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그나저나 일단 반서진 헌터 구출부터 해야겠는데, 던전 관리청부터 털어 봐야겠죠?”
- 걱정할 거 없어. 내가 가서 털어올게.
자신만만한 태도가 아주 믿음직스럽다.
하긴, 영혼 상태로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그에게 잠입쯤은 식은 죽 먹기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실체화해서 인벤토리에 넣은 뒤 다시 유령 상태가 되면 된다.
진짜 편리한 능력이네.
- 아, 그러고 보니 너 뿔 모양 바뀌었더라.
서지한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쁠 모양이?
확실히 스킬 쓸 때 머리 위가 좀 더 환해진 것 같은 느낌은 들었다.
마력을 많이 써서 그런 줄 알았는데.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나를 찍으며 스킬을 시전 해보았다.
마력을 집중하자 이마에 빛이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완성된 뿔은 확실히 이전과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키르기스의 거대한 사슴벌레 같은 뿔 하나만 있었는데 지금은 옆에 한 가닥의 뿔이 더 붙어 있었다.
바르기스의 뿔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열은 빛깔의 월계수 왕관도 같이 붙어 있다.
생각해보니 스킬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이렇게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다.
확실히 엘파니스가 나를 보며 왕이라고 한 말을 알겠다.
내가 던전에서 나타나면 누구나 ‘오, 보스다’라고 생각할 모습이었다.
- 멋진데.
서지한은 칭찬했지만 나는 좀 미묘한 기분이었다.
빛이 나니까 예쁘긴 하는데 형태가 좀 마음에 안 들어.
약간 녹용 같다는 생각도 들고.
게다가 손을 뻗어서 만져보니 감촉도 느껴져서 진짜 좀 심란해진다.
그나저나 이쯤 되니 좀 궁금해지는데.
“으음.”
- 왜 그래?
“이거, 보스 몬스터들이 가지고 있는 뿔이랑 같은 거겠죠?”
- 그렇지?
“그런데 제 뿔은 여러 개가 합쳐진 거잖아요.”
- 응.
“만약 제가 죽어서 아이템으로 이걸 남기면 뿔을 먹은 사람은 스킬을 여러 개 가지게 될까요?”
지금까지 보스 몬스터는 모두 스킬을 두 개씩 줬다.
엘파니스의 말에 따르면 보스 몬스터를 잡는다고 해도 온전한 뿔이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그러니 뿔을 여러 개 가진 보스 몬스터가 없는 건 대략 납득이 된다.
뭐, 내가 아직 보지 못했을 뿐, 어딘가에는 여러 개의 뿔을 가진 보스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그 보스 몬스터의 뿔은 스킬을 더 많이 줄까?
뭔가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 데 서지한이 매우 조용했다.
의아해진 기분에 그를 올려다보자 무섭게 굳은 얼굴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심한 욕을 들은 것처럼 화가 난 표정이다.
방금 내가 한 질문에 화를 낼 만한 요소가 있던가?
- 그런 말 하지 마.
“네?”
- 네가 죽는다는 가정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어……. 저는 그냥……."
너무 갑작스러운 반응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가볍게 한 말이었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들을 줄은 몰랐다.
그도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는지 아차한 얼굴로 바로 사과해왔다.
- 미안해.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 건 알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어쩐지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다.
“에이, 저 안 죽어요. 예전의 제가 아니라고요. 여차하면 비장의 무기도 있잖아요.”
- 일시 증가?
비록 후유증이 커서 되도록 안 쓰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 전투력이면 어지간한 상황은 다 해결이 가능하다.
나는 서지한이 ‘그건 그렇지’ 하고 웃을 줄 알았는데 그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 그건 앞으로 쓰지 말자.
“예?”
- 후유증이 너무 심하잖아. 쓰면 바로 포션 중독이라 힐링 포션도 안 듣고. 나는 치유 스킬도 없는데.
맞는 말이긴 하는데 포션의 효능을 생각하면 그 정도 후유증은 오히려 싸게 먹힌 셈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는지 서지한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내가 노력할게.
뭘?
갑작스러운 노력 선언에 영문을 몰라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 새벽 내내 피 토하며 앓는 너를 계속 지켜봤어.
“어……."
그렇게 심했나?
혈관 하나하나가 다 터질 것 같은 느낌이긴 했는데.
실제로 목구멍인지 폐인지 모를 곳의 혈관이 터져서 피가 올라오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괜찮은데.
- 아무것도 못 하고, 계속 지켜보기만 했지. 혹시나 네가 죽을까 봐 떨면서.
서지한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딘가 어긋나는 시선은 나를 보면서도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했다.
-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야.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도 그만큼 무섭지 않았는데. 나는 네가 그렇게 쓰러지는 거 이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 그러니까, 내가 노력할게.
말을 마친 서지한은 죽 그릇을 치우겠다며 짚 인형의 몸에 들어가 총총 방을 떠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담담한 모습이었지만 남겨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뭔데?
이 분위기 뭐냐고.
뭐라고 감히 정의하기 무서운 야릇한 분위기에 나는 몸부림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후끈하니 뜨거운 것이 분명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아니, 갑자기 뭐냐고. 진짜.
별일은 없었다.
뭐 대수로운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도 지금 왜 이렇게 수줍은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냥, 뭔가 방금 그 분위기 자체가 너무…….
확실히 실체화를 할 수 있게 된 후의 서지한은 뭔가 변한 느낌이다.
정확히 뭐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하고, 확신도 없지만 뭔가 변한 것 같긴 하다.
그, 꼭 나를 꼬시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겠지?
아닐 거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런 상황에 연애라니.
이렇게 심각한 때에 그러고 있는 건 좀 아니지.
정신 차리자.
서지한도 그냥 몸이 생기니까 좀 더 친근해져서 그러는 걸 거야.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있는데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유은담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누나 저 일어났어요! ٩(๑• ₃ -๑)۶♥
귀여워.
사실 유은담은 의외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많이 쓰는 타입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좀 차가운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서지한에게도 형, 형, 하며 따르고, 나에게도 누나, 누나, 하며 잘 따르지.
붙임성이 좋아.
나는 답장을 보냈다.
몸은 괜찮아요?
어제 전투에서 내가 나서기 전까지 유은담이 거의 혼자 적들을 상대했으니 꽤 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답장이 왔다.
문제없어요! ٩(ˊᗜˋ*)و 그런데 제 은신처가 결계 안에 있어서 나가고 나면 못 들어올까 봐 갇혀 있어요.
이런.
급하게 떠나느라 미처 생각을 못했다. 지금이라도 가서 결계를 통과할 수 있게 허락해줘야겠다.
막 스크롤을 꺼내 찢으려는데, 귀신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손모아.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결국 나는 서지한의 잔소리 폭격을 받은 후 유은담에게 내가 머무는 호숫가로 와달라고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문자를 쓰는 와중에도 그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성치도 않은 몸으로 자꾸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아, 성역 결계 때문에 어디 가지도 못 하고 있다고 해서……."
- 그냥 기다리라고 해. 위험해.
“성역 결계도 쳐져 있는 곳인데 위험한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요.”
- 낫지도 않은 몸으로 무리하다가 또 새벽처럼 피 토하고 쓰러지면?
어느새 짚 인형에서 뛰쳐나온 그가 매섭게 추궁했다.
“그냥 잠깐 가서 허가만 해주고 다시 돌아와서 쉴 건데……."
- 네가 왜 가. 유은담이 너보고 오라가라 한 거야? 이 자식을 그냥…….
“그건 아니에요. 제가 먼저 간다고 한 거예요.”
생각지도 못 한 방향으로 불똥이 튀었다.
나는 유은담이 날벼락을 맞지 않도록 열심히 부정했으나 서지한의 얼굴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 아쉬운 유은담이 와야지 왜 네가 가. 몸도 아픈데.
“오라고 했어요. 문자 했고.”
- 네가 말하기 전에 알아서 왔어야지.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어딜 오라 가라…….
“아아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저기 호숫가 사진도 찍어서 보내줬으니까 곧 올 거예요. 자자, 이제 그만.”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그는 끝까지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나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
- 포션 중독 풀리고 힐링 포션 써서 몸 낫게 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마.
“네……."
대답하면서도 좀 어리둥절하다.
서지한이 이런 성격이었나?
이렇게 잔걱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솔직히 이거 좀 과보호가 아닌가.
아니, 과보호가 확실하다.
어지간한 헌터들보다 내가 더 강할 텐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이렇게 걱정해주는 마음이 불쾌할 리가 없지.
- 왔네.
서지한이 창문을 턱짓했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어느새 호숫가에 유은담이 도착해 있었다.
내가 창문가에 다가가자 나를 발견한 그가 두 팔을 벌려 크게 흔들어 보였다.
“누나-!”
활기차게 외치는 모습이 어쩐지 강아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옆에는 떨떠름한 얼굴의 반서후도 함께 있었다.
약간 의외다.
천공 길드로 돌아간 게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