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인형이 벌떡 일어나서 양팔을 펼치며 막아서는 자세를 취하자 유은담이 가볍게 한 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캐묻지 않을게요. 그런데, 저도 데려가 주면 안 돼요? 저도 보스 공략 좋아하는데.”
“그, 그게……."
어떻게든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유은담은 다시 살랑살랑한 태도로 나에게 말을 붙였다.
“누나, 모아 누나. 저도 던전 데려가 주세요. 네?”
“하, 하하……."
나는 식은땀을 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만해.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스타카토 방식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횡설수설 진실을 토하는 수밖에 없다고.
“저한테 아직 거리감 느껴서 그러세요? 맞아, 누나, 계속 말하는 건데 말 편하게 하세요. 앞으로 계속 알고 지낼 텐데. 그리고 저 누나랑 알고 지낸 지 좀 됐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멀리 하려고 하시니까 좀섭섭해요.”
- 여우 새끼.
내 옆에 있던 서지한이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와 달리 나는 마음이 약간 약해졌다.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자꾸만 유은담을 승주와 겹쳐 보게 되는 것이다.
동생이 있는 사람의 숙명 같은 걸지도 모른다.
“그, 그럴까?”
아직은 좀 어색하지만 유은담이 원하는 대로 평대를 해봤다.
유은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음,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구나.
확실히 유은담은 나이가 어린데다 서툰 모습을 많이 봐서 다른 사람보다 좀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와, 누나가 편하게 대해주니까 진짜 친누나 같아서 너무 좋아요. 저는 진짜 가족이 없으니까 늘 가까운 사람이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랬구나……."
갑자기 유은담이 몹시 안쓰러워졌다.
승주랑 같이 PC방에서 게임하고 있을 나이인데 어릴 때부터 던전 도느라 고생하고, 믿고 지내던 길드원에게 뒤통수 맞고…….
“누나, 은담아-라고 한 번만 불러주시면 안 돼요?”
생글생글 웃으며 유은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이 새끼 적당히라는 걸 모르네.확 실체화해서…….
서지한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을 손을 들어 막았다.
에이, 애 서럽게 왜 그러세요.
“은담아. 앞으로 이렇게 부르면 되지?”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뜬 유은담이 곧 녹을 듯이 웃으며 서지한 인형에게 잠깐 시선을 던졌다.
애를 너무 잡으니까 눈치를 보잖아요. 서지한 씨. 동생을 아끼라고요.
“네, 계속 그렇게 불러주세요.”
갑자기 기가 확 살아난 유은담을 흐뭇하게 지켜보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지푸라기가 파스스 떨어질 정도로 몸을 바르르 떠는 서지한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뭐, 왜. 왜 그렇게 되는 건데?왜?
“뭐가요?”
- 나, 나는 아직 서지한 씨인데…….
“아……."
그거였나.
하지만 서지한 씨가 그렇게까지 호칭에 신경 쓸 줄은 몰랐다.
서로를 어떤 호칭으로 부르든, 서로에게 어떤 형태로 말을 건네든 관계의 온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서지한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 나도, 나도 지한이라고 불러줘. 나한테도 말 편하게 해. 응?
예? 그건 좀 아니지.
아무리 본인이 그렇게 말해도…….
역시 좀 부담스럽다.
내가 시선을 피하자 서지한은 점점 시무룩해지기 시작했다.
괜한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나는 부드럽게 그를 달래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은담이랑은 달리 서지한 씨는 저보다 나이도 더 많고……."
지푸라기가 또다시 파스스 흩날렸다.
내 말에 유은담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방글방글 웃으며 지푸라기 인형을 가볍게 톡 쳤다.
“맞아. 형은 나이가 많. 잖. 아.”
오해를 가중시키는 말투는 그만두자. 응? 서지한 씨 지푸라기가 점점 더 많이 떨어지고 있잖아.
하지만 유은담은 오히려 멘트를 미리 준비해오기라도 한 것처럼 막힘없이 종알거렸다.
“형이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잖아.형, 왜 그래? 누나가 형이 늙었다든가, 내일이면 30이라든가, 앞자리가 3이 되어버려서 같이 놀 수 없다든가 그런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누나가 형을 아. 저. 씨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유은담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지푸라기 서지한의 고개가 160도, 140도, 120도로 점점 낮게 굽혀졌다.
표정이 안 보이는데도 뚜렷하게 느껴지는 침울함에 나는 기함했다.
으아악, 그만해. 유은담, 그만하라고!
“은담아? 은담아, 잠깐만?”
내가 유은담을 말리는 사이 내내 조용히 있던 반서후가 슬쩍 반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늘 저래?”
“아니, 자주 그러는 건 아니야.”
저 남매는 완전히 강 건너 불구경이군.
결국 상황은 서지한이 ‘내가 나이가 많긴 하지’ 하고 자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 난 괜찮아.
서지한 씨, 정말인가요?
진짜 괜찮은가요?
지금 죽기 직전인 사람이 속이려고 거짓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계신데요?
혹시 은담이가 말로 찌른 거 때문에 피 홀리고 계시는 거 아니죠?
“서지한 씨, 저는 정말 그런 의도가……."
- 괜찮아. 모아야. 다 사실인데 뭐.
서지한이 정말 괜찮다는 듯 강조하는 탓에 나는 더 이상 그 화제를 꺼내지 못했다.
그런 그를 내버려 둔 채 상쾌한 얼굴의 유은담이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이쪽 성과도 말해드릴게요.누나가 지르기스 잡는 동안 이쪽도 놀고 있었던 건 아녜요. 우리 편에서 줄 헌터들을 꽤 포섭했거든요.”
"네?”
"기억 안 나요? 며칠 전에 저랑 서후 형이랑 아는 헌터들 모아보겠다고 했잖아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건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탓이 아니었다.
“헌터들을 포섭했다고요?”
“네. 왜요?”
“따라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내 말에 유은담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대신 침묵하고 있던 반서후가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지?”
앗, 그게 아니라.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들이 다른 헌터들을 설득해보겠다고 말했지만 내심 거의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면 그간 봐온 모습이 좀, 미더운 사람들은 아니었고, 나라면 별로 따라가고 싶지 안…….
아, 아무튼.
잊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이렇게 그들의 색다른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도 그들을 대단하게 여기고 있었지.
그래! 두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었어!
“네? 아뇨, 역시 이전에 거대 길드를 이끌던 분들이라 리더십이 있구나 하고……."
본심 반 변명 반으로 둘러대자 다행히 반서후는 더 캐묻지 않았다.
아주 집요한 눈으로 나를 압박하듯 쳐다보긴 했지만.
“하하, 그렇게 말하셔도 많은 수는 아니에요. 예전에 소규모 공략할 때 알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연결이 됐거든요.”
다행히 유은담이 쾌활한 말투로 그 숨 막히는 시선에서 나를 구조해 주었다.
“3대 길드 생기기 이전에 같이 공략 뛰기도 했었죠. 이쪽 말을 완전히 믿어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대한 길드 싫어하는 사람들이에요.”
“대한 길드,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군요. 아니, 있구나.”
말 편하게 한다고 했는데 아직 입에 안 붙어서 익숙하지 않다.
서지한이 간절하게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보셔도 지한아, 라고는 불러줄 수 없어요…….
“많을 걸요? 다만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대한 길드 소속 헌터들도 대한 길드 상층부 싫어하는 사람 꽤 있어요. 너무 고압적이라서.”
“이쪽에 가담한 사람들도 대한 길드 태도에 앙심 품은 사람들이야?”
“그런 것도 있고, 헌터들이 대한 그룹 소속 직원처럼 되어버린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죠.”
유은담은 포크로 접시의 생크림을 긁으며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능력이 얼마나 출중하든 그쪽 눈치 봐야 하는 것도 짜증 나고. 갑자기 헌터 판에 들어와서 헌터 업계를 다 잡아먹었잖아요.”
“으음. 비유하자면, 한창 스타트업이 잘 키워놓던 시장을 잡아먹은 대기업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거네.”
“비슷해요. 이전까지 길드 잘 운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던전 공략 허가도 안 나오고, 소속 헌터들은 대형 길드로 이적하고……."
"진짜 비슷하네요.”
하긴, 옛날에는 그런 작은 길드가 엄청 많았는데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3대 길드가 정식 출범한 이후에는 그 길드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 가지는 사람도 없어져서 그냥 역사의 뒤안길로 잊혔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찾았어? 원래 알고 지냈어?”
그래, 모두가 잊어버린 사람들을 어디서 찾아낸 거지?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다면 찾아내는데 상당히 고생했을 텐데.
하지만 유은담의 대답은 담백했다.
“대한 길드 반대 집회에서요.”
확성기로 하루 종일 외치고 있어서 찾기 쉬웠어요, 라며 유은담이 싱긋 웃었다.
그렇구나.
그 이야기를 들으니 유은담이 그들을 이 호숫가로 데려오지 않은 것도, 내 던전에서 지내게 거둬 달라하지 않은 이유도 이해가 갔다.
끈끈한 우정이나 감정적인 연대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대한 길드에서 자기 요구를 들어주면 바로 돌아설 사람들이 다수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대한 길드 쪽 첩자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고.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집단이니 진짜 중요한 거점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기지를 만든 거였다.
“으음. 그러면 우리와 목적이 좀 다를 수도 있겠네.”
“그렇긴 하죠. 그래도 저와 서후 형을 끌어들여서 반 대한 길드 진영에 넣으면 이득이라는 계산인지 협조해주기로 했어요. 겸사겸사 우리말이 진짜라서 시민들 구하게 되면 여론 지지도 얻는 거고.”
확실히 이름이 알려진 반서후와 유은담이 그들을 도와준다면 무슨 일을 하든 큰 힘이 되겠지.
“서로를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거구나.”
“이해관계가 딱 맞는 거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누나가 던전 다 못 닫았을 때를 대비한 보험 같은 거니까.”
보험이라.
착잡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은담이 포크로 접시를 톡톡 두드리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내가 미덥지 않아서’ 같은 표정 짓지 마요. 무리하지 말라고요. 누나가 혼자 다 해낼 필요 없어요. 못 하더라도 우리가 뒷일을 위한 방편을 만들고 있으니까.그날 대화한 것도 그런 내용이었잖아요?”
처음으로 유은담이 마냥 어린 동생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감동에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다.
“우리에게 공급해주는 포션 물량, 그거 재료 채집하느라 밤낮없이 일하는 거 알아요. 보스 던전 공략에 쉴 틈도 없이 채집. 누나가 강한 건 아는데 그러다 쓰러지면 저 지한이형한테 죽어요.”
김영길이 만들어내는 포션의 물량은 어마어마해서 내가 짬짬이 마켓을 통해 포션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 팔아도 많은 양이 남았다.
나는 그 남는 양을 두 사람에게 일부 공급해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 스킬의 존재를 모르니 내가 허리가 부러져라 포션 재료를 모으고 있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내가 채집한 재료로만 만들 수 있다고 벌써 다 말했으니 이제 와 마켓에서 재료를 사서 만들었다고 둘러댈 수도 없고. 오해하게 내버려 두는 수밖에.
“그래, 너 혼자 너무 무리하지 마.”
내내 가만히 있던 반서진도 유은담을 거들었다.
아닌데, 던전 돌고 저녁에 잠깐 시간 내서 채집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