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검은 테크 웨어에 새카만 사자의 낫.
서지한의 전투복장이다.
평소 입는 옷과는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의 옷이었다.
그가 유령일 때 입는 일상복은 단정한 면 티셔츠나 부드러운 질감의 스웨터다.
아무래도 사람의 인상이란 복장에 좌우되기 마련이라, 그가 지금까지 입어온 커피 광고용 패션 덕분에 나는 그가 부드럽고 무해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복장뿐만이 아니라 유령 상태의 서지한이 가진 약한 존재감도 그 인상에 한몫을 했다.
허깨비 같은 그의 가벼운 존재감을 상대로 위협적이라는 인상을 받는 건 힘들지.
물론 웃지 않고 있으면 특유의 싸늘한 인상 탓에 좀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긴 하겠다.
하지만 서지한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나와 대화할 때면 늘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일 줄 상상도 못 했지.
아무튼, 지금 그가 걸친 것은 평소에 입고 다니는 부드러운 느낌의 옷이 아니었다.
광택 없는 검은 전투복에 싸인 몸은 위협적인 기세를 뿜어냈다.
어깨부터 가슴을 가로지르는 하네스가 마치 위험물을 잠가두는 안전장치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서지한의 키가 크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훌쩍 높은 그의 머리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서지한 씨, 키 몇이에요?”
“키? 188? 189 였던 것 같기도 하고. 입대 전 신체검사 이후로 안 재봐서 모르겠어.”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나 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별생각 없는 얼굴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내가 168이니까 딱 20cm 정도 차이 나는구나.
“그러고 보니, 특수부대 나오셨죠?”
“응. 알고 있었네?”
“유명하니까요.”
서지한은 1세대 헌터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언론이 헌터들의 정보를 은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가장 유명한 헌터였던 서지한의 정보는 여기저기 꽤 알려져 있었다.
“특수부대면, 고생 많이 했겠어요.”
내 말에 서지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싱긋 웃었다.
“별로? 재밌었어. 다들 잘해주더라고.”
나는 눈앞의 서지한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각종 청소년 체전에서 메달을 휩쓸며 살아온 188센티미터의 근육질 남성. 격투술에 능함.
누구라도 잘해주고 싶을 만한 프로필이군.
지금도 그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건 아마 각성 전에도 동일했을 것이 분명했다.
한때는 에비타니스 핵을 채집하는 대신 몬스터와 싸우고 전투계 헌터로 각성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서지한을 보니 회의감이 든다.
내가 그때 몬스터한테 덤볐다고 한들 서지한 같은 전투계 헌터로 각성할 수 있었을까?
으음,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 같아.
“그나저나 키르기스 공략 때랑 같은 차림이네요.”
내 말에 서지한은 한차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전투할 때는 늘 이렇게 입으니까.이게 제일 움직이기 편해.”
서지한이 입고 있는 것은 마치 고어텍스 재질의 테크 웨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그에게 돌려준 장비 아이템이다. 당연히 고어텍스가 아니다.
'아니겠지?'
저건 검은 바람의 전투복이라는 이름의 A급 방어구 아이템이다.
저것과 한 세트인 검은 바람의 전투 부츠와 검은 바람의 전투 장갑도 있다.
방어력은 미미하지만 세트 구성품 중 세 개 이상을 착용하면 민첩성을 5% 상승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나저나 사자의 낫과 반지를 포함해도 겨우 장비 아이템을 다섯 개 가지고 있다니.
좀 적은 거 아닌가 싶은데 아무래도 물어보기가 조심스럽다.
손만 뻗으면 S급 아이템 펑펑 루팅 하는 애가 ‘그런데 서지한 씨는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좀 적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너 거지야?’라고 묻는 것처럼 들리잖아.
안 돼, 너무 재수 없어.
하지만 고맙게도 서지한이 먼저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래는 장갑도 있고 귀걸이도 한 짝 있었는데 다 팔았어.”
“왜요? 능력치가 별로였어요?”
“아니, 묵시의 청금석 반지 재료로 A급 마석이 8개나 들어가더라고.은담이가 도와주긴 했는데 좀 힘들었지. 그거 만든다고 장비랑 실라기스 던전 공략하고 얻은 부산물 거의 다 팔아버렸어.”
나는 잠시 내 인벤토리에 백 개 가까이 쌓여 있는 A급 마석을 떠올렸다.
괌의 수왕류 던전에서 야간 훈련을 할 때 얻은 부산물은 아직 고스란히 인벤토리에 남아 있었다.
F급 마석은 심심할 때 물수제비 용도로 던지며 놀아도 될 만큼 있다.
“그렇구나……."
A급 마석 8개라는 대목에서 ‘와 대단하다!’라는 표정을 지어줘야 할 것 같은데 잘 안 됐다.
나는 연기를 하는 대신 어쩡쩡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힘 능력치가 두 배면 진짜 사기 급 아이템이니까.”
“으음, 대단하긴 하죠.”
힘이 300만 되어도 저 반지를 끼면 600이 된다.
서지한처럼 힘 능력치가 높은 사람이 사용하면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낼 것이다.
“악령 왕 실라기스의 청금석 눈알이 재료로 들어간 건데, 현존하는 아이템 중에 보스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 건 그게 유일할 거야.”
그렇다면 확실히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반지일 수밖에 없겠다.
아, 그래서 반서후가 이 반지를 보자마자 단숨에 서지한 아이템인 걸 알았던 거구나.
담담하게 납득하려던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서지한이 마켓에 실라기스 부산물이라고 아이템 등록하지 않았던가?
“예전에 실라기스 부산물 한 개 얻었다고 했죠?”
“응.”
“그걸 묵시의 청금석 반지로 만들었고요.”
“응.”
“그런데 실라기스 잡았던 무렵 에, 마켓에 실라기스 부산물이 등록됐다고 기사가 떠들썩하게 났던 거 같은데.”
분명 기억한다.
그래서 서지한의 마켓명이 ‘나이프’라는 추측도 나돌았잖아. 결국 사실이었고.
“아, 그거? 뻥이었어. 은담이가 그렇게 기사 뿌리면 더 잘 팔릴 거라고 하더라고.”
“네?”
“당시에는 아직 보스 몬스터 잡은 사람이 없어서 보스 몬스터가 주는 부산물에는 이름이 붙는다는 걸 아무도 몰랐거든.”
아, 하긴.
내가 루팅한 키르기스의 갑각도 S급 충왕류의 갑각이 아니라 ‘키르기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
“덕분에 A급 악령류 아이템이 실라기스 부산물로 비싸게 팔렸지. 선구자만 빨 수 있는 꿀이라고나 할까? 억울하면 보스 잡아서 아이템 이름 확인하든가. 하하.”
상쾌하게 웃는 서지한을 보며 나는 갑자기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몬스터는 등급이 높을수록 수가 적다.
내가 괌에서 매일매일 야간 특훈을 하며 몬스터를 왕창 때려잡는 동안에도 A급 몬스터는 100마리 남짓 봤을 뿐이었다.
그러니 A급 몬스터의 부산물은 공급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루팅조차 확률이라 어지간한 헌터들은 구경도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연히 마켓에 풀리는 숫자도 엄청나게 적었다.
그러니 저런 거짓말이 어느 정도 통했던 거겠지.
마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괌에서 부순 B급 마석도 괌 정부에서조차 부담스러워할 만큼의 보물이었는데.
그 귀한 A급 마석을 8개나 썼다면 사실 그때 당시 전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A급 마석을 긁어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S급 부산물까지 들어갔으니 이건 이미 값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아이템이었다.
“저기, 서지한 씨.”
결론은 한 가지다.
“응?”
“이 묵시의 청금석 반지, 거의 서지한 씨의 전 재산 아니에요?”
“사자의 낫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이 청금석 반지 재료비로 가지고 있던 아이템을 다 처분했다면서요.”
“응.”
“그럼 거의 전 재산의 대부분을 저한테 줘버린 거잖아요.”
세상에, 지금 그런 귀한 아이템을 나한테 선뜻 줘버린 거야?
왜 줬더라?
아, 이불 들고 가는 거 힘들어 보인다고?
와, 진짜 말도 안 돼.
“난 죽었으니 어차피 사용할 수도 없는 거였어. 물건은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게 제일이지.”
“아무리 그래도……."
나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니, 나는 못 해.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다 챙겨가려고 했을 거야.
“아이템은 뭐 있다가도 없는 거잖아.”
음, 어딘가 익숙한 말이군.
나도 저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아.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
한때 그 말을 자주 하곤 했지.
통장을 스쳐가는 월급을 보며 늘 하던 생각이다.
저 말에는 ‘늘 없기 때문에 뭔가 생기더라도 어차피 없어질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서지한 씨, 늘 아이템이 없었던 걸까…….
내가 딱해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키르기스 잡을 때도 가지고 있는 거 다 털어서 포션이랑 스크롤 샀거든. 키르기스 잡아서 다시 회수할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됐지.”
그래서 서지한의 인벤토리를 통째로 루팅 했는데도 획득 아이템 목록이 초라, 아니, 빈곤, 아니, 소박했던 거구나.
그래서 가는 길에 잡은 몬스터들을 모두 깔끔하게 루팅 한 거였어…….
나는 얼른 묵시의 청금석 반지를 빼서 서지한에게 돌려주었다.
이 반지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니 도저히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응? 이미 줬던 걸 돌려받는 건 좀……."
“받으세요.”
“아니……."
“받으세요.”
그 김에 나는 포션도 왕창 꺼내서 서지한에게 내밀었다.
S급 힘, 민첩성 증가 포션이다.
“이것도 받으세요. 몸이 생겼으니까 이제 서지한 씨도 포션 마실 수 있잖아요!”
내가 S급 포션으로 능력치를 영구 증가시킬 수 있다고 할 때마다 서지한이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이제 그도 당당하게 이 사기 급 아이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으음."
포션을 받아 든 서지한이 미묘한 얼굴로 포션 병을 내려다봤다.
뭐지, 이 반응? 엄청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저번에 줬을 때 마셔 봤는데, 효과 적용이 불가능한 개체라고 떴었어. 아무래도 이게 진짜 육신이 아니라 마석 에너지로 만든 몸이라 그런가 봐.”
입맛을 다시며 ‘아깝게 됐다’라고 덧붙인 서지한은 인벤토리를 열어 나에게 포션을 모두 돌려주었다.
반서진 구출 때 받았던 포션은 다시 실체화한 후 돌려준다는 걸 깜박 잊고 있었다면서.
“자,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고 슬슬 지르기스나 불러볼까?”
맞아. 지금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근데 잠깐만, 지르기스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니라…….
“부른다고요?”
워낙 자연스럽게 말해서 뭐가 잘못된 줄도 몰랐다.
내 말에 서지한은 당연하다는 듯고개를 끄덕였다.
“지르기스가 있는 보스 방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요?”
케르기스도 그렇고 바르기스도 그렇고 충왕류 보스 몬스터는 자신만의 거대한 공간을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었다.
당연히 지르기스도 해당될 것이다.
“시간도 없는데 언제 찾아가. 불러야지.”
“휴대폰 번호라도 알고 있어요?”
내 말에 서지한은 재밌는 능담을 들었다는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사자의 낫을 한 바퀴 휘릭 돌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오, 전투계 헌터라 그런지 별것 아닌 동작도 태가 다르네.
“휴대폰 번호는 모르지만 부르는 방법이 있지.”
씩 미소 지은 서지한은 낫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새카만 기운을 응집시키더니 던전 벽을 향해 빠르게 그었다.
낫에서 날아간 초승달 형태의 검은 기운은 충왕류들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다듬은 벽을 단숨에 박살 내버렸다.
건물 철거용 중장비 못지않은 위력이었다.
“서, 서지한 씨.”
나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서지한은 계속해서 던전을 파괴해나갔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나타나게 되어 있어.상식이지.”
나는 그저 아연하게 그 광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자, 랭킹 1위 서지한이 알려주는 생활의 상식.
집주인을 불러야 할 때 연락처를 모르면 집을 때려 부수면 집주인이 나타난다.
이런 상식,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