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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121/231)

121화

대체 어떻게 호숫가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들자 나는 호숫가 벤치에 앉아 드넓은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은 언제나 사람을 차분하게 해 준다. 그래, 슬슬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다.

좋아. 진정되고 있어. 평소대로, 평소대로 하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지한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던전에 있을 만한 사람 중에 내가 가장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역시 서지한이지.

유은담이 보이면 이상하잖아?

이게 다 ‘가장 좋아한다’라는 말 때문이야. 별것 아닌데도 괜히 의미심장하게 들리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당황한 것도 당연해. 서지한 씨가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여서 어색해질까 봐 당황한 거였지.

좋아, 정리 끝.

다만 서지한에게 ‘왜 그렇게 간질간질한 목소리로 제가 보였다고 말하신 거죠?’라고 물어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그 바람은 그냥 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그는 그저 초보 헌터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것뿐이야.

계속 붙어 있는 동안 정이 쌓였으니까 내가 보였던 거겠지.

그런 그에게 ‘혹시 좀 새콤달콤한 의미로 저를 좋아하시는 건가요?’라고 묻는 건 당치도 않다고.

손모아, 기억해내라.

일하면서 좀 친절하게 대했다고 자기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고 덤빈 남자 손님이 얼마나 곤란했는지.

서지한이 내게 좀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이상한 의미로 오해하는 건 그 손님과 똑같은 짓을 하는 거라고.

그가 날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잖아.

뭘 새삼스럽게 동요한 건지.

일단 이 문제는 접어두자.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정신 차려야지.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인데 무슨 한심한 짓이야.

“반서진 씨는 아직 안 왔나 보네요.”

오두막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애써 운을 떼자 서지한 이 허겁지겁 말을 받아주었다.

“그러게. 아무런 기척도 안 느껴져.”

“바쁜가 보네요.”

“그러게. 바쁜가.”

“오늘 저녁쯤에는 올까요?”

“그러게, 오늘 저녁쯤에는 을 것 같아."

넋이 빠졌는지 앵무새처럼 내 말을 반복하는 서지한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려는 내 노력이 번번이 무산되어버렸다.

아니, 더 어색해졌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호수를 바라봤다.

아아악,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이전에는 서지한과 어떻게 이야기했었지? 무슨 화제로 말을 했던 거야?

손모아, 어서 생각해내라. 뭔가 어색하지 않을 만한 적당한 화제를 생각해 내!

안 돼, 앞에 서지한이 있어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어두컴컴한 던전 안에서는 위압감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호숫가에서 빛 받으니까 무슨 패션 화보집 찍는 사람 같네.

다리 진짜 길다. 허리 위치 높은 것 좀 봐. 비율 진짜 사기 아냐?

서지한 씨, 얼굴도 좀 작은 거 아닌가? 아니, 확실히 작다.

게다가 동안이다. 이 얼굴이 29살이라고 누가 믿겠냐고.

아직 눈가가 좀 붉어져 있네. 눈꼬리가 붉어지니까 좀 섹시한 것 같은…….

정신 차려, 손모아!

화제, 화제, 화제! 화제 내놔, 지르기스!

아, 지르기스가 있었지.

“지르기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약하네요.”

“아, 응! 그렇지?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서지한이 싱긋 웃으며 던지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좋아. 이거다. 이걸로 계속 이어가자.

“그러게요. 키르기스에 비하면 진짜 보스 몬스터라고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약한 느낌이에요. 그렇게 약한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었는지.”

나는 지르기스가 살아서 이 말을 들었다면 통곡을 했을 만한 폭언을 아무렇지 않게 퍼부었다.

아, 이 말을 직접 해줬어야 했는데.

꼭 말싸움 끝나고 나면 좋은 일침이 생각난단 말이야.

“약하니까 살아남은 거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몬스터들이 약한 던전일수록 채집하기 좋은 던전이었다.

보스 몬스터가 나타난다고 해도 충분히 도망칠 수 있으니까.

지르기스 정도라면 속박계 스킬이 있는 헌터 몇 명이 합심해서 스킬을 걸어 놓고 거리를 벌리면 탈출석을 써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거다.

죽을 위험이 낮은 채집용 던전.

그게 지르기스 던전의 가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헌터가 볼 때는 위험도가 낮다고 해도 저기 있는 제일 약한 몬스터조차 비각성자 입장에서는 정말 괴물인 걸요. 던전 닫히고 나서 보니까 주변에 민가도 있던데 만약 그대로 뒀으면 피해가 컸을 거예요.”

서지한은 대답 대신 피식 웃더니 무심코 내 머리에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또 얼굴을 붉혔다.

아, 안 돼, 그러지 마.

간신히 평소 같은 분위기가 됐는데.

“왜 그래요?”

방금 혹시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한건 가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어?”

그는 엉거주춤하게 든 손을 잠시 쳐다보더니 어색하게 손을 회수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요?”

“으, 응. 아. 그래, 부산물은 뭐 나왔어?”

맞다. 부산물. 아아, 마석 챙겨 줘야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지르기스 부산물을 찾아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다리 여섯 개, 흰 털이 나 있는 갑각 한 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뿔과 마석.

“받아요.”

나는 서지한이 어색하게 되돌리던 손을 끌어다가 지르기스 마석을 쥐여 주었다.

행복해하며 바로 홉수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마석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러지? 아!

“제가 영혼석에 바로 흡수시켜야 하는 거예요? 이리 줘요. 지금 바로 먹여줄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넌 괜찮아?이거 S급 마석이야. 처음에는 워낙 급해서 덥석덥석 받긴 했는데, 진짜 괜찮아? 차라리 이걸로 아이템을 만들어서 네가 사용하면……."

본인 전 재산을 갈아 넣은 반지를 이불 드는 거 무거워 보인다고 준 사람이 할 말인가?

“새삼스럽게. 무슨 아이템을 만든다고 해도 서지한 씨 실체화 3시간 늘어나는 것보다 덜 유용하지 않을까요?”

“으음. 그건 그래.”

과연 랭킹 1위답게 서지한은 빠르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했다.

곧바로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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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 서지한에게 충왕 지르기스의 마석 (등급: S) 을 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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