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여기까지 왔는데 계속 자리보전하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라 나는 아래로 내려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쾌활하게 웃는 유은담이 재잘재잘 말을 건넸다.
“와, 여기 진짜 좋은데요? 풍광이 끝내줘요. 어떻게 이런 데를 찾았어요? 사람도 없고, 딱 좋네. 나도 여기로 이사 올까 보다. 이사 오면 누나가 놀아줄래요?”
우리 이렇게 친했었나?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감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유은담은 나의 어색한 반응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불쑥 뭔가를 꺼내 들었다.
“아침으로 먹을까 해서 잡아 왔는데 가져오길 잘했네요. 바비큐 하기 딱 좋은 곳이네.”
유은담이 꺼내 든 것은 얼어붙은 커다란 생선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이 생겼는데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나는 생선과 유은담을 번갈아 보며 경악했다.
“잡아왔다고요?”
“말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어, 저기 바비큐 그릴이다. 딱 좋네. 금방 구워 올게요.”
“아니, 저기……."
잡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아침부터 낚시라도 했다는 건가?
내가 황당하게 보든 말든 유은담은 혼자 신나서 그릴에 불을 피웠다.
반면에 반서후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다는 듯 벤치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호수를 바라볼 뿐이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제대로 세팅된 유은담과 달리 반서후는 누가 봐도 자다가 온 것 같은 차림이었다.
한쪽 뺨이 약간 불그스름한 것이 자면서 눌린 자국이 분명했다.
그는 내가 흘끔거리는 것도 모르는지 잠이 덜 깬 얼굴로 한참 동안 호수만 바라보았다.
“으음.”
유은담이 생선을 굽는 연기가 호숫가를 맴돌았다.
그때까지도 반서후는 호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머쓱하게 그의 건너편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반서후가 나를 흘끔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지한이는 옆에 있나?”
아하.
서지한의 행방이 궁금했군.
나는 반서후의 옆자리를 턱짓했다.
“거기 앉아서 호수 보고 있어요.대화하고 싶은 거면 영혼석 꺼내 줘요?”
"아니, 괜찮아."
표정은 그게 아닌데.
서지한은 어떤가 싶어 쳐다봤더니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
으음, 아무리 봐도 서지한은 반서후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닌듯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만났을 때 친구도 다 죽었고 친한 동료도 없다고 했었지.
게다가 내가 각성자라는 걸 알자마자 무척 경계했다.
반서후를 보니까 왜 그랬는지 알겠다.
내가 자신의 영혼석으로 아이템을 만들거나 할까 봐 그랬던 거겠지.
반서후와의 어색한 시간을 견디고 있는 동안 어느새 유은담이 솜씨 좋게 생선을 통째로 구워 내려놓았다.
게다가 인벤토리에서 서너 개의 소스 통을 꺼내 놓더니 각자의 앞에 접시와 수저까지 세팅해 주었다.
“참돔이에요. 오늘 아침에 나오는 길에 보이더라고요. 바로 얼려서 잡아온 거예요. 살아 있는 상태로는인벤토리에 넣을 수가 없어서. 그래도 거의 방금 죽은 거니까 활어나 다름없어요.”
마치 출근길에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집어온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나는 한숨을 내쉬고 대충 살점을 좀 떼어 접시에 덜어왔다.
유은담은 기쁜 듯 싱글벙글 웃으며 내 컵에 음료를 따라주었다.
아니, 인벤토리에 탄산음료도 가지고 다녀?
- 먹어봐. 재 요리 괜찮게 하는 편이야. 나랑 던전 다닐 때 직접 가르쳤으니까.
그 말대로 생선은 무척 잘 구워져 있었다.
어떻게 했는지 껍질이 생선 기름에 살짝 튀겨져서 전문점에서 조리한 것 같았다.
방금 죽 한 그릇을 비웠는데도 그럭저럭 먹을 수 있을 만큼 맛있었다.
- 너 위가 멀쩡하지 않으니까 너무 많이 먹지는 마. 체한다.
서지한이 내 보호자처럼 부지런히 잔소리를 하는 동안 커다란 생선 한마리를 먹어치운 유은담이 목청을 가다둠었다.
“흠홈, 저기.”
왜 그러지?
아, 맞다.
애당초 여기로 부른 목적이 있었지.
“결계 통과 허가.”
나는 마력을 약간 모아서 엘파니스에게 배운 대로 성역 결계 통과 권한을 부여했다. 반서후에게도.
으음, 엘파니스에게도 가봐야 하는데.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니까 좀 나중에 가도 괜찮겠지.
그는 던전 안에서 사냥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게 아니라 지한이 형은 안 먹어요? 일단, 허가는 감사합니다.”
이런, 너무 넘겨짚었다.
확실히 모두가 접시를 비우고 있는 와중에 서지한은 테이블 한쪽에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는 내가 밥 먹는 걸 빤히 보고만 있는 그가 너무 어색했는데, 이제 이런 상황이 너무 익숙해져서 미처 신경을 못 썼다.
내 시선을 받은 서지한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 쿨타임 아직 안 돌아왔어. 돌아왔어도 이거 먹겠다고 실체화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아직 실체화 못 한다는 거 말하지 마.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서지한의 말을 적당히 순화해서 유은담에게 전달했다.
“별로 생각 없대요.”
“그래요? 아쉽다. 누나 좀 더 먹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죽 한 그릇을 다 먹은 위장이다.
이 이상은 안 들어간다.
“배가 불러서 이만……. 그런데 반서후 헌터랑 같이 왔네요?”
천공 길드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생략된 나의 뒷말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유은담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형은 이제 못 가요. 습격 왔던 놈들이 전부 형 스킬 봤을 텐데 어떻게 가요. 저쪽으로 가면 우리한테 붙었다고 생각해서 바로 쓱싹 당할 텐데. 그래서 우리랑 계속 함께하게 됐죠, 뭐. 잘됐죠?”
아, 그러네.
반서후가 뒤통수 칠 일이 없어져서 좋긴 하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반서후가 모래라도 씹은 얼굴로 유은담을 쏘아보았기 때문이다.
혹시, 습격자들을 예상하고 일부러 반서후를 끌어들인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내가 아니었으면 본인도 무사할 수없었을 텐데.
“쓸데없는 소리 다 끝났으면 본론부터 진행했으면 좋겠는데.”
반서후가 나직하게 끼어들었다.
그는 약간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하긴, 동생이 지금 인질로 붙잡혀있는 상황이니 느긋하긴 힘들겠지.
- 내일, 네 포션 중독이 끝나면 내가 실체화해서 혼자 던전 관리청으로 이동할 거야. 그리고 바로 실체화를 푼다. 그 상태로 다음 실체화가 가능할 때까지 탐색하고 나서 여기로 귀환할게.
실체화를 하지 않으면 아이템을 사용할 수도, 인벤토리도 쓸 수 없다.
사실 내가 이동 스크롤을 써서 그를 던전 관리청으로 배달시켜주면 시간을 좀 아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서지한이 결사반대했다.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내가 전달한 계획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반서후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을 열었다.
“다 좋은데, 왜 내일 시작하자는 거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포션 중독에 대한 건 아직 감추고 싶어서 일부러 그 내용만 빼버렸으니 확실히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구출작업을 끝내고 서둘러 던전을 닫으러 출발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서지한은 포션 중독 상태인 내 곁을 오랜 시간 비우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 이건 양보 못해. 적어도 네 몸이 정상이 될 때까지는 내가 언제든 실체화해서 널 지킬 수 있게 옆에 있을 거야.
단호한 서지한의 말을 들으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다행히도 반서후는 더 캐묻지 않았다.
궁금한 것 같긴 하는데 의외다.
어차피 서지한이 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이라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도와줘서 고맙다.”
무심하게 떨어지는 인사치레.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반서후는 괜히 호수를 구경하는 척하며 멀찌감치 시선을 던졌다.
그 귓불이 조금 붉어진 것을 확인하자 그에게 남아 있던 응어리 같은 것이 약간 풀어지는 듯도 싶었다.
서지한이 그가 나쁜 놈은 아니라고 했던 이유가 약간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 이제 재네 가라고 해.
하지만 미련이라곤 없는 차가운 서지한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지금요?
서지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너 쉬어야지.
아니, 이 분위기에서 그 말을 어떻게 해요.
결국 유은담과 반서후는 식후 커피까지 마신 뒤에야 할 일이 생각났다며 떠나갔다.
* * *
다음 날, 상태 이상 포션 중독이 끝났다.
하지만 신체 컨디션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다.
포션 중독이 끝나자마자 A급 힐링 포션을 마셨는데도 이 나른하고 기운 빠지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포션의 치유력에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 정말 괜찮겠어?
서지한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어요.”
- 하지만 아직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괜찮다니까요.”
- 그래도 너를 혼자 두고 가기가…….
“괜찮아요.”
떨어져 있는 시간이라곤 길어 봐야 열 시간도 안 될 텐데.
서지한은 지나칠 정도로 염려했다.
내가 무슨 3세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 좀 있는다고 큰일이 날 리가 없잖아.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안 가냐?”
신세를 지는 입장이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유은담과 반서후도 인내심의 한계가 왔는지 재촉하는 말을 꺼냈다.
두 사람은 서지한과 함께 던전 관리청으로 가기로 했다.
작전 수행 중 문제가 생길 경우 서지한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서지한은 역시 나를 홀로 남겨놓고 떠나는 건 마음에 걸린다며, 유은담이라도 내 곁에 남겨두고 싶어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적진으로 가는 건 서지한이다.
백번 생각해도 이 평화로운 호숫가에 머무를 나보다 홀로 던전 관리청으로 떠나는 서지한에게 사람을 붙여주는 게 옳다.
사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나도 그를 따라가서 돕고 싶었는데, 서지한이 그것만은 안 된다며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여기 혼자 남게 된 것이다.
-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한들 제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사람도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