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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124/231)

124화

“음, 일단 성역 결계는 엘파니스가 있는 던전 보호하려면 꼭 있어야 하니까 못 지워요.”

- 성자의 위엄? 이건 그냥 호감 불러일으키는 스킬이지?

“네. 상대가 던전 보스인 거 알고 있어도 따라가서 차를 마실 정도로 강력하게 작용하는 호감 유도 스킬이죠.”

- 지금 가지고 있는 스킬 중에는 그게 제일 쓸모없어 보이는데.

“그래요?’

의외다.

하긴. 이게 있어도 보스 몬스터들을 설득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대충 납득하려는데 서지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런 스킬 없어도 누구나 너에게 호감을 가질걸.

“네?”

깜짝 놀랐는데 빙긋 웃고 있는 서지한을 보고 금방 침착해졌다.

에이, 또 장난이구나. 아까도 그렇고 두 번은 안 넘어간다고요.

- 앞으로 새 스킬 얻으면 성자의 위엄이랑 비교해보고 교체하든가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뿔을 다시 한 입 더 베어 먹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스킬을 저울질했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만약 새 스킬을 위해 기존 스킬을 하나 지운다면 무조건 성자의 위엄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밤이 저물었다.

* * *

다음 날 아침, 예고도 없이 반서후와 유은담이 찾아왔다.

“답장이 왔어.”

정오의 따듯한 햇볕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식탁, 우리는 작은 케이크와 커피를 각자 앞에 두고 둘러앉았다.

케이크는 유은담이 사 왔다. 커피도 유은담이 제공했다.

놀랍게도 그는 인벤토리에서 커피콩을 꺼내더니 핸드밀로 갈아서 즉석에서 드립 커피를 만들어주었다.

저런 건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전에 생선을 잡아온 것도 그렇고, 유은담은 여기 올 때마다 은근히 먹을 걸 많이 가져오는 느낌이다.

“어떤 답장이요?”

내 질문에 반서후는 대답 대신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유은담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지 조용히 커피만 마셨다.

하지만 반서진은 궁금해하는 얼굴로 내 옆에 바짝 붙어 답장을 함께 확인했다.

“어디 보자, 헛소리는 그만하고 얌전히 돌아와서 말 잘 듣는 개가 된다면 다시 받아줄 수 있다? 무슨 소리를 했기에 헛소리래?”

“음.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나오고 큰 위험이 닥칠 테니 민간인 대피에 대한 부분을 공조하자고 제안했는데.”

“씨알도 안 먹히는데? 뭘 고지식하게 그대로 말했냐. 좀 뻥도 치고 그러지.”

반서진의 힐난에 반서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에요.”

커피 잔을 내려놓은 유은담이 냉소했다.

그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반서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 답장 하나 더 있네? 근데 이게 무슨 뜻이야?”

“왜요?”

“네 동생을 누가 데리고 있는지 기억하고 결정하라는데?”

“반서후 씨한테 동생이 더 있어요?”

“아니, 나뿐인데.”

반서진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이 비슷한 느낌을 어디서 받았었는데…… 아!

“정말 보이스 피싱이네. 어디로 입금하라는 말은 없어요?”

내 말에 반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변조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네 동생을 데리고 있다. 1억을 보내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겠다. 뭐 이런 거? 아, 웃기네.”

눈물까지 찔끔할 정도로 웃던 반서진은 간신히 웃음기를 수습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나 구조된 거 모르나 본데? 재밌으니까 계속 이렇게 둬야겠다.”

“그게 좋겠네요.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저쪽이 이쪽 약점을 잡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면 극단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을 테니까.”

합의를 마치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나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국내는 아예 우리말을 안 들어준다 이거지?

그럼 피해 줄이려면 국내 던전은 다 닫는 수밖에 없네.

어디 보자, 앞으로 닫아야 할 던전이 4개 남은 건가?

이걸 다 닫으면 던전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한국만은 안전할 테니 가족들을 급히 피난시킬 이유도 없다.

그러면 엄마가 주변인들을 대피시킬 이유도 없어지겠지.

엄마와는 종종 소통 유과를 통해 연락하고 있었다.

전해 듣기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특히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쓸 수 있는 방법도 제한적이어서 더욱 그랬다.

엄마는 내 생각 이상으로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냐면 승주는 아직도 내가 죽은 줄 안다.

‘승주는 어려서 입이 가벼워. 저 나이 때는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되면 아무나에게 다 말해버리잖니.’

엄마의 말에 매우 동의한다.

승주는 착해. 하지만 그래서 더 안돼.

결국 엄마는 진짜 일이 닥치면 친지들을 붙잡고 스크롤을 잔뜩 찢어 여기로 오는 방법을 쓰고 싶다고 했다.

물론 만약 진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스크롤보다는 내 소유의 던전 출입 게이트를 여는 것이 더 실용적이겠지.

그때는 미국 역시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역시 엄마에게 던전 출입 권한을 부여해야겠어.

조만간 감시를 피해서 와달라고 해야겠다. 화장실 같은 데서 잠깐 스크롤 찢고 왔다가 돌아가면 괜찮지 않을까?

그나저나 감시는 언제까지 하는 거야? 설마 평생 하지는 않겠지?

이것도 조만간 확인해봐야겠는데.

할 일이 많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유은담이 포크를 살짝 들어 내 케이크 접시 옆을 가리켰다.

“그런데 누나,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그 옆에 있는 지푸라기 인형은 뭐예요?”

서지한은 지금 인형에 들어간 상태로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유령 상태로 이런 자리에 참석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의 참석 여부를 알 수가 없어서 불편했다.

게다가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니 엉뚱한 방향을 보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실체화는 곧 공략을 하러 갈 거라 아껴야 했고 결국 차선책으로 선택한 게 그의 서브 몸뚱이인 지푸라기 인형이었다.

이 상태로 대화에 참석하면 적어도 허공을 보고 그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 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 없지만 서지한의 말은 내가 전해주면 되니까.

그나저나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 말하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이 자리가 시작될 때 의자를 타고 테이블로 기어오르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기에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서지한 씨예요.”

내가 소개하자 서지한이 가볍게 한 손을 바스락 들어 보였다.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바로 옆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이게 서지한이라고?”

반서진이었다.

어라, 며칠 같이 있었는데 전혀 몰랐나?

아, 생각해보니 반서진이 있는 동안에는 실체화한 적이 없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내가 말을 안 했으니 몰랐을 수 있겠네.

“몰랐어요?”

“몰랐지! 밤마다 뭐가 돌아다니면서 방이나 부엌을 물걸레질하는 걸 보긴 했어. 근데 네가 가지고 있는 던전 아이템 같은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러셨구나.”

“그러셨구나-가 아니잖아. 무슨 귀신 들린 집인가 하고 처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반서진이 손을 뻗어서 내 팔 한쪽을 꽉 잡았다.

약간 아파서 움찔하자 가만히 앉아있던 짚 인형이 벌떡 일어나 반서진의 팔에 매달렸다.

- 자꾸 어딜 버릇없이 잡는 거야?안 놔?

몹시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서지한의 목소리에 이어서 반서진의 재밌어하는 말이 이어졌다.

“어쭈, 하지 말라 이거냐? 알았어,알았어."

반서진이 손을 떼자 서지한이 다시네 케이크 접시 옆에 얌전하게 앉았다.

이 모든 촌극을 지켜본 유은담은 눈물을 흘리며 배를 부여잡고 웃고 있었다.

반면 묵묵히 앉아 있는 반서후는 여러 모로 복잡한 표정이었다.

“실체화 능력을 얻기 전에는 이 몸을 쓰고 있었어요. 지금도 실체화는 좀 아끼고 싶어서 이 상태로 있기로 했어요.”

“그래요? 꽤 오래 저 몸으로 지냈나 봐요. 좀 너덜너덜한데.”

유은담의 말대로 지푸라기 인형은 꽤 낡은 상태였다.

요리를 하면서 여기저기 태워먹기도 했고 올이 풀려서 지푸라기가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기도 했다.

한국 던전 공략을 마치면 그 무당집에 가서 몇 개 더 사 오든가 해야겠다.

“그나저나 누나, 딸기 싫어해요?”

나는 내 케이크 접시를 돌아보았다.

절반 정도 먹은 빵 옆에 덜어 놓은 딸기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딸기를 마지막에 먹으려고 옆으로 빼놓고 있었는데 오해했나 보다.

‘‘아뇨. 제일 좋아해서 마지막에 먹으려고요.”

- 딸기 좋아해?

“음, 그냥 과일로 먹을 때는 보통인데 이렇게 케이크에 올라가 있는 건 특별하게 맛있더라고요.”

지푸라기 인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손에서 포크를 스르륵 빼갔다.

그리고 테이블 위를 도도도 뛰어서 유은담과 반서후의 케이크에서 딸기를 꾹 찍어와 내 접시로 옮겼다.

갑자기 딸기를 강탈당한 두 남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지푸라기 서지한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런, 미안해요. 돌려줄게요.”

“아니에요. 누나 드세요.”

“그냥 먹어.”

유은담은 재미있어하고 있고 반서후는 무언가 포기한 표정이다.

두 사람의 피지컬은 결코 지푸라기 인형에게 눈 뜨고 딸기를 빼앗길 수준이 아니었지만 성격상 기를 쓰고 딸기를 지킬 만한 타입도 아닌 모양이었다.

포크 구멍이 빠끔한 딸기를 돌려주는 것도 좀 이상해서 결국 나는 감사히 받기로 했다.

접시에 잔뜩 생긴 딸기를 케이크와 함께 떠먹는데 옆에서 서지한의 배부른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지푸라기 인형이라 표정은 안 보이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반서진은 나와 서지한을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와, 진짜 지한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유은담이 짧게 헛웃음을 홀렸다.

그러더니 다시 화제를 바꿔 은근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누나.”

“네?”

“지르기스 던전, 어떻게 닫은 거예요?”

“지르기스를 잡아서……."

갑작스러운 말이라 약간 긴장했다.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얼버무리리자 유은담이 사르륵 미소 지으며 애교 어린 어조로 다시 물었다.

“에이, 그게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은밀하게 작업했냐는 거죠. 살짝 조사해보니까 보안요원들은 던전 닫힐 때까지 눈치도 못 챘다는데.”

- 저 자식은 뭘 저렇게 귀찮게 꼬치꼬치 묻는 거야? 모아야, 절대 대답해주지 마.

눈알만 굴리는 나 대신 서지한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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