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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231)

122화

“빌어먹을, 왜 포션 시세가 안 오르는 거야!”

헌터 마켓을 확인한 사장이 노성을 터뜨렸다.

엄 비서는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길 바라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다.

“이게 말이 돼? 판매 등록된 매물이 거의 없는데 시세가 안 오르잖아!”

분을 참지 못 한 사장이 결국 적당히 손에 잡히는 물건을 벽에 집어던졌다.

던져진 물건은 책이었다. 다행히 깨지는 물건이 아니라 엄 비서는 안도하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엄 비서, 계속 입 다물고 있을 거야? 이거 어떡할 거냐고! 일 제대로하고 있는 거 맞아?”

화가 많은 상사를 모시고 있는 건 고달픈 일이었다.

요즘처럼 상사가 하는 일마다 꼬여가는 시국이라면 더욱.

“죄송합니다.”

엄 비서는 값비싼 정장에 싸인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뒤통수에 화끈한 통증이 찾아왔다.

“할 줄 아는 말이 그거밖에 없어?응?”

엄 비서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은 방금 그가 사장에게 보고한 서류철의 모서리였다.

눈앞의 남자는 이런 것으로 사람의 머리를 찍으면 안 된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인종이었다.

분노가 치솟을 만한 대접이었으나 엄 비서의 마음은 고요했다.

눈앞의 인물이 진상을 떠는 것은 어차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서 이골이 난 상태다.

“빌어먹을, 계획이 다 어긋나고 있잖아. 이런 식이면 마켓 접수가 힘들어진다고.”

사장은 번들거리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화가 한소끔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다른 비서가 얼른 얼음이 든 술잔을 내밀었다.

엄 비서는 그 술잔이 무거운 유리 재질인 것이 정말 신경 쓰였다.

“아시아권 다른 길드도 다 같이 매물을 줄이고 있는데 왜 시세가 안 떨어지는 거야?”

씨근덕거리던 사장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분명 초반에는 잘 되어가고 있었다.

공급을 줄이자 마켓의 소비 아이템 시세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분위기를 그렇게 잡자 따로 협정을 맺지 않은 다른 나라의 길드도 시장 흐름에 동참해서 아이템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 되어갔다.

정부에서 파견한 고위 공무원들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식사 한번 하자며 매달려올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우는 소리를 하며 아이템 공급을 좀 늘려 달라 비는 얼굴들.

그 시점에 사장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그러나 그 흐름이 어느 순간 확 바뀌었다.

무난하게 수십 배 가격으로 뻥튀기될 것 같던 소비 아이템의 시세가 갑자기 뚝 멈춘 것이다.

그리고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공급물량이 부족할 텐데 포션의 가격이 점점 하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 길드에서 물량 푸는 거 없는 건 확실해?”

고개 숙인 엄 비서를 노려보던 사장이 술잔을 건넨 비서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 지난 2주 동안 마켓을 계속 감시하고 있습니다. 몇 개국을 제외하면 모두 공급 물량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공손하게 대답하는 비서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장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목으로 넘긴 차가운 음료 덕분에 조금 진정된 기미가 보였다.

그 틈을 타고 엄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최근의 일입니다만, 구매 등록을 해둔 헌터들에게 누군가가 가격 상관없이 소비 아이템을 팔고 있는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

“누가?”

“그건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구매 등록된 거래에만 물건을 팔고 있어서……. 아무래도 마켓 닉네임을 남기지 않으려고 그런 수법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장이 얼음 잔을 꽉 움켜쥐었다.

엄 비서는 금방이라도 그 컵이 자신의 머리로 날아들 것 같아서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사장은 컵을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누구지? 어떤 놈이…….

“마켓 닉네임을 안 남기려고 한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사장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이름을 안 밝히려고 한다.

이 부분이 너무 수상하다. 왜지?

생각을 이어가던 그의 사고는 한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아는 놈인가? 설마, 다른 놈이 뒷구멍으로 수작 부리고 있는 거 아니야?”

의심의 화살은 아군에게 향했다.

한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잠시 모인 것에 불과했다.

거사를 앞에 두고 혼자 딴생각을 하는 쥐새끼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누구지? 우리 길드원? 아니면 협정 맺은 놈? 어쩌면 이 틈을 타 한몫 챙기려는 외부 세력?”

“저희 내부 단속은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만, 혹시 저희들이 미처 감지하지 못 한 개미 제작계 헌터들이 알음알음 팔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엄 비서의 말에 사장은 코웃음 쳤다.

이런 멍청한 놈.

“이만한 규모로 벌어지는 시세조작을 개미들이 막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개미 몇 마리가 이 거대한 흐름을 어떻게 막는다는 거야? 우리가 공급조인 물량이 어느 정도인 지 알 거 아냐?”

“그건……."

“그걸 개인 몇 명이 어떻게 수작질하는 건 불가능해. 분명 조직적 인세력이 뒤에 있어.”

개인이라니.

사장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그만한 물량을 감당하는 것은 죽은 김영길 헌터가 살아 돌아와도 힘든 일이었다.

소비 아이템 공급시장의 한 축을 주름잡고 있던 늙은이.

말만 잘 들었어도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사장은 잠시 혀를 찬 후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물론 사장은 진짜 죽은 김영길 헌터가 24시 노예 체제로 쉴 새 없이 물량을 찍어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뒷 수작 부리는 놈들 있는지 확인해봐. 우리 소속 제작계 헌터들도 단속하고. 애들 단단히 잡으라고. 알아들었어?”

“예.”

그때였다.

사장의 휴대폰이 작게 진동했다.

엄 비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사장이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문자 메시지였다.

발신자는 반서후.

“뭐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메시지를 쭉 읽어낸 사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놈들, 이거 아직 정신 못 차렸네.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왜 그러십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무슨 던전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온다나? 자기들이랑 협력해서 던전 닫게 해 달라는데?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

사장은 다시 낄낄 웃더니 성의 없이 몇 마디 적어 문자를 회신했다.

그걸 가만히 기다리던 엄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이면 큰일이 아닙니까? 민간인들이 많이 죽을 텐데……."

“뭐?”

“아, 아닙니다.”

한심하다는 사장의 시선이 엄 비서에게 내리 꽂혔다.

“쯧쯧, 민간인 죽으면 뭐? 내 알바야? 아직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네. 이 헛소리가 진짜라고 쳐, 그런데? 어쩌라고?”

“예?”

“민간인이 진짜 많이 죽으면 뭐 어때? 아니, 오히려 좋지. 세상이 헌터를 더 원할 테니까.”

“저희 쪽 전투계 헌터로 그런 상황을 막을 수 있을까요?

대한 길드 측에는 현재 서지한 같은 독보적으로 강한 헌터가 거의 없었다.

엄 비서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사장이 히죽 웃었다.

“이거, 이거, 이 친구 순진해서 어떻게 사나. 강한 헌터는 필요 없어.말도 안 듣고 골치 아프기만 하니까. 우리한테 필요한 건 고만고만하게 강한 헌터들이야.”

홀로 보스 급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헌터는 어차피 콧대 높은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세상을 등지더라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는 헌터만큼 쓸모없는 존재는 없었다.

필요한 건 사회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헌터다.

“세상을 등지고 살면 모를까,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려면 내 규칙을 따라야 하거든.”

오만하게 미소 지은 사장은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래, 어차피 대전제는 바뀌지 않았다.

약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돌멩이 몇 개가 구르는 마차를 세우지는 못한다.

헌터 따위, 지금 이 순간에도 던전 한 번 돌아보고 싶어서 목매는 헌터가 국내 국외 가리지 않고 수두룩하다.

“이런 헛소리까지 하는 걸 보니 많이 초조한가 보군. 막상 자기들끼리 나가 보니 바깥바람이 매서운 게야.”

사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술 한 모금을 머금었다.

“어차피 힘만 있는 깡패 놈들이 뭘 하겠어.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고. 어차피 반서진도 우리 손에 있으니 저쪽만 초조하지.”

갑자기 튀어나온 반서진의 이름에 엄 비서의 등줄기 사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반서진이 탈출했다는 소식을 며칠 전에 들었으나 아직 보고를 하지 못 한 상태였다.

이걸 보고하면 이번에는 진짜로 유리컵이 머리로 날아올지도 모르니까.

사장의 기분이 좋을 때 보고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이라도 보고할까? 아니면 당장이 순간을 모면할까?

엄 비서의 갈등은 사장의 축객령으로 종료되었다.

“나가서 마켓 시세 왜 안 오르는지 확인하고 딴 마음먹은 놈 없는지도 더 알아봐. 아무래도 쥐새끼가 있는 게 분명해. 협력한 길드 뒷구멍도 좀 파보고. 걸리면 문제 될 테니까 안 걸릴 정도로만 해.”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감시인력 최대한 돌리고.”

“그, 백광 길드 관련 인물 감시하는 인력도 돌립니까?”

사장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엄 비서를 응시했다.

“그거 아직도 감시하고 있어? 누구더라?”

“손모아 헌터와 백광 길드 직원들, 그리고……."

“아, 그 떨거지들 이름 알기도 싫고. 시위하던 엄마인지 뭔지도 이제 반응 없다며? 그때 감시 해제했어야지. 이런 거 하나하나 내가 다 지시해야겠어?”

“죄송합니다.”

엄 비서가 거듭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으나 사장의 갈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인력 낭비인 거 몰라? 사람이 남아돌아?”

“죄송합니다.”

“쯧. 나가봐. 나는 헌터 일보 사장이랑 저녁 먹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깊게 고개를 숙인 엄 비서는 사장실을 나오자마자 뒷목을 주물렀다.

저놈의 성질머리 하곤. 그래도 오늘은 많이 맞지 않아서 다행이다.

반서진 헌터가 없어진 건 언제쯤 보고하지? 최대한 기분 좋을 때 보고해야 하는데…….

평소 사장은 왜 자신이 기분이 좋을 때만 거지 같은 소식을 듣게 되는지 한탄했다.

물론 그를 제외한 모든 측근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엄 비서님.”

사장실을 나와서 제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차,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직원이 엄 비서를 찾아왔다.

“왜?”

“그,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듣기도 전에 등줄기가 선뜩해지는 불길함에 엄 비서는 침을 삼켰다.

그런 그에게 부하가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지르기스 던전이 닫혔다고 합니다.”

그 순간, 엄 비서는 진심으로 퇴사하고 싶어 졌다.

아, 지금 퇴사하면 퇴직금 얼마 받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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