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거실과 주방은 ㄱ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어서 거실 안쪽에 앉아 있는 서지한도 그녀가 왔는지 몰랐나 보다.
나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볼 수 없었고.
어쨌든 내가 쩔쩔매는 모습을 다 봤다고 생각하니 다시 귓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영혼 상태인 서지한을 볼 수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겠지만 내 태도로 대충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아, 부끄러워.
왔으면 기척을 좀 내라고!
두문불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 그럼 계속할까.
하긴 뭘 해!
능청 떠는 서지한을 못 본 척하며 나는 반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같이 산 지 3일이나 되었는데도 얼굴을 마주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불쑥 부엌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어딘가에서 이동 스크롤로 이곳으로 온 모양새다.
“공사장.”
“공사장이요?”
“반서후가 헌터들 영입하면 지낼 곳을 만들고 있거든.”
아, 반서후의 인재영입이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 보다.
듣고 보니 반서진의 바지 여기저기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 내가 삽으로 바닥이라도 팔까 봐?”
“으음.”
“염력으로 건물 조립 도와주고 있어. 유은담도 같이.”
“염력 있는 거 이제 안 숨기는군요.”
반서진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그럼 난 가볼 테니까 하던 거 계속해. 다 지으면 위치 알려줄 테니 놀러오고.”
무심하게 한 마디 던진 반서진은 스크롤을 찢기 전 문득 장난스럽게 웃었다.
“연애가 좋긴 좋아. 그렇지?”
연애 아니거든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틈도 없이 그녀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왔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떠난 것이다.
애초에 왜 온 거지?
물 마시러?
한참 씨근덕거리며 얼굴의 열기를 식히는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서지한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 우리도 이제 갈까?
그래.
지금 중요한 건 던전 공략이다.
나는 오두막 밖으로 나와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분간은 충왕류 던전의 퀴퀴한 냄새를 맡아야 하니 맑은 공기를 좀 마셔둬야겠어.
호숫가 오두막은 오늘도 쾌청하다.
자, 컨디션 정상.
상태 이상 없음.
아이템 빵빵.
발걸음도 가볍게 던전 관리청으로.
나는 마스크를 바짝 당겨 얼굴을 가리고 재킷의 후드를 눌러썼다.
그리고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 * *
미국 솔트레이크 인근에 있는 내 호숫가 오두막은 아침이었으나 스크롤을 찢어 이동한 던전 관리청은 까마득한 밤이었다.
내가 던전 공략을 하겠다고 하자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정면 돌파할 거라고 여겼다.
던전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해서 보안 시스템을 모두 깨부수고 던전으로 진입할 거라고.
금세기 최고의 보물창고로 여겨지는 던전은 그에 걸맞게 수십 가지 보안 시스템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투명화, 순간이동 방지 등 잠입 방지 장치는 물론이고 물리적인 공격을 막는 결계도 펼쳐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수많은 헌터들이 안팎으로 지키고 있다.
우격다짐으로 진입하려면 한바탕 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곳이다.
게다가 외부에서는 던전을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도록 하는 결계도 펼쳐져 있어서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 찾아가지도 못한다.
물론, 서지한은 지르기스 던전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유은담과 반서후는 내가 서지한을 내비게이션 삼아 던전으로 쳐들어가서 독도에서 보여준 스킬로 화려하게 싸울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독도에서 S급 포션 약발을 받아 크게 한바탕 한 덕분에 유은담과 반서후는 나의 전투력을 과하게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던전 공략 일정을 문자로 알려주자 내가 정면으로 쳐들어갈 거라고 예상한 유은담은 재빨리 자신도 가고 싶다고 어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유은담의 문자 메시지에 ‘파. 괴. 좋. 아’라는 보이지 않는 글자가 비치는 느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요구는 단칼에 거절했다.
일단 나는 그런 식으로 던전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잠입해서 할 일만 마치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소란을 일으키고 들어가면 대한민국의 모든 헌터를 다 불러 모을 텐데, 던전 보스와 대화할 시간도 없어진다고.
내가 던전 관리청을 통해 잠입하겠다고 하자 유은담은 그 방법을 무척 궁금해했다.
반서후는 잠입은 불가능하다며 던전 관리청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보안 스킬을 언급했고.
하지만 내게는 반서후가 모르는 수단이 있었다.
내 잠입 방법은 그거다.
나도 알고 서지한도 알고 우리 엄마도 아는 그 방법.
나는 던전 관리청 근처 골목에서 조용히 한 마리의 벼룩으로 변신했다.
- 이제 변신하는 것도 자연스러운데. 지난번보다 속도도 빠르고.
변신을 마치고 나자 서지한이 조용히 칭찬했다.
그는 어느새 내 벼룩 크기에 맞춰 아주 작은 영혼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음, 그를 신하로 받아들이니 영혼석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군.
예전에는 벼룩 맞춤 사이즈의 영혼석을 한쪽 발로 꼭 쥐고 다녀야 했지.
“이제 말도 할 수 있어요. 사람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좀 어색하지만.”
- 발음이 약간 어색하긴 하는데 알아듣는 데는 문제없어. 예전에는 말 못 했지?
“그랬죠. 이것도 스킬이라 숙련도가 오를수록 점점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나 봐요.”
나는 근처에 흩어진 옷가지를 인벤토리에 챙겨 넣고 팔짝팔짝 뛰어 던전 관리청으로 향했다.
입구의 CCTV도, 투명화 감지 결계도 이 벼룩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은신 감지 스킬도 의미가 없다.
애초에 나는 은신하고 있지 않고 게다가 충왕 변이는 등급이 S급이라 어지간 한 마력 스킬 파훼 결계도 통하지 않는다.
이 스킬, 원래 용도는 이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이게 편하다.
- 그 녀석들, 이런 방법으로 잠입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겠지.
잠입 방법을 계속 궁금해했던 유은담과 반서후를 말하는 거다.
“같이 바르기스를 잡은 유은담씨는 추측할지도 모르죠. 바르기스 변신 능력을 함께 봤으니.”
- 과연 개가 네가 온전한 뿔을 두 개나 획득해서 하나를 줬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하나 나온 뿔을 자신에게 양보했다고 생각할까.
그런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예전에 유은담에게 뿔 사용법을 조언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으음. 두 개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뿔 먹으라고 알려준 것도 저니까.”
- 네가 이미 뿔을 하나 계승했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걸 먹으면서 알아낸 줄 알겠지.
“하긴. 키르기스의 뿔은 어떻게 봐도 바르기스 거랑은 정말 다르게 생겼죠.”
바르기스의 뿔은 산호 한 가닥을 뚝 잘라낸 것처럼 심플하다.
- 그리고 설령 바르기스의 뿔을 계승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괴수화 스킬이 이렇게 잠 입용 스킬이 될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어?
“그건 그렇겠네요.”
그러고 보면 나도 충왕 변이를 처음 얻었을 때는 단순한 변신 스킬이라고 생각했지.
곤충류로만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난 후에는 거대 곤충으로 변하려고 했었고.
하지만 내 체구의 1.5배 이상으로 커지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작아지기로 했던 것이다.
새삼, 작아지는 건 가능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커지는 비율과 마찬가지로 1.5배 이하로 작아질 수 없다면 큰일 날 뻔했어.
- 그 녀석들, 네 스킬을 무척 궁금해하던데. 계속 묻더라도 가능한 한 공개하지 마.
“그러려고요.”
서지한은 이 스킬을 비장의 한 수로 가지고 있으라는 의도로 한 말인 것 같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 아직 그들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유은담과 반서후는 한배에 타긴 했지만 아직 거리감이 애매한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벼룩을 터도 될까?
봐봐, 가까울수록 서로의 부끄러운 부분을 오픈하는 거잖아.
예를 들자면 목욕을 같이 하는 알몸 오픈, 내장 건강을 공유하는 쾌변 오픈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의미로 반서후와 유은담은 아직 벼룩을 오픈할 만큼 가까워지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 던전 이동 포탈은 이쪽이야.
던전 관리청의 보안검색대를 지나자 서지한이 앞서 가며 나를 안내했다.
예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어서 나도 길은 알고 있지만 나는 얌전히 그 뒤를 따라갔다.
복도 모서리에서 해묵은 먼지 사이를 가로지르며 나는 던전 관리청 내부를 슬쩍슬쩍 홈쳐보았다.
벌써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인데 불 꺼진 방보다 불 켜진 방이 더 많았다.
환한 방 안에는 눈 밑이 새카맣게 죽어 있는 관리청 직원들이 영혼 없는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야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옆에는 산더미 같은 커피 컵이 쌓여있다.
아주 친근한 광경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저들처럼 일을 하고 있었지.
반쯤 잊고 있던 예전 생활의 기억이 돌풍처럼 불어 닥쳤다.
나는 조용히 응원을 남기고 다시 서지한을 따라 이동했다.
“당신들 일처리 이렇게 할 거야?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주제에!”
“선생님, 저희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몇몇 방에서는 민원인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담당 직원의 우는 소리를 애써 귓가로 흘리며 나는 계속 복도의 사무실을 지나쳐 갔다.
24시간 민원센터 직원 분, 고생하십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던전 관리청의 분위기가 평화롭다.
지하에 갇혀 있던 반서진이 탈출했으니 좀 더 경계가 삼엄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긴, 서지한의 말대로 던전 관리청 지하에 헌터 범죄자를 수감해놓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긴 하지.
역시 대외적으로는 비밀이라는 건가.
생각해보니 반서진이 탈출했다는 걸 알려주는 기사도 없었지?
그래도 던전 관리청 내부적으로는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그 사실을 아는 건 윗선뿐이고 말단은 아무것도 모르나 보다.
이렇게 야심한 시각인데도 던전 관리청은 애처롭게 북적거린다.
나는 약간 슬픈 기분으로 톡, 톡 튀어 전진했다.
그러던 중, 착실하게 전진하던 서지한이 가만히 멈춰 선 것을 발견했다.
“왜 그래요?”
작게 묻자 서지한은 대답 대신 복도 한쪽을 턱짓했다.
창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 옆에 붙어 있는 실내 금연이라는 스티커가 무색하다.
하지만 서지한이 멈춰 선 것은 복도 가득한 담배연기가 불만스러워서가 아닌 것 같았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던 것이다.
간간이 혼잣말로 쌍욕을 하는 험악한 얼굴.
어디서 봤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은 순간.
섬광같이 한 장면이 스쳤다.
피켓을 들고 시위하던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한 대 칠 것처럼 위협하던 남자였다.
“호오.”
그 광경이 떠오르자 잊고 있던 분노가 치밀었다.
- 마침 혼자 있는데.
무언가를 종용하듯 서지한이 속삭였다.
마침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확 해버리자,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붙었다.
뭘 하자는 건지는 자명하다. 한 대 때려주라는 거겠지.
- 지금 죽여도 아무도 모를 거 같아.
네?
아니, 저기요. 그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