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 정도 쉬었으면 됐죠.”
혀를 찬 서지한은 냉큼 지푸라기 인형 안으로 들어가더니 폴짝폴짝 뛰어 행주를 집어 들고 대야에 담가 흔들더니 야무지개 짰다.
손가락도 없는 뭉툭한 지푸라기 몸으로 대체 어떻게 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나 지금 열이 나는구나.
어쩐지 계속 졸리고 머리가 멍하다 싶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했는데 미열이 있는 모양이다.
눈이 좀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 일단 좀 누워. 내내 앓았어. 너.
나는 햇빛이 들이치는 창문을 잠시 쳐다보았다.
날도 밝았으니 역시 일어나는 게 좋겠다.
도저히 저 밝은 햇빛을 이겨내고 잠들 자신이 없다.
전등도 안 켰는데 방 안이 환하다.
“정말 대낮인데 뭘 또 자요. 할 것도 많은데.”
대충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그가 인형의 몸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뉴스를 살펴보니 다행히 서울이 몬스터로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
- 다 확인했어? 괜찮지? 그럼 이제 누워.
그는 계속 일단 누워서 쉬라는 말을 반복했다.
걱정해주는 말이 무척 감동적이긴 하는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지.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언제 몬스터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지 아무도 모르잖아.
“일단 유은담 헌터한테도 연락……."
- 손모아. 그 몸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결국 인내심의 한계가 왔는지 서지한이 바스락 허리에 손을 말아 짚고 엄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당연히 지푸라기 인형으로 그러는 게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귀엽네.
어차피 휴대폰은 누워서도 볼 수 있으니까.
- 왜 이렇게 몸을 함부로 다루냐.포션 중독이어서 힐링 포션도 안 통하는데.
정말 속상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서지한이 침대를 기어올라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주었다.
직접 하겠다고 손을 뻗었으나 고집부리지 말고 얌전히 간호받으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뺨에 스치는 지푸라기가 간지러웠다.
- 쉬고 있어. 먹을 만한 걸 좀 가져올게.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서지한이 바스락 거리며 방을 나갔다.
새삼 느끼지만 저 지푸라기 몸, 이제 굉장히 능숙하게 다루는구나.
그가 나간 후 나는 유은담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가능할 때 연락 달라는 내용이었다.
급하게 떠나온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의 시간이 새벽인 걸 생각하면 아직 자고 있나 보다.
게다가 새벽까지 바쁘게 던전을 다녔으니.
나는 가만히 휴대폰을 쥐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제 새벽에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버렸다.
덕분에 지금까지 내가 고수하던 조용히 숨어 사태를 차근차근 해결한다는 정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해졌으니까.
일단, 던전에서 우리를 습격했던 복면인들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대충 대한 길드로 정체가 특정되기도 했고, 가장 큰 걱정이던 가족들은 내 곁으로 데려올 예정이니까.
최후의 전당이니 포식자가 세계를 집어삼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앞에서 대한 길드는 너무 하찮잖아.
지구 멸망 급 운석이 돌진해오고 있는데 상사에게 실수로 욕설 메일 보낸 걸 걱정하는 꼴이다.
어차피 운석 해결 안 되면 다 죽잖아.
마찬가지로, 포식자 해결 안 되면 어차피 다 죽는 거야.
대한 길드든 뭐든.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던전에서 언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엘파니스의 말을 들어보면 머지않은 시기에 일어날 일 같긴 하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은 던전 생성 폭발이 위험한 것이지, 일단 완전히 생성이 완료된 던전은 안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몬스터는 던전 안에서만 서식하고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가 달라졌다.
전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은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학살하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보를 가능한 한 널리 알리고 많은 던전을 닫으며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것이다.
몰려나온 몬스터들로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많은 사상자가 나는 건 최대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능력 하나 없는 민간인이 몬스터 앞에 내던져졌을 때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까.
솔직히 이렇게 힘을 가지게 된 지금도 그때의 느낌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두려움에 빠지는 사람을 가능한 한 많이 구하고 싶다.
아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면 더 좋겠지.
전 세계의 던전을, 가능하다면 최소한 한국의 던전이라도 모두 닫고 싶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서울에 열렸던 키르기스의 던전이 열리자마자 닫힌 덕분에 던전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와도 시간이 좀 있다는 점일까.
서지한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다른 던전들은 산이나 무인도 같은 외진 곳에 열려 있다.
그러니 던전이 터진다고 해도 인명피해가 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겠지.
하루빨리 던전을 닫으러 다니고 싶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또 있었다.
반서진의 구출을 도와주기로 했으니 그것부터 마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반서후가 협조해주지 않을 테니까.
대한 길드가 적으로 정해지긴 했지만 사실 나는 그들과도 크게 다투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설득해서 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게 본심이다.
엘파니스의 말을 듣고 나서 계속 생각하던 것이다.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우며 시간 끌 여유가 없다.
되도록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닥쳐올 불행이니까.
이 이야기를 하면 서지한은 기막혀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늘 모든 사람과 싸우고 이기고 반대하는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이야기를 나눠보고, 싸움은 대화로 일이 해결되지 않을 때 진행해도 늦지 않다.
아무리 제 이익에 눈이 멀었어도 설마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계속 싸우려고 할까?
어차피 지구 망하면 그 사람도 망하는 거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는데 어쩐지 아래층이 소란스러웠다.
생각해보니 내가 머물던 펜트하우스와 달리 여기는 이층 집이다.
땅딸막한 서지한의 몸으로 음식 그릇을 가지고 기나긴 계단을 오르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계단 너머 비스듬히 보이는 주방의 광경에 멈칫했다.
무언가, 굉장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지푸라기 인형이 보였다.
가스레인지 옆에 서서 냄비의 내용물을 휘젓고 있었는데, 두 팔로 꼭 안은 나무 국자가 생각보다 안정감 있었다.
하지만 뜨거운 가스레인지 온도에 그가 딛고 서 있는 지푸라기 다리가 조금씩 검게 그을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화륵 불이 붙는 게 아닌가.
- 아, 진짜.
내가 놀라 소리치는 것보다 그가 더 빨랐다.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가볍게 짜증을 낸 지푸라기 인형은 바로 옆의 싱크대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물이 화아아 떨어지는 몸을 대충 털어내더니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을 젓기 시작했다.
그 모든 행동이 마치 다람쥐처럼 빨라서 서지한의 능력치가 다시 돌아온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조용히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방금 전의 모습은 그의 명예를 위해 못 본 척 해주기로 결정했다.
분명 숨기고 싶은 모습일 테니까.
나는 계단 아래로 내려간 적도 없고, 서지한의 귀여, 아니, 처절한 모습도 본 적이 없는 거다.
그래, 그런 거야.
조금 기다렸다가 기척을 내며 아래층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계단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지한이 죽을 가지고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가지고 오는 건지 궁금하지만, 그것도 보지 않기로 했다.
그의 체면을 위해서.
결국 내가 본 것은 두 팔로 죽 접시를 받쳐 들고 종종걸음으로 방을 들어오는 서지한 뿐이었다.
“아, 고마워요.”
죽 그릇을 받아 들려고 손을 뻗었더니 그가 그릇을 물렸다.
- 어허. 환자는 가만히 누워 있어.
“그렇게 많이 아픈 건 아닌데요.”
- 그냥 가만히 좀 있어 봐.
이 상황에 실랑이를 하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순순히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하지만 지푸라기 인형이 두 손으로 숟가락을 야무지게 쥐고 죽을 퍼서내 입가로 가져다 댔을 때는 약간 난감해졌다.
- 자, 아-
“저기,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닌데요.”
- 아냐. 너 많이 아파.
“진짜 그 정도로는……."
- 아-.
어쩔 수 없이 나는 죽을 받아먹었다.
맛있긴 하는데, 내가 떠먹는 게 속도가 더 빠를 것 같아.
게다가 짚 인형의 키가 너무 작아서 받아먹는 각도가 불편하기도 하지만 두 번째 숟갈을 떠서 조심스럽게 내미는 지푸라기 인형을 보니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 졌다.
그저 그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런 식으로 누가 나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실체화는 6시간에 한 번이라고 했죠?”
묘하게 간질거리는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나는 얼른 적당한 이야깃거리를 골랐다.
- 음, 그렇지. 지금 실체화 가능한 시간은 15분이고.
서지한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역시 내가 너무 의식했나. 좀 민망하네.
“어, 꽤 길어졌네요?”
- 쓸 만해졌지. 쿨타임만 없으면 좋겠는데.
“마석을 다 흡수하면 쿨타임 없어지지 않을까요?”
- 그러면 좋겠지만.
서지한이 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갑자기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워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다 흡수하고 나면 다른 마석도 먹여줄게요.”
인벤토리에는 아직 S급 마석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앞으로 던전을 공략하게 되면 마석은 더 얻을 테니 딱히 아낄 필요도 없다.
서지한이 강해질수록 가장 믿을 수 있는 전력이 강해지는 것이니까.
- 그래.
완전히 흡수하는 데는 48시간이 걸린다고 했으니 그래도 2일 정도 지나면 다 흡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1시간 정도는 실체화 할 수 있겠지?
던전 공략할 때도 같이 싸울 수 있을 거고. 서지한이라면 든든한 전력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