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S급 능력치 향상 포션.
후폭풍이 거세긴 하지만 그 아이템이라면 어떤 위기가 와도 그럭저럭 넘길 수 있겠지.
나름대로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이었는데 서지한의 얼굴은 더욱 가라앉았다.
- 그건 절대 쓰지 마. 지금처럼 상태가 안 좋을 때 쓰면 이전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를 테니까. 절대, 절대 안 돼. 알았지?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역시 불안한지 몇 번이나 나에게 다짐을 강요하더니 슬쩍 반서후를 노려보았다.
‘저놈만 아니었어도’라는 혼잣말이 작게 들렸다.
- 정말 괜찮겠어?
나는 진짜 괜찮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서지한은 괜찮지 않은 것 같다.
“물론이죠.”
- 어디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 꼭 있어. 호숫가에 혼자 들어가서 물에 빠지거나, 혼자 던전에 가거나, S급 포션 능력치 궁금하다고 마구 마시거나, 모닥불 피우거나 하면 안 돼.
서지한 씨, 숨 좀 쉬면서 말해요.
그의 눈에 나는 대체 어떻게 비치고 있는 걸까?
- 그리고 수상한 사람이 오면 숨어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절대 혼자 싸우면 안 돼.
뒤로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 같이 가자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듣다가 손바닥으로 그 입을 막았다.
내버려 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물론 이런다고 물리적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만하라는 신호는 되었는지 잔소리가 뚝 멈췄다.
“저 어린애 아니거든요. 진짜.”
- ……그렇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한 서지한은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천천히 실체화했다.
강렬하게 피어나는 존재감.
다시 봐도 실체화한 서지한의 위압감은 정말 대단하다.
“받아요. 실체화했을 때는 인벤토리 쓸 수 있다고 했죠?”
나는 보관하고 있던 그의 장비 아이템을 모두 넘겨주었다.
가지고 있던 능력치 향상 포션도 종류별로 주었다.
마지막으로 묵시의 청금석 반지를 빼서 주렸는데 그가 내 손을 잡더니 반지를 도로 끼워주었다.
“이건 가지고 있어.”
나직하게 울리는 음성.
그의 목소리가 닿는 귓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영혼 상태로 대화를 나눌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실체화한 서지한은 정말 여러 의미로 강렬했다.
“힘 능력치도 없는 제가 쓰는 것보다……."
“너 가지라고 준 거잖아. 끼고 있어.”
묵시의 청금석 반지는 내가 끼면 겨우 힘을 10 증가시켜줄 뿐이지만 서지한이 끼면 힘을 두 배로 증가시켜준다.
서지한이 가지는 게 효율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서지한은 완고했다.
“알았어요.”
반지를 꽉 잡고 빼지 못하게 하니 나로서는 방법이 없다.
그는 살짝 웃더니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할 사람을 기억하려는 듯이.
“아, 해 지겠네.”
“서지한, 그만하고 빨리 출발 해.”
우우 야유하는 유은담과 반서후의 재촉에 서지한이 다시 두 사람을 노려보더니 내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살짝 잡아당겨 품에 꽉 안더니 작게 속삭였다.
“다녀올게.”
등 뒤로 둘러진 서지한의 팔이 작게 움직인다 싶더니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동 스크롤을 쓴 것이다.
“기껏 기다렸더니. 형 진짜 너무하네.”
“하, 저놈이 저렇지. 한두 번이냐.따라가자.”
남겨진 유은담과 반서후가 투덜거리며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세 사람이 던전 관리청으로 완전히 떠난 후 나는 뒤늦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싸 쥐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진짜 뭐야.
서지한의 스킨십은 대부분 별 생각 없이 행하는 것이다.
머리는 그걸 알고 있는데 내 심장은 모르는 것 같다.
결국 쓸데없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호수를 내다보며 머리를 식혀야 했다.
* * *
그러고 보면 이렇게까지 완전히 혼자가 된 건 꽤 오랜만이다.
서지한과 만나기 전에는 퇴근 후를 혼자 있었지.
그가 떠난 지 1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다.
나도 참, 서지한에게 뭐라고 할 만한 입장이 아닌가.
어쨌든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으니 유용하게 써야겠지.
나는 우선 엄마에게 소통 유과로 연락해 조만간 아주 위험한 일이 생길 테니 호숫가로 대피할 것을 권했다.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던전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나 포식자에 관한 내용은 각성자인 나조차도 앞이 막막해지는 이야기였다.
각성자가 아닌 엄마가 알면 괜히 더 충격받을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올 거라는 것 정도는 이야기해두었다.
그래야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엄마가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본인의 지인을 챙겨 피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는 어렵게 승낙했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마음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평화로운 상태니까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게다가 몬스터가 던전에서 기어 나올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 주변에는 던전 관리청이 만든 보안 시설이 있다.
던전에서 몬스터가 나올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바로 사람이 사는 구역에 침입하지는 못할 거다.
던전 보안시설에서 일차적으로 그들을 막는 동안 적어도 민간인들을 대피시킬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반서진의 구출이 끝나면 남은 과제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던전을 닫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이 사실을 널리 알려서 다른 길드나 헌터들도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가장 희망적인 방향은 사람들이 우리말을 믿고 일심 단결하여 서둘러 던전 보스를 공략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이뤄질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령 들어준다고 해도 결국 던전 공략은 해야 한다.
앞으로 있을 많은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나는 마켓을 열었다.
탈출석이나 포션 같은 소비 아이템은 김영길의 사념체가 만들어준다고 해도 공격력 증가 스크롤 같은 아이템은 그가 만들 수 없으니 구입해 둘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내가 쓸 만한 장비 아이템이 올라와 있는지도 확인하고.
“뭐야. 왜 이렇게 비싸?”
별생각 없이 아이템을 훑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아이템이 원래 시세의 다섯 배까지 올라 있는 게 아닌가.
던전 아이템이 비싼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 가격은 비정상적이다.
게다가 10억 남짓한 가격에 팔리던 B급 힐링 포션은 매물조차 없었다.
판매되고 있는 아이템은 대부분 D급 이하였다.
이러면 몬스터들이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다른 헌터들이 제대로 싸울 수 없을 텐데.
적어도 힐링 포션이라도 저렴해야 한다.
안 그러면 부상이 곧 죽음으로 이어질 테니까.
마켓을 좀 더 둘러보니 C급 힐링 포션이나 B급 힐링 포션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이런 소비 아이템을 일일이 구매 등록하고 누군가가 팔아주기를 기다리는 일은 예전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다.
워낙 아이템이 비싸고 공급이 적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일단 가지고 있던 B급 포션을 모두 판매했다.
어차피 김영길의 사념체 덕분에 그가 만든 A급 포션이 잔뜩 있었다.
덕분에 B급 힐링 포션이나 능력치 향상 포션을 쓸 일은 없으니 처분했다.
그나저나 포션 가격이 이렇게 올라가 있는 상태라면 쌓여 있는 재료 아이템 재고를 털어내기 딱 좋은 상황인데?
김영길은 생전에 한국 소비 아이템 공급의 한 축을 담당했을 정도로 뛰어난 제작계 헌터였다.
S급이나 A급 아이템을 만드는 것은 오래 걸렸지만 그보다 낮은 등급의 아이템은 훨씬 짧은 시간 안에만 들어낼 수 있었다.
B급 이상의 아이템을 제작하려면 같은 등급의 핵이 필요했다.
하지만 재료로 핵을 필요로 하지 않는 포션도 꽤 있었다.
특히 C급 이하의 힐링 포션은 등급 높은 가르니드 잎사귀만으로도 제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그럴 여력도 없고, 아이템 시세가 너무 떨어지거나 루터의 정체를 추적당할까 봐 포션을 대량 판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태라면 정체를 노출하지 않고도 많은 포션을 판매할 수 있었다.
나는 김영길의 사념체에게 낮은 등급 포션의 대량 생산을 지시했다.
겸사겸사 그가 지금까지 만든 S급, A급 포션들도 모두 걷어왔다.
그리고 다시 장비 아이템을 찾아 마켓을 둘러봤지만 그럴듯한 아이템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소비 아이템이 이만큼이나 씨가 말랐는데 장비 아이템은 더하겠지.
왜 이렇게 아이템이 비싸진 거지?
역시 김영길의 죽음 때문에 공급량이 줄어든 건가.
그렇다고 해도 해외에서 공급되는 아이템 물량도 있을 텐데.
뭐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나에게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니니까.
으음, 관리청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면 먹을 음식이나 좀 해둘까.
최소 6시간 후 귀환할 테니 그때쯤이면 배가 고플 거다.
서지한도 모처럼 실체화했으니 오랜만에 식사하는 걸 기뻐할 테고.
내내 얻어먹기만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만들어볼까.
저녁 메뉴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적당히 만들었다.
사 오는 것이 더 좋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던 서지한의 말이 생각나서 그냥 요리를 하기로 했다.
한창 정신없이 요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창문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여섯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들이 떠날 때까지만 해도 정오가 채 안 된 시간이었는데 벌써 하늘에 붉은빛이 슬쩍슬쩍 비친다.
마침 김을 뿜어내는 밥솥을 뒤로하고 나는 슬쩍 창가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서지한과 반서후, 유은담이 보였다.
하지만 그 발치에 꽁꽁 묶여 쓰러져 있는 사람은 뜻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