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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231)

110화

문을 열고 나가니 이쪽을 발견한 서지한이 활짝 웃었다.

“모아야!”

그가 내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날듯이 뛰어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체화 시간 쿨타임에 맞춰서 칼같이 돌아왔다.

그에게서 어슴푸레한 먼지 냄새와 불에 탄 것 같은 매캐한 냄새가 났다.

피 냄새가 안 나는 걸 보면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좋은 냄새나네.”

서지한이 나를 꽉 끌어안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몇 번 겪는 동안 적응되었는지 처음처럼 미친 듯이 심장이 뛰지는 않는다.

하지만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

"김치찌개예요. 김치찌개 좋아해요?”

김치찌개 냄새가 좋긴 하지.

게다가 꽤 배가 고플 테니까 엄청 좋은 냄새로 느껴지는 것도 이해한다.

가만, 서지한이 얼마 만에 음식을 먹는 거지?

몇 달은 가볍게 넘는다.

확실히, 이렇게 감격할 만하네.

“네가 한 거라면 뭐든 좋아해.”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달콤하게 들려서 그만 바짝 긴장해버렸다.

등줄기가 굳어지는 걸 느꼈는지 서지한이 가볍게 웃었다.

저기요, 사람 귀에 대고 웃지 마세요.

심장 된다고요.

으아, 서지한이 별생각 없이 하는 말에 휘둘리면 안 돼.

정신 차려, 손모아!

서지한은 김치찌개가 엄청나게 먹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제발 심장아, 그만 좀 멈춰!

아니, 그러면 죽잖아?

적당히 뛰어!

동요를 감추기 위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유은담과 반서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발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누구지?

가까이 가서 봐도 정체를 알 수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커다란 천 포대에 싸여 있는데, 그 포대를 새하얀 사슬이 둘둘 감고 있었다.

이 사슬은 예전에 본 적 있다.

유은담이 갇혀 있을 때 이런 거에 묶여 있었지.

"누구에요?"

"반서진."

서지한이 즉답했다.

기대 이상의 수확이었다.

수감 정보가 적힌 문서나 들고 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반서진을 단숨에 구해온 것이다.

“어떻게?”

“음, 실체화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디든 통과할 수 있으니까 건물 전체를 한번 훌어봤거든.”

“아.”

“나도 놀랐어. 설마 던전 관리청 지하에 그런 감옥이 은폐되어 있었다니.”

던전 관리청은 공공기관인 만큼 수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개중에는 헌터도 있지만, 그곳은 일반인들도 일상적으로 방문하는 곳이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견학을 가기도 했다.

지하에 감옥이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음, 헌터 범죄자는 각성자 수용소에 수감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던전 관리청에서도 그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나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슬쩍 물었더니 서지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시 한복판에 흉악한 각성자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걸 사람들이 허락할 거라고 생각해? 당연히 각성자 수용소는 무인도에 만드는 게 일반적이지. 위치는 비밀이고.”

“그럼 역시 던전 관리청 지하에 있는 감옥이라는 건 좀 구린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죠?”

“수상하지.”

그쯤에서 유은담이 우리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누나, 도와줘요. 이러다가 물리겠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고 납득했다.

반서진은 흰 천에 꽁꽁 싸여 밖을 확인할 수 없고, 혼자서 일어설 수도 없는 상태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 상태로 방치하는 건 아무래도 보기 안 좋아서 반서후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손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반서진의 사나운 거부가 돌아온 것이다.

반서후가 쩔쩔매는 모습에 유은담은 재밌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천포대기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까지 들린다.

진짜 동물이 된 건 아니고 입이 막혀 있어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겠지.

일단 이쪽이 누구인지 확인시켜주는 게 우선이다.

우리 말소리를 듣고도 이런 반응이라면 귀도 막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난감한데. 서지한, 열쇠는?”

“못 찾았는데.”

반서후의 말에 서지한이 건성건성 대답을 던졌다.

반서후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반면 서지한처럼 내가 사슬을 부술 수 있다는 걸 아는 유은담은 여유로운 태도였다.

여기서 초조해하는 사람은 반서후 하나뿐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예전 유은담의 사슬을 부쉈던 요령으로 충왕포를 사용했다.

어차피 이 스킬 S급인 거 이미 다 들통 났는데 뭐 어때.

역시나 반서후가 S급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하려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슬이 끊어지자 포대 안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잘 벼린 칼날 같은 살기는 천을 벗겨내고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된 시점에서 최고조에 올랐다.

이어서 눈가리개를 떼어내자 사나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시선은 내 어깨 뒤에 서 있는 서지한을 보고 쨍하니 날카로워졌다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확 풀어졌다.

이 시점에서 살기는 이제 온데간데없어졌다.

반서진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순수한 의문뿐이었다.

그 시선이 나와 서지한, 유은담과 반서후를 차례차례 확인하는 것을 보며 나는 한껏 밝게 웃어주었다.

“고생하셨어요.”

* * *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잘 끓인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모두 둘러앉았다.

반서진은 구속구가 풀린 손목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내내 묶여 있었는지 손목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거 드세요.”

A급 힐링 포션 하나를 꺼내 건네자 반서진이 당황하며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포션의 등급을 확인한 눈이 놀라움에 물들었다.

받은 것을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반서진은 질문부터 던졌다.

“너네 아는 사이였어?”

표정만 봐도 반서진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상상이 지나가고 있는지 알겠다.

놀라움, 황당함 외에도 명백한 경계와 의심이 담겨 있는 눈이었다.

질문 안에는 ‘너 저 셋이랑 알고 지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를 속였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거기에 추가로 ‘무슨 목적으로 나를 속였지?’ 같은 것도 어렴풋이 엿보인다.

나는 그녀의 머릿속이 완전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질주하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이예요.”

자세한 설명이 없어 그런지 반서진은 좀 떨떠름한 얼굴로 수긍했다.

오랜만에 본 반서진의 얼굴은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볼이 홀쭉한 데다 눈 밑이 거뭇했다. 그것만 봐도 그녀가 갇혀 있는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겠다.

그걸 생각하면 이런 날카로운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몰골이 안쓰러웠는지 반서후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반서진은 노골적으로 그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남매간에 우애가 별로 깊어 보이지는 않는군.

반서후가 어떻게든 그녀를 구하려고 한 것에 비해 반서진은 반서후를 무척 싫어하는 것 같다.

뭐, 둘이서 헌터 활동을 같이 하지 않은 것만 봐도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이다.

남의 가족관계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일단 식기 전에 식사하시죠. 먹으면서 이야기해드릴게요.”

반서진은 뭔가 더 묻고 싶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막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앞에 두니 낯빛이 바뀌었다.

대놓고 군침을 삼키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약간 웃었다.

반서진도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은 지 꽤 된 것이다.

“맛있게 드세요.”

인사를 주고받으며 나는 티 나지 않게 서지한을 살폈다.

실체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모처럼 만든 음식이니 되도록 느긋하게 즐겼으면 좋겠는데.

사실 할 말이 많은데도 모두 끊고 식사를 서두른 건 전부 서지한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과연 오랜만에 먹는 밥이 무척 반가운지 그 답지 않게 행복한 감정이 얼굴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적당히 찌개를 덜어서 밥에 올리고 한입 먹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담담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큽."

"윽."

유은담과 반서후 두 사람에게서 기묘한 반응이 돌아왔다.

둘 다 갑자기 짧게 기침을 하더니 곧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반면 반서진은 좀 놀라긴 했지만 담담했다.

오히려 기침하는 두 남자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왜 저러지?

급히 한입 먹어봤지만 김치찌개는 별 문제가 없었다.

“누, 누나. 이거 맛봤어요?”

눈에 눈물까지 고인 유은담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당연히 보긴 했는데, 왜 그래요?”

“너무 맵지 않아요?”

매운가? 잘 모르겠다.

나는 매운 걸 좋아하는 편이고 우리 가족들도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원래 김치찌개는 원래 좀 매운 게 맛있잖아.

“이런, 매운 거 못 먹는 줄은 몰랐어요.”

“아니, 저도 어느 정도는 먹는데 이건……."

“맛있기만 하는데?”

얼굴이 약간 달아오른 서지한이 유은담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그는 내가 담아준 찌개를 벌써 절반이나 비운 상태였다.

“형? 괜찮아? 형도 매운……."

“맛있는데?”

“땀이 엄청……."

“적당히 매콤해서 맛있어.”

“형, 눈물이……."

“진짜 맛있다. 모아 요리 잘하는구나.”

유은담이 뭔가 말하려고 할 때마다 서지한이 또박또박 내 요리를 칭찬했다.

사실 너무 매우면 다시 끓여줄까 하고 말해보긴 했는데, 이것도 서지한의 압박으로 무산되었다.

“열심히 만들어준 식사를 앞에 두고 밥투정이나 하고 있냐? 유은담, 한심한 놈.”

결국 최종적으로 유은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찌개를 무슨 간장처럼 아주 조금만 밥에 묻혀 먹는 식으로 먹고 있긴 했지만.

“저건 안 되겠다.”

“그러게. 이미 갔네, 갔어.”

구석에서 반서후 반서진 남매가 뭔가 소곤거렸다.

둘이 사이가 나빠 보였는데 지금은 꽤 괜찮아진 것 같다.

역시 밥을 같이 먹는 건 관계를 좋게 만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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