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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231)

114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 마력 수치는 형편없다.

평범한 전투계 헌터 중에서는 그럭저럭 쓸 만한 편이지만,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한다면 쓸 만한 수준으로는 좀 부족한 감이 있었다.

물론 스킬이 파괴 특화에 등급도 S라서 유은담과 같은 마력 수치라도 효율은 월등하긴 하지만.

그래도 보스 몬스터에게 대미지를 입힐 정도로 강한 위력으로 스킬을 사용하면 금방 지쳐버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S급 마력 증가 포션의 일시 증가 효과를 쓰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런 이유로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는 중심인물은 서지한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그를 혼자 던전에 획 던져 넣는 건 아니고 일단은 나도 함께 간다.

루팅 해야 하니까.

물론 루팅 때문만은 아니고, 충왕포로 후방 포격을 통해 그의 전투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공략 점수는 서지한이 다 먹을 테니 랭킹 보드에 내 이름이 오를 일도 없다.

가족들이 완전히 내 영역 안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될 때까지 내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일석이조였다.

즉, 서지한이 전투를 담당하고 내가 루팅을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역할 배분이 좀 불공평한 것 같긴 하는데, 서지한은 이게 좋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마석 하나를 모두 흡수한 서지한의 실체화 시간이 고작 3시간에 그쳤던 것이다.

덕분에 S급 마석 한 개가 서지한의 실체화 시간을 딱 3시간 늘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좀 실망했다.

S급 마석이 어디 보통 아이템인가?

그런데 고작 3시간이라니.

하루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실체화 쿨타임도 여전히 6시간으로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서지한도 무척 기대했던 모양인지 그 무심한 성격의 소유자가 거의 한 시간 동안 침울해했다.

아무래도 3시간의 실체화로는 좀 불안해서 나는 남아 있는 S급 마석 하나도 마저 서지한에게 흡수시켰다.

완전히 흡수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48시간.

그런 이유로, 던전을 공략하러 가기에 앞서 며칠간 오두막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먹은 마석의 잔여 흡수시간과 두 번째 마석의 흡수시간까지 합쳐 3일이 지났다.

S급 마석 두 개를 모두 흡수한 덕분에 서지한의 실체화 시간은 6시간으로 늘어났다.

확실히 3시간보다는 여유 있어진 실체화 시간에 그도 무척 밝아졌다.

“그렇게 좋아요?”

- 당연하지.

거실 소파에 몸을 한껏 파묻은 서지한이 싱긋 웃었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소파 등받이가 그의 투명한 상체를 완전히 삼키고 있었다.

등받이 위로 얼굴만 쑥 올라와 있어서 솔직히 좀 이상하다.

하지만 그가 몸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뻐하고 있다는 건 잘 알겠다.

사실 마석 흡수를 모두 끝낸 오늘 아침부터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지.

“오늘 갈 던전, 충왕류 던전이라고 했죠?”

아침식사로 말아온 시리얼을 퍼먹으며 묻자 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충왕 지르기스의 던전. 개미굴이라고 생각하면 돼. 보스 몬스터는 날개 달린 여왕개미. 걱정하지 마.아주 약해. 아마 바르기스보다 약할걸?

그가 보스 몬스터를 ‘약하다’ 라고 평가하는 것을 얼마나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지한이 말랑하다고 했던 바르기스도 엄청 강했지.

지금도 바르기스의 독무에 손도 못쓰고 죽어가던 각성자들이 잊히지 않는다.

“계속 충왕류 던전만 가는 것 같네요.”

- 제일 흔한 던전이니 어쩔 수 없지.

충왕류 던전은 싫다.

일단 그 개미굴 같은 어두컴컴하고 좁은 공간이 숨이 막히는 데다 몬스터도 너무 징그럽다고.

이번에는 독 타입 몬스터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수왕류 던전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동물 형태는 가만히 보면 꽤 귀엽고 환경도 숲이나 평야라서 답답하지 않으니까.

- 걱정 마. 이게 한국에 남은 유일한 충왕류 던전이니까. 게다가 지금 열려 있는 던전 중 제일 만만한 곳이야. 여기 놈들 약하거든.

우거지상을 하고 시리얼을 씹고 있었더니 서지한이 살살 달래듯 말을 건넸다.

왜 이 던전을 제일 먼저 공략해야 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약하지만 몬스터의 수가 많아서 민간에 피해를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많이 입힐 수 있는 던전이기 때문이다.

이 던전이 외부와 연결되는 순간, 바퀴벌레가 잔뜩 담긴 통이 엎어진 것처럼 충왕류들이 바글바글 튀어나와 삽시간에 민가를 덮치겠지.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다.

안 잡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좀 싫어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아무튼 지난 3일 동안 우리는 서지한이 알고 있는 던전 정보를 토대로 공략할 곳을 분석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 국내 던전들이었다.

외국의 던전도 빨리 닫아야 하긴 하지만 급한 건 일단 우리 동네니까.

외국 던전은 거기 헌터들이 알아서 하겠지.

지금부터 갈 국내 던전은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덕분에 꽤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태평했다.

하긴, 그들은 벌써 수십 번이나 출근도장 찍듯 드나든 던전이니까 긴장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지.

헌터들이 많이 드나든 만큼 공략 연구도 많이 된 던전이라 계산상으로는 서지한 혼자서도 거뜬히 보스를 공략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래서인지 서지한은 매우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 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6시간이나 실체화할 수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걱정이라기보다……."

- 6시간이면 충왕 지르기스 잡고 기념사진까지 찍은 다음 공략 후기까지 쓸 수 있는 시간이지. 내가 예쁘게 썰어서 대령할게. 쉬고 있다가 루팅만 해.

서지한은 벌써부터 지르기스를 세로로 썰지, 가로로 썰지, 깍둑썰기를 할지 고심하며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저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찬물을 끼얹기는 싫지만 이쯤에서 원래 계획을 상기시킬 필요를 느꼈다.

“잊어버린 거 아니죠? 대화부터 하는 거.”

- 아.

잊고 있었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바로 죽이면 안 된다고요. 대화부터 해서 신하로 복속시키는 게 최우선이에요.”

서지한은 무조건 던전 보스를 죽이고 던전을 빠르게 닫는 게 최선이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나는 약간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피난민이었다.

적어도 포식자라는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는 한, 좀 더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서지한은 일단 내 말을 들어줬지만 그래도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게 잘될 거라는 생각이 안 들어.

“엘파니스라는 선례도 있잖아요.”

- 그건 종족이 같았으니까. 이번 상대는 충왕류라고. 정말 그거랑 같은 편을 할 수 있을까?

“으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죠.”

만약 성공하면 얻게 될 이득이 어마어마하잖아?

일차적으로는 던전 밖으로 뛰쳐나온 몬스터들을 회유하거나 방어하는데 도옴이 될 거라는 거다.

던전 중 가장 수가 많은 것은 충왕류 던전이다.

일단 충왕류 하나와 동맹을 맺으면 나머지 진영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포식자와 맞서 싸울 때도 꽤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가장 좋은 건 뿔을 먹지 않고 머리에 쓰는 방법으로 계승할 수 있다는 거다.

정말, 정말 간절히 죽이지 않고 신하로 받아들이고 싶다.

제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다.

이제 뿔 그만 먹고 싶어. 제발.

아무튼 대화로 해결이 된다면 이득밖에 없는데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솔직히 나도 80% 정도는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뿔을 안 먹어도 스킬을 계승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그저 돌진할 뿐이다.

나는 마음을 굳게 다지며 인벤토리의 소통 유과를 확인했다.

이거라면 몬스터와도 대화할 수 있겠지.

내가 반쪽 먹고, 나머지 반쪽은 몬스터 입에 던져 넣어서 대화를 시도하는 거야.

“그나저나 반서진 씨는 오늘도 집에 없네요.”

- 새벽에 잠깐 와서 자고 가긴 했어.

반서진이 여기에 살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수락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약간 걱정하기도 했다.

같이 자취하던 친구들이 서로 싸우고 갈라서는 모습을 꽤 봤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이가 좋은 친구라도 막상같이 살게 되면 거의 반드시 의견 다툼을 하게 되니까.

만약 내가 반서진과 다투게 된다면 의견 다툼 수준으로 끝나지 않겠지?

이 집이 박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반서진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있더라도 마치 사춘기 청소년처럼 방문을 꼭 닫고 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두문불출하는 탓에 거주자라기보다 잠깐씩 들르는 손님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간혹 식탁 위에 못 보던 음식이 놓여 있기도 했는데, 그런 음식에는‘먹어’라는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아무튼 반서진과 함께 사는 건 나쁘지 않았다.

- 꽤 따르는데. 처음에는 싫어하지 않았던가?

“으음, 그렇긴 하지만 관계라는 게 다 그렇죠. 싫은 부분도 있고 좋은 부분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그래서 욕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엉망진창 살아가는 거잖아요.”

- 흐음.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했거든요.그냥 엉망진창 살라고. 나한테 딱 들어맞는 완벽한 사람 같은 건 없어요.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맞추고 있는 것이거나 제가 환상을 보고 있는 거라고.”

나의 단호한 말에 서지한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생긋 웃었다.

- 네가 간혹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더라도 여전히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말을 이해하자마자 목부터 얼굴로 뜨거운 기운이 치밀었다.

보나 마나 벌겋게 되어 있을 얼굴을 가리며 나는 태연한 척하려고 노력했다.

“가, 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

- 왜 그래?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

“갑자기 사, 사, 아무튼 그런 말이 여기서 왜 나와요?”

- 그냥 사실대로 말한 건데.

안 된다.

서지한이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어서 체온이 점점 오르기만 했다.

이렇게 계속 마주 보고 있는 건 내 체온조절에 역효과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장난 그만 하고 가죠!”

가기 전에 다 먹은 시리얼 그릇을 주방에 치워둬야겠다.

겸사겸사 세수도 좀 해서 얼굴에 열도 식히고…….

거기까지 생각하며 주방으로 향한 나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계속 해.”

한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린 반서진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충격에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그적 막 사이로 반서진이 물을 후르록거리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어, 언제부터 있었어요?”

“반서진 씨는 오늘도 집에 없네요.라고 할 때?”

“다 들었어요?”

반서진은 대답 대신 다시 물을 호로록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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