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서지한은 나보다 훨씬 과격한 면이 있다.
내가 기겁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다시 나를 부추겼다.
- 저거 각성자 같은데. 느껴져? 근접계 전투 계열. 각성자인데 민간인을 그렇게 위협했다는 거지?
차근차근 보니 각성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간인과는 엄연히 다른 존재감.
당시에는 덩치가 좋아서 그런가 했는데 확실히 각성자가 맞았다.
각성자의 몸으로 엄마를 때리려고 했단 말이지?
- 저거 그냥 지나갈 거야? 용서해주게?
“아뇨.”
단호하게 대답하고 나는 남자에게 접근했다.
벼룩의 몸으로도 스킬은 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남자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때리지도 않을 것이다.
폭력 외에도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나는 살짝 남자의 주머니로 점프해서 기어들어갔다.
- 어디가?
주머니 안에는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잠금이 걸려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살짝 터치하자 바로 홈 화면으로 진입했다.
남자는 벼룩 하나가 자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조작하는 걸 꿈에도 모르는지 연신 바쁘게 담배만 뻐끔거렸다.
- 모아야?
어디 보자, 메신저 앱이 여기 있군.
몇 개의 채팅방 사이에서 나는 남자가 주변인에게 상사의 험담을 하는 채팅 내용을 찾아냈다.
그대로 캡처.
그리고 전화부에서 ‘-부장님’이나‘-상무님’ 같은 이름의 연락처에 그 이미지를 전송했다.
일을 마치고 주머니 밖으로 빠져나온 뒤 나는 다시 남자를 일별 했다.
남자는 아무런 낌새도 눈치 채지 못 한 기색이었다.
정말 범죄였다.
남자의 휴대폰은 아직 잠잠하다.
야심한 시각이라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침에 그걸 보면 잠이 확 깨겠지.
이 남자도 여러 가지 의미로 깨질 거고.
- 뭐 했어?
“메시지로 이미지 몇 개 보낸 거뿐이에요.”
- 이미지?
“저 사람이 상사 욕하는 채팅 캡처이미지?”
- 그런 채팅이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저런 사람이 상사 욕을 안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잠금이 걸려 있으면 휴대폰이나 고장 내려고 했는데 안 걸려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지한은 약간 복잡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 그걸로 되겠어?
“뭐, 마음 같아서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은데, 엄마도 마음을 크게 다친 거지 몸이 많이 다친 건 아니니까요.”
- 으음.
“저 사람한테 명령한 사람도, 저 사람도 둘 다 내일 아침에 마음을 크게 다칠 테니까 일단은 이걸로 만족하죠. 이제 가요.”
서지한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남자를 힐긋 쳐다본 후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 그래, 거의 다 왔어. 지르기스 던전 전송 포탈은 이쪽이야.
그 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던전 전송 포탈이 있는 방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문틈으로 들어가니 조명이 켜지지 않아 캄캄했다.
센서 등도 벼룩에게는 반응하지 않는 덕분에 매우 어두웠다.
그래도 문틈으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복도 불빛에 의지해 전송 포탈을 찾아냈다.
검은 원판에 음각으로 파인 마법진.
던전 게이트 주변의 보안 시스템을 믿는 모양인지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애초에 던전 관리청 자체 보안이 튼튼하니까 감히 모든 보안을 따돌리고 여기까지 잠입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마법진에 마력을 쏟고 던전으로 이동했다.
도착한 던전 입구 주변에는 수많은 보안 스킬, 감시탑, 요원들이 가득했지만 던전 게이트 안으로 톡톡 뛰어드는 벼룩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일단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던전에 들어오는 건 성공이다.
-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 이렇게 쉽게 되다니…….
서지한이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이러는 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대꾸하는 대신 사방을 탐색했다.
벌써 여러 번 다른 충왕류 던전을 방문해서 그런지 처음 오는 던전인데도 마치 자주 왔던 곳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충왕류들이 한 땀 한 땀 다듬었을 홁벽과 여기저기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초록 이끼, 거기에 통풍이라는 개념을 상실한 답답한 공간까지.
다만 지금의 나는 벼룩만큼 작아져있다는 점이 여느 때와는 다르다.
덕분에 충왕류의 좁디좁은 개미굴 같은 지형도 꽤 널찍하게 느껴져서 나쁘지 않았다.
“몸이 작으니까 여기가 되게 널찍하게 느껴지네요. 답답한 것보다 훨씬 좋은데요. 이렇게 계속 다닐까요?”
-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이대로라면 다른 공략 팀과 마주쳐도 들키지 않겠지.
“그럼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적당히 말이 통할 만한 충왕류를 찾아봐요.”
그렇게 마음먹고 몇 걸음 톡톡 걸어가는데, 갑자기 서지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런데 이 상태에서 내가 실체화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네?”
- 내 실체화는 영혼에 마석 에너지로 질량을 입히는 방식인 것 같거든. 그런데 뼈대가 되는 영혼이 지금처럼 작아져 있는 상태면 실체화해도 이렇게 작은 상태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런가?
실체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 스킬이 아니라 서지한이 사용하는 스킬이니까.
“듣고 보니 그럴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도 별 문제는 없지 않아요?”
- 문제 있지. 충왕 변이 해제하는 건 시간이 필요하잖아.
“그렇죠.”
- 돌발 상황이 생겨서 내가 급하게 실체화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어떡해?
그제야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렇게 작은 크기로 작은 사자의 낫을 휘둘러봐야 충왕류 외피 각질 제거나 해주겠지.
이만저만 대참사가 아니다.
만약 보스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나서 다 죽이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그렇게 작은 서지한은 전투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보스의 발에 짓밟혀서 그냥 개죽음당할 수도 있었다.
“혼자서 몸 크기를 크게 할 수는 없어요?”
멈춰 서서 잠시 뭔가 끙끙거리던 서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 안 되는데. 마력을 아무리 돌려봐도 별 소용이 없네.
“예전 호숫가에서는 제가 벼룩 됐어도 여전히 큰 상태였잖아요? 저 없어지니까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던 거 기억나는데.”
- 그때도 조금 기다렸으면 작아졌을 거야. 골목길에서는 작아졌잖아.
그게 서지한이 임의로 줄인 게 아니라 뒤늦게 크기가 맞춰진 거였구나.
“……그러면 변신 풀고 다니는 게 좋겠네요.”
- 그러자. 아니지, 잠깐만.
충왕 변이를 해제하려는데 서지한이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 그냥 커다란 벌레로 변하는 건 어때? 걔네들도 널 동료라고 봐 줄지도 모르잖아.
좋은 생각이 아니냐는 듯 서지한이 빛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확실히, 인간 모습보다는 친근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다른 인간한테 공격당할 수도 있잖아요.”
- 투명화 스크롤 쓰고 돌아다니면 모를 거야.
“워낙 좁은 곳이라, 그 상태로 좁은 굴에서 몸 스치면 투명화가 풀릴텐데.
생각해보니 진짜 끔찍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개미굴.
뭔가와 스쳤다 싶어 쳐다보니 커다란 충왕류가 바짝 붙어 있다?
무슨 공포영화야 뭐야.
나도 비명, 그 헌터도 비명 지르겠지.
- 정면으로 마주칠 것 같으면 내가 기척 알려줄 테니 피하면 되고.
으음.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이긴 하는데 나중에 정체를 밝혔다가 거짓말했다는 둥 하면 곤란해요. 이럴 때는 정직하게 정면승부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오, 너도 벌레? 나도 벌레. 위 아더 벌레.
우리 좋은 친구가 되자!라고 합의한다고 치자.
그런데 뒤늦게 ‘사실 나 인간인데’라고 고백하면 ‘나를 속였구나! 널 믿었는데, 우리 사이는 이제 끝이야!’라는 반응이나 돌아오겠지.
중요한 일일수록 첫째도 정직, 둘째도 정직이 최고다.
신뢰가 틀어질 만한 일은 처음부터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나는 인벤토리에서 망토를 꺼내고 그 안에서 변신을 해제했다.
일일이 이러는 거 좀 귀찮은데, 벼룩 상태에서도 입을 수 있는 장비 아이템을 좀 구하든가 해야지.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뒤 망토 안에서 옷을 챙겨 입고 나니 벽에 머리를 박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서지한이 보였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그가 슬쩍 입을 열었다.
- ……다 갈아입었어?
“네.”
담담하게 대답하고 인벤토리에서 투명화 스크롤을 꺼냈다.
벼룩 모습이라면 몰라도 이런 인간 몸으로 돌아다닐 거라면 투명화 스크롤이 필수다.
- 그래……. 그런데 다음부터는 투명화 스크롤 먼저 쓰고 갈아입는 게 어떨까?
벽에서 머리를 떼고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서지한이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권유했다.
나도 생각하긴 했는데, 투명화 풀릴까 봐 그랬지. 비효율적이잖아. 그리고 어차피 망토 안에서 갈아입었는데 뭐.
“아, 옷 갈아입는 건 충격으로 판정 안 되는 거예요? 충격받으면 투명화 풀리잖아요.”
- 아마 괜찮을 거야…….
“그래요?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요."
- 제발 그렇게 해 줘. 이제 가자.
서지한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투명한 목덜미가 약간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니 무신경한 짓을 한 것 같아서 좀 미안해졌다.
괜히 그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렸잖아.
- 잠깐. 앞에 뭔가 있다.
얼마 걷지 않아서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나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집중해서 전방을 쏘아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몬스터야. 걷는 속도가 균일한 걸 보니 통상적인 순찰이군.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보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아.
“공략하는 헌터들 기척은 없어요?”
- 없어. 아무래도 첫 손님이 온 것 같은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소통 유과를 꺼냈다.
그리고 3등분 해 하나를 먹은 뒤 나머지 두 조각을 서지한에게 내밀었다.
서지한은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실체화를 한 뒤 내 손에서 소통 유과를 받아갔다.
여기 몬스터는 모두 근접계 전투 특화다.
나의 민첩성으로는 몬스터의 입에 유과를 먹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소통 유과를 먹이는 건 ‘놈이 눈치 채지도 못하게 양치질도 시켜줄 수 있어’라고 자신한 서지한이 맡기로 했다.
“준비됐어?”
“네.”
잠시 기다리자 어두운 동굴 저편에서 거대한 개미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입에 서지한이 전광석화처럼 소통 유과 조각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얼떨결에 소통 유과를 삼킨 몬스터가 제 앞에 선 서지한을 응시한다.
서지한이 싱긋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우리 친구가 되지 않을래?”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나?
아니야, 처음부터 목적을 말하는 게 좋지! 괜히 말 돌리다가 오해하면 어떡해.
어쨌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 충왕류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이없어할까? 아니면 놀랄까?
서지한을 내려다보던 몬스터의 입에서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버러지.”
그건 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