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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2/231)

112화

그런가?

내가 이 자리에서 가장 리더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뭔가 속아 넘어가는 느낌도 드는데 반서진이 워낙 확고하게 말하니 모두 타당한 것처럼 들린다.

심지어 한쪽에 앉아 있던 서지한까지 ‘그렇고말고’ 하며 맞장구치고 있었다.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눈치 빠르게 반서진이 결정타를 날렸다.

“백대만이 리더였던 시절을 생각해봐. 네가 계속 빼면 그런 놈이 리더가 되어버린다니까? 그러고 싶어?”

“아뇨. 절대, 절대 싫어요.”

이걸 왜 잊고 있었지.

백대만과 던전을 공략하던 시절은 정말 끔찍했다.

그래, 반서진의 말이 다 맞다.

내가 최고의 리더는 아니다.

하지만 최악도 아니라고 자신한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누가 결정을 할지 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건 옳지 않지.

어차피 내가 말한다고 해도 이 사람들이 그대로 다 따라주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볼까.

“생각해둔 건 있긴 하는데, 일단은 대화를 시도해보죠.”

“대화?”

“흠.”

유은담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고 온건한 방식을 선호하는 반서후는 일단 들어보겠다는 태도다.

“어차피 지구 망하면 대한 길드고 뭐고 다 망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현재 상황을 공유하고 협조 요청을 하죠. 던전 같이 공략하자고.”

“안 믿어줄 것 같은데요……."

유은담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몬스터들이 막 뛰쳐나오면 우리말을 안 믿을 수 없지 않을까?

걔들도 죽기 싫으면 협조하지 않을까?

“그래도 말은 해봐야죠. 아예 말해보지도 않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돼요. 그리고 대한 길드에만 말하는 게 아니라, 다른 해외 길드나 헌터 업계에도 이야기하고요.”

“으음. 대답 기다리다가 던전 다 터지겠는데요.”

“물론 마냥 기다리겠다는 건 아니고, 동시에 던전 공략도 할 거예요.어차피 대답이 돌아오든 안 오든 던전은 공략해야 하니까요.”

대한 길드에 이런저런 악감정이 많을 유은담은 아무래도 그들을 배제하고 싶은 기색이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모아서 최대한 빨리 많은 던전을 닫아야 한다.

“문제는, 던전을 몇 개 못 닫은 상태에서 던전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경우인데.”

“방어전선 구축이 필요하겠군. 그 엘파니스 말로는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었어. 설령 던전을 많이 닫는다고 해도 이후에 몬스터들이 도시를 습격하는 상황까지 대비할 필요가 있고.”

“맞아요. 그래서 다른 길드와 단체에도 상황 공유를 하려는 거예요.”

반서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유은담이 끼어들었다.

“최대한 몬스터가 밖으로 나오기 전에 상황을 종료시키는 게 좋아요.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이제 저쪽 페이스에 우리가 맞춰야 하니까. 예전처럼 다 준비해서 우리 컨디션이 좋을 때 던전에 드나드는 식은 불가능해지는 거니.”

“그렇지. 약한 헌터도, 다친 헌터도 싸워야 할 테고 민간인 보호까지 하면서 싸우려면 더 많은 물자가 필요할 텐데.”

유은담의 말에 반서진이 맞장구친다.

가만히 생각하던 반서후도 뒤늦게 끄덕였다.

“무슨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역시 보급이 제일 중요하니까.”

보급.

그거라면 나름대로 해결방안이 있다.

서지한이 나에게 능구렁이 같이 웃어 보였다.

- 보급이면 모아 특기 분야지.

안 그래도 슬슬 보여주려고 했다.

나는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내 말에 의아한 얼굴로 따라 일어선 세 사람을 이끌고 나는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방 안을 확인한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뭐예요, 저거?”

잠시 후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듯 유은담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담담하게 방 안에 있는 인물의 정체를 소개했다.

“앞으로 소비 아이템 공급을 담당할 김영길의 사념체입니다.”

꾸물 거리며 포션을 말고 있던 김영길이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 일렁거렸다.

“김영길? 진짜?”

반서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리고.

“푸하하핫, 저게 김영길? 꼴좋다!”

폭소가 터져 나왔다.

“김영길 헌터라고요?”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며 깔깔 웃는 반서진과 달리 유은담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네. 영혼은 아니고, 그냥 남은 사념체예요.”

“사념체.”

유은담은 시선을 김영길에 고정한 채 멍하니 내 말을 따라 했다.

아무래도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지한 씨가 김영길 헌터를 살해했다고 누명 쓴 상태인 거 기억해요?”

“아, 네.”

사념체를 바라보던 유은담이 얼떨떨하게 나를 응시했다.

잠깐.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영안실에서 히든 스킬로 채집했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때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이렇게 됐어요.”

결국 얼버무리기로 했다.

하지만 너무 얼버무렸는지 유은담은 도리어 의문이 증폭된 표정이었다.

“어떻게 알아봐야 이렇게 되는 거죠?”

“음. 어쩌다가 보니……."

유은담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내가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눈치챈 것 같다.

그는 더 묻지 않기로 했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틈에 반서후가 말문을 열었다.

“이게 소비 아이템 공급을 담당할 거라고 했지?”

“네,

“그 말은, 김영길의 생전 스킬을 다 쓸 수 있다는 건가?”

“네. 지금도 계속 포션 만들고 있어요.”

내 말에 반서후는 침묵했다.

그리고 몹시 불합리한 것을 보는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딘가 억울함까지 느껴지는 시선이다.

이 시선, 뭔가 익숙한데.

예전 내가 수천 장의 가르니드 잎사귀를 채집했을 때 서지한이 나를 보던 눈이군.

“아, 그래도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니에요. 제가 채집한 아이템만 재료로 쓸 수 있거든요.”

“아니, 대단한데요, 누나……."

유은담이 ‘이 사람 진심인가?’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반서진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진지하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 반서후뿐이었다.

“김영길의 제작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래도 개인이야. 그걸로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은 한계가 있겠지.”

“그렇긴 해요. 밤낮없이 계속 만들고 있긴 하는데……."

반서후의 의견에 동의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이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밤낮없이 만든다고요?”

유은담이 질문했다.

“네, 사념체니까 잘 필요도 없고 먹을 필요도 없잖아요.”

당연한 사실을 대답해주었더니 이번에는 반서진이 몹시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포션 노예 아냐. 김영길에게 어울리는 엔딩이군.”

다들 호의적인 분위기라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티 나지 않게 유은담의 기분을 살폈다.

사실 김영길을 보여주며 가장 걱정한 부분은 유은담이었다.

그가 김영길을 싫어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유은담의 암현 길드 소속 제작계 헌터였다.

그냥 일반 제작계 헌터도 아니고 간부급 제작계 헌터다.

같은 길드 출신의, 그것도 꽤 오래 알고 지낸 헌터가 내 아래에서 부려 먹히고 있는 걸 알게 되면 그가 좀 불편해할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유은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밤낮없이 부려먹을 수 있다는 점이 반가운 눈치였다.

우리는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음, 그럼 정리할게요. 일단 저쪽이랑 대화도 해보고, 동시에 던전 공략도 진행하는데, 만약 그전에 던전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오면 우리는 포션 보급하면서 다른 헌터들과 협조해서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 이게 제가 생각하는 최선이에요.”

내가 말을 마치자 반서후는 미간에 주름까지 잡으며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의견이 적절한지 검토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혹여 내가 무모한 선택을 하더라도 반서후가 브레이크를 잡아줄 것 같았다.

물론 퇴짜 맞을까 봐 약간 긴장되긴 하지만, 안전장치가 없는 것보다 낫다.

반면 유은담은 그를 흘깃 쳐다보더니 나에게 질문했다.

“누나 가족은 언제 데려올 거예요?”

이 부분은 사실 나도 고민이었다.

가족을 엘파니스가 있는 던전에 둘지, 아니면 여기에 들지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게다가 대피시킨다면 어느 정도 범위로 해야 할지도 의문이다.

엄마와 승주는 당연히 대피시킨다고 해도, 친척들과 친척의 가족들, 그 가족들의 가족들은…….

엄마만 해도 내가 대피하라고 말했는데도 주변 사람들을 챙기겠다며 피난을 미루지 않았던가.

일이 쉽게 돌아가지만은 않을 것 같다.

간혹 명절마다 만나던 고집불통 친척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한국에 있는 던전을 다 닫아버리면 대피할 필요도 없을 테니 그게 제일 나은 방법이 아닐까?

“나름대로 가족들에게 설명은 했으니 위험해지면 일단 이곳으로 피할 거예요.”

“그러면 누나는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대화도 우리가 할게요. 괜히 저쪽에서 누나 가족 건드릴 수 있으니까.”

조금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조차도 가족들이 대한 길드에게 해를 입을 거라는 부분은 놓치고 있었다.

던전 몬스터와 포식자라는 거대한 화제 앞에서 대한 길드의 존재감이 너무 미미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개인사를 챙기는 말을 하는 것도 좀 힘들다.

그런 내 사정을 간파하고 먼저 말해준 것도 고마웠다.

그 심정이 얼굴로 드러났는지 그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누나는 가족들이 제일 걱정이잖아요.”

유은담은 던전에서 함께 탈출한 후 내가 얼마나 가족을 걱정하는지 봤었지.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감동적이다.

“고마워요. 그런데 유은담 씨 가족은……."

“그냥 은담이라고 불러 달라니까요. 저는 가족 없어요. 보육원 출신이라.”

갑작스러운 무거운 화제에게 대답할 말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데 정작 유은담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홀가분한 자유인이죠.”

“요즘 같은 세상에선 일등 신랑감이네.”

조용히 앉아 있던 반서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피식 웃더니 짧게 덧붙였다.

“시가 없고, 어리고, 얼굴 좋고, 각성자고. 최고 아냐?”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유은담이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반서진은 별 배은망덕한 것을 다 보겠다는 듯 유은담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칭찬해주고 답례로 개소리를 듣네.”

날카로운 말에 유은담은 대번에 머쓱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유은담은 그렇다 쳐도 반서진과 반서후는 괜찮은 걸까?

“반서진 씨네 가족은 괜찮아요?”

내 말에 반서진은 살랑살랑 가벼운 태도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알아서 잘 살지 않을까?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얼굴 안 본 지 벌써 10년도 넘었고.”

10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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