖아요.”

“아아, 그래서 아침에 채팅방 다 없어졌구나. 갑자기 내쫓기에 뭔가 했네.”

가만히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서지한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 죽었네, 그놈.

“네?”

- 적어도 제대로 살아 있는 꼴은 아닐 걸.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이렇게 처리하다니. 역시 우리 모아는 똑똑해.

칭찬을 받았지만 나는 가슴 한쪽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만약 내가 인간인 상태였다면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거다.

“저는, 그냥 아침에 불려 가서 좀 혼나고……."

- 혼나고?

“회사 생활이 좀 불편해져서 다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는 정도를 생각했는데……."

- 흐음.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보통 상사에게 욕 문자를 실수로 보낸다고 해도 죽거나 그러지는 않잖아. 그런 건 예상 못했다고.

-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그런 놈은 얼마 못 가서 누구한테든 잘못 걸려서 인생 망하게 되어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 진짜 죽었을까요?”

- 안 죽었을 수도 있지. 어쨌든 스스로 한 일에 책임을 지고 있을 거야.

마음이 불편해져 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침울해진 나를 위로하려는지 서지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자책하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곧 죽을 놈이었어.

“그래도……."

- 내가 죽였을 거라서.

“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놀라울 정도로 상큼하게 웃고 있는 서지한이 보였다.

- 모아야.

“네, 네?”

갑자기 몹시 진지하게 부르는 목소리.

- 널 슬프게 했는데 왜 그놈이 살아있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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