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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3/231)

113화

단순히 반서후와 사이 나쁜 남매지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인 듯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으세요?”

“딱 세 마디만 할게. 집성촌.”

그리고 반서진은 자신의 현란한 닭 볏 머리를 가리켰다.

“명절. 의절.”

명절에 저 머리로 집에 내려갔다가 의절당했다는 의미 같다.

자세한 말을 듣지 않아도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꽤 고지식하게 보이는 반서후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도 알겠다.

“그리고 얘는 장남이야. 얘랑 결혼하면 1년에 제사를 200개 정도 지내야 해. 무임금으로 한정식 집에서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반서후에게 별다른 연애 감정은 없지만 나는 그가 조금 싫어졌다.

이것은 본능에 각인된 생리적인 거부감이다.

그 기회를 틈타 눈치 빠르게 서지한이 끼어들었다.

- 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가족 없어.

그는 몹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서지한의 가족은 왜 없는 거지?

묻고 싶긴 하지만 워낙 예민한 화제라 차마 못 물어보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들을 수 있겠지.

"반서진."

이 모든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던 반서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분노가 감도는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으나 반서진은 꿋꿋했다.

“밴셰젠〜”

“그만 해.”

“개맨해〜”

무언가 더 말하려던 반서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아래턱이 바르르 떨린다.

반면 반서진은 히죽거리며 그를 놀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걸 보니 알겠다.

두 사람은 남매다. 확실하게 남매가 맞다.

“내가 사과할게, 손모아. 이 나이 먹고도 목소리만 깔면 멋있고 무서운 줄 아는 오빠를 둔 내가 사과를 해야지. 정말 힘들다. 후.”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반서진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로 나 여기 살아도 돼?”

“예?”

“내가 갈 곳이 없거든.”

진짜로 갈 곳이 없는 건 아닐 테고.

결국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다.

내가 서울 노른자위 땅에 있는 펜트하우스로 못 돌아가는 것처럼.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동병상련의 감정이 솟는다. 그녀가 측은했다.

바로 수락하려는데 서지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 안 돼!

“반서진, 잠깐……."

반서후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하긴, 길드장까지 한 반서후이니 반서진이 지낼 만한 세이프티 하우스 한두 개 정도는 당연히 가지고 있겠지.

고지식한 그로서는 여동생이 멀쩡한 가족을 두고 생판 남의 집에 들어가는 산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거야. 대충 거점으로만 쓰겠다는 거지. 그리고 언젠가 네 가족을 여기에 대피시키면 내가 좀 지켜줄 수도 있고.”

반서후가 반대를 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로 반서진이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 모아야, 잘 생각해봐. 낯선 사람이랑 같이 지낸다는 거 진짜 불편…….

서지한은 얼마나 급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반서진 사이에 끼어들었다.

테이블이 있는데도 가리지 않고 끼어든 덕분에 서지한의 반투명한 상체가 테이블 위로 불쑥 솟았다.

나는 여전히 말을 고르고 있는 반서후를 흘긋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자신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내가 깔끔하게 수락해버리자 서지한은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반서진이 좀 과격한 면이 있긴 하지만 이번 대화로 나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크게 개선된 상태였다.

그녀가 여기에 머문다면 반서후가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주겠지.

게다가 반서진이 정말 우리 가족을 지켜준다면 그것도 큰 장점이다.

여러모로 그녀가 머무는 건 좋은 점 밖에 없는데 서지한은 왜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지?

하긴 애초에 그는 헌터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아.”

반서후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 모습에 불길함을 느낀 듯 서지한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 설마 이 새끼도 여기 산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다행히도 반서후는 여기 머물 생각이 없는지 가볍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이만 가보지. 할 일도 있고.”

“할 일?”

유은담이 의아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헌터들을 좀 만나보고 이쪽으로 돌아설 만한 사람이 있나 찾아보려고.”

좋은 생각이다.

우리는 숫자가 너무 적었다.

개개인의 전투력은 뛰어난 편이지만 앞으로 일어날 많은 일을 모두 감당하기에는 압도적으로 인원이 부족하다.

유은담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저도 사람 알아볼게요.”

다들 저마다 앞으로 할 일을 정해 공유하는 분위기다.

나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기다리면서 던전 최대한 접수하러 다닐게요.”

내 말에 일순간 분위기가 굳어졌다.

왜지?

두 남자는 순간 흠칫 굳어 나를 돌아보았다.

반서진에 이르러서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면 얘가 자연스럽게 던전 보스 혼자 잡으러 다니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네?

제가 그렇게 서지한처럼 말했나요?

아무래도 내 어조에 문제가 좀 있었던 것 같다.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전쟁이 아니라 외교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일이 틀어지면 전투를 할 수도 있다.

그 경우도 충분히 가정하고 있지.

지난 바르기스 던전 때 느낀 거지만, 공략법이 완전히 연구 완료된 보스 몬스터는 상성만 잘 맞추면 잡기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제 실체화할 수 있는 서지한도 나와 함께할 테니 보스 몬스터와 싸운다고 해도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내 목적은 전투가 아니었다.

내가 급히 오해를 정정하려 했으나 유은담과 반서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라면 뭐, 충분히 가능하죠,"

“그래, 그럼 부탁한다.”

두 남자의 담담한 반응에 반서진은 혼란에 빠졌다.

그녀가 아는 나의 전투력은 백대만과 함께 했던 시절밖에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얘가 그렇게 강해?”

반서진의 의문에 돌아온 것은 당연하다는 듯한 끄덕임이었다.

덕분에 두 남자가 떠난 후 나는 내가 얼마나 강한지 보고 싶다며 한판 싸워보자는 반서진에게 한참 시달려야 했다.

* * *

반서진을 구출한 날로부터 벌써 3일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서지한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조언에 힘입어 차근차근 던전 공략을 준비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던전으로 돌진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전투력으로 보스 몬스터를 잡는 건 무리였다.

S급 능력치 증가 포션으로 마력을 증가시킨다고 하더라도 후폭풍이 너무 거센 데다 포션의 지속시간이 너무 짧다.

한 방 정도는 날릴 수 있겠지만 그 한 방이 막히면 끝장인 것이다.

무엇보다 서지한이 극구 반대했다.

결국 나는 매일매일 S급 능력치 증가 포션의 영구 증가 옵션으로 차근차근 마력을 늘리고 있었다.

하루에 먹는 포션은 두 개까지.

세 개째를 먹으면 걸리는 포션 중독을 피하기 위해서다.

포션 하나가 영구 증가시켜주는 마력 수치는 5.

하루에 세 개의 포션을 마시면 하루 15의 마력 영구 증가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내내 포션 중독 상태에 걸려 있게 된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비할 수 없는 것이다.

두 개까지만 마시면 영구 증가시킬 수 있는 마력은 10에 그친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세 번째 S급 포션을 일시 증가용으로 마심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여담으로.

‘비륵 10밖에 못 올리지만 꾸준히 챙겨 먹어야겠어요’라고 말했더니 서지한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 비록……?

그리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하더니 간신히 상냥한 표정을 만든 다음 나에게 진지하게 질문했다.

‘지금 본인이 무슨 말하는지 알고 있어?’라고.

파르르 떨리는 서지한의 입술에 나는 바로 내 말실수를 반성했다.

하루에 10씩 늘어나는 마력 능력치.

포션 중독이 끝난 지난 이틀간 나는 총 네 병의 포션을 마시고 20만큼 마력을 증가시켰다.

키르기스의 뿔에서 얻은 마력 25, 거기에 독도에 가기 전 마셨던 마력 포션 세 병으로 올린 15와 합쳐서 현재 내 기본 마력 능력치는 60이다.

거기에 월장석 팔찌의 20을 합하면 80이지.

지금은 100도 안 되는 마력 수치지만 이대로 한 달만 꾸준히 먹으면 마력 능력치가 300이 더 늘어난다.

물론, 한계치 운운하는 옵션이 붙어 있는 걸 보면 포션으로 증가시킬 수 있는 수치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파격적이었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시간뿐이다.

솔직히, 무슨 훈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이렇게 쉽게 강해져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서지한은 그런 내 의문을 일축했다.

- 다른 각성자는 어디서 몇 년간 수행하고 강해졌나? 결국 다 운이야.즐겨.

맞아.

그건 그래.

누군가는 충분한 노력을 쏟는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충분히 노력할 환경이 되느냐는 운이 결정한다.

“맞아요. 운이 좋았죠.”

- 그래. 운이 좋았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무슨 뜻이죠?”

- 기회는 운이 결정하지만 그 이후는 다르지.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서지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 너와 같이 바르기스 던전 공략에 나섰던 그 얼간이들. 네가 그 얼간이들 같았으면 내가 너에게 조언해줬을까?

서지한은 혼자 고개를 짧게 저어 부정했다.

- 아니, 그놈들이었으면 애초에 내 시신을 장례 치러준다고 줍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제 능력을 과시하면서 무모하게 두 번째 던전에 뛰어들었다가 죽어나갔을 걸.

아니면 채집 노예로 잡혀갔거나.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 나는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신중함이 얻어낸 성과라고 생각해.뭐, 네가 그런 성격이 된 것도 운이 만들어준 환경 덕분이라고 말하면 할 말 없다만.

그렇게 말하는 서지한은 무척 부드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북돋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고맙게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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