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모아야, 잘 먹었어. 시간이 얼마 없어서 좀 급하게 먹긴 했는데. 넌 천천히 먹어. 체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서지한이 방긋 웃어 보였다.
달아오른 뺨과 물기 맺힌 눈가에 역시 좀 매웠던 게 맞는 것 같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먹어줘서 약간 감동했다.
“시간이 없다니?”
반서진이 끼어들어 묻는 것과 동시에 서지한의 몸이 천천히 흐려졌다.
실체화 시간이 끝난 것이다.
“뭐, 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좀 괴이한 광경이었겠지.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순식간에 몇 걸음 물러났다.
음, 슬슬 설명을 해줄 때가 되었구나.
나는 밥을 마저 먹으면서 천천히 그간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그녀가 던전을 나간 후 내가 유은담을 구한 것.
그리고 동해에 있는 인왕 던전에 갔던 것.
그곳에서 엘파니스가 해 준 포식자에 관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곧 던전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올 거라는 이야기까지.
중간중간 반서후와 유은담이 끼어들어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대한 길드에서 일을 어떻게 꾸미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언론 플레이가 이뤄졌는지.
그리고 천공과 암현 길드가 유은담과 반서후의 손을 떠나 대한 길드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는 것까지 말해주었다.
거기에 겸사겸사 서지한이 유령인 것도 말해줬다.
“그 서지한이 죽었다고?”
“네.”
나의 반응이 너무 담담했는지 반서진은 황당한 얼굴로 눈을 끔백거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 벌써 두 번째라고.
말하자면 그녀의 반응은 나에게 있어서 이미 뒷북이다.
“그리고 던전이 자기 세계가 멸망한 놈들이 여기로 도망쳐 온 피난처란 말이지?”
“네."
“곧 그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밖으로 다 뛰쳐나온다고?”
“네. 민간인 피해를 최대한 막을 생각이에요.”
반서진의 표정은 갈수록 괴상해졌다.
"그, 그래. 그건 좋긴 하는데, 문제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죠.”
“개네 세상을 멸망시킨 엄청 센 놈이 여기에도 찾아와서 이 세계도 멸망시킬 거라고?”
“네.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노력해야죠.”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꽤 혼란스러울 텐데 의외로 중요한 부분은 다 이해하고 있군.
이해력이 좋은 편이다.
반서진은 한참 동안 경악에 빠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어의 첫 부분만 몇 번이나 빠끔 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왁 소리쳤다.
“너는 왜 그렇게 침착해?”
“저도 처음에는 놀랐는데, 꽤 지난 일이라……."
반서진은 잠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납득했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그, 그렇구나……."
“오히려 이렇게까지 놀라실 줄 몰랐어요.”
“아니, 한참 갇혀 있다가 겨우 밖으로 나왔더니 세계 멸망이 초읽기라는데 안 놀랄 수가 없지……."
“저도요. 기껏 헌터 되어서 편하게 사나 했는데.”
반서진의 반응을 보니 엄마에게 포식자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성자도 이렇게 놀라는데 민간인에게는 얼마나 청천벽력처럼 느껴지겠어?
“그렇군, 그러면 서지한은 지금 유령인 상태로 너와 같이 있다는 거지?”
“네.”
반서진은 혼자서 ‘그렇구나, 그래서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혼자 이것저것 납득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크게 숨을 내쉬더니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 의외로 정상이었구나.”
의외로? 무슨 뜻이지?
떨떠름해지는 얼굴을 수습하려는데 반서진이 갑자기 파하핫, 하고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상상 속의 친구. 그거 서지한이었구먼?”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반서진의 앞에서 서지한과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걸 말하는 거였다.
“맞아요.”
“그래, 서지한이 내내 옆에 같이 있었단 말이지……."
“아, 그렇다고 해도 ‘여자들끼리의 비밀’은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반서진은 자신의 염동력 스킬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그녀는 평범한 근접계 헌터로 알려져 있다.
왜 숨기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스킬을 숨기고 있는 입장이라 그녀가 이해는 간다.
반서후는 가족이라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은담은 남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서지한이 알고 있다는 건 그녀에게 불쾌한 일일 것이다.
꽤 기분 상한 내색을 할 줄 알았는데 반서진은 생각지도 못 한 말을 들었다는 듯 조금 놀라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반서후, 그리고 유은담에게 잠시 머무르더니 곧 나에게 돌아왔다.
“그래, 고맙다. 내가 사람을 잘 봤네.”
피식 가볍게 웃은 반서진이 테이블 위로 바짝 붙어 앉더니 깍지 낀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이전의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모두 던져버리고 어느새 한껏 진지함을 두른 태도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네?”
예상치 못 한 질문에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보다, 무슨 뜻이지?
‘이제 저녁을 먹었으니 후식은 뭐야?’인가?
아니면 ‘앞으로 너 헌터 생활 어떻게 할 거야?’ 같은 장래 희망적인 의미?
“뭘 맹한 표정이야. 지금까지 실컷 떠들어댄 그 골칫거리들, 어떻게 처리할 거야?”
처리요? 제가요?
제가 처리해야 하나요?
그보다 ‘아 그랬구나. 나는 이만 가볼게. 잘 있어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적극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파격적인 외모에 비해 그녀는 비교적 상식적인 사람이었지.
“어떻게 할지 네가 선택해야지.”
여기에는 그녀의 친오빠이자 천공 길드 길드장까지 지낸 반서후.
그리고 한국 최고의 마력계 전투 헌터 유은담.
비록 그녀는 볼 수 없지만 유령상태로 서 있는 랭킹 1위 서지한까지 있다.
이런 쟁쟁한 사람들을 모두 제쳐놓고 나에게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선택하라고?
“그거, 제가 결정할 게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아니면 누가 해?”
“네?”
“아까 말했잖아. 그 엘파니스인가 하는 던전 할아버지가 너보고 왕이라고 했다며. 이미 신하도 있으면서?”
서지한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면서 실체화와 신하에 대한 이야기도 했었지.
그보다 엘파니스를 던전 할아버지라고…….
“그렇다고 저 같은 사람이……."
“네가 아니면 누가 하는데? 그리고 너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조심성 많고 상식적이고 착한 사람?”
갑자기 쏟아지는 노골적인 칭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칭찬을 마치 욕처럼 해서 조금 헷갈리지만.
“이런 거에 익숙하고 더 잘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반서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더니 삐뚜름하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세계 멸망 경력자라도 구하게? 요즘은 별걸 다 경력자로 구하네. 여기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예전에 세계 멸망 경험해보신 분? 이렇게?”
“아니, 그게 아니라……."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다.
결정을 한다는 건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런 거대한 일을 결정하기에 나는 너무 애송이였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내 두려움을 읽기라도 한 듯 반서진이 살짝 몸을 뒤로 물리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무 부담 가지지 마.”
“어떻게 부담을 안 가져요. 망하면다 제 책임인데.”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반서진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다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잘못되더라도 책임질 생각 없는 놈들이 하는 것보다 네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너무 무겁거든요.”
“어차피 망할 거 그냥 한번 해보는 거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너무 무서워할 필요 없잖아."
반서진이 내 나쁜 습관을 정확히 짚었다.
“뭐, 사실 나도 아직 세계 멸망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나긴 한다만. 너도 그렇지? 그러니까 아직 여유가 있는 거지. 어디 괜찮은 사람 있나 하고 찾아보겠다는 여유 말이야.”
모두 묵묵히 반서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지면 ‘어디 불 꺼줄 사람 없나?’ 하고 찾겠어? 바로 호수에 뛰어들겠지.”
반투명한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는 서지한조차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것도 좋긴 하는데,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너 아닌 다른 놈들 말 들을 생각 없어.”
“네?”
“반서후 저 꼰대 새끼 지시 따르느니 그냥 죽을 거고, 그렇다고 이 새파란 유은담 어린애 말을 들을 거냐? 그리고 반쪽짜리 유령 새끼 말을 들을 수도 없잖아. 저거 하루에 몇 시간이나 제대로 된 사람 될 수 있냐?”
신랄한 말에 세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은담이나 반서후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반서진은 그들의 말을 막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네가 하는 게 맞지.”
들으면서 계속 느끼고 있는 건데, 반서진은 아무래도 나를 도와줄 생각인 것 같다.
사실 그녀가 날 도와주는 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
어쩔 수 없잖아.
이 사람, 엄청나게 자유분방한 인상이었다고.
“도와주실 거예요?”
“안 돕겠다는 선택지가 있나?”
“어……."
“내가 놀라운 소식 하나 알려줄까? 나도 지구에 살고 있거든? 여기 망하면 나도 죽는다고.”
반서진이 건들거리는 태도로 턱을 추켜세웠다.
그럴 때마다 현란한 색의 머리가 흔들거린다.
갇혀 있는 동안 좀 눌린 데다 뿌리 부분은 검은 머리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강렬함만은 죽지 않았다.
“아무튼 네가 해. 이제 여기 두 사람 길드장도 뭣도 아니라며. 정말 개털이잖아. 그에 비해서 너는 뭐 왕이기도 하고, 개인 던전도 가지고 있다면서. 와, 개인 던전. 어감 죽이네.”
가벼운 어조로 빠르게 말한 반서진이 씩 웃더니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내 뺨을 가볍게 잡더니 귀여워하듯 쫀득쫀득 쪼듯이 만지작거렸다.
“자, 이제 내숭 그만 떨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해보자고요. 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