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엘파니스는 손모아에게 왕이라고 했다.
그녀가 바르기스 말고 또 다른 보스 몬스터를 죽인 적이 있다는 것도 기정 사실인 것 같다.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바르기스의 뿔 한쪽을 내밀 정도면 그 정도는 베풀 정도로 보스 몬스터를 많이 잡았거나, 아니면 대인배라는 거겠지?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었다.
으음, 최근 각성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 다 연막인가?
적어도 확실한 건 바르기스 때 보여준 능력은 제 실력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던전에서 꽤 시간을 보낸 것 같았으니 자신을 만났을 때는 좀 지치고 마력도 바닥난 상태였겠지.
게다가, 얼마 전에 들었던 말도 다시 생각해보니 꽤 의미심장하다.
서후 형의 스킬을 상대할 때 분명 ‘피할 일이 별로 없어서’라고 했었지?
대충 이해가 간다.
이 정도로 세면 어지간한 공격을 당하기도 전에 적은 이미 전투불능 상태였겠지.
역시, 지한이 형 여자친구야.
그 스킬, 압도적으로 강한 광역 스킬이 퍼부어진 후 반죽음이 된 적들을 내려다보던 오연한 등을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첫인상은 좀 맹한 사람이 아닌가 했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날을 세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강한 개는 굳이 짖지 않는다.
손모아의 유순한 태도는 바로 강자의 여유였다.
“너는 알고 있었냐?”
반서후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유은담이 갸웃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뭘?”
“저 여자가 서지한이랑……."
적당한 단어를 고르던 반서후는 뒷말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저걸 무슨 관계라고 해야 하지?
유은담은 애인이니 뭐니 호들갑 떨고 있었지만 손모아의 담담한 태도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유은담은 하고 싶은 말을 파악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무슨 관계인지는 잘 몰랐어. 그렇게 가깝게 지내고 있는 것도 몰랐고. 심증은 있었지만……."
“무슨 심증?”
“연락할 때마다 시차가 꽤 나는 느낌이더라고. 여기는 대낮인데 자고 있다거나 그런 식으로. 그런데 뭔가, 기시감이 들어서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듯 말 듯한 느낌이라 반서후는 다음 말을 채근했다.
“왜?”
“생각해보니 예전에 지한이 형이 한국 기자들 피해서 미국에서 지낼 때도 이랬던 것 같더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혹시 같이 있나? 하고.딱 도피 루트가 지한이 형이 자주 쓰는 형태잖아.”
“그냥 우연히 겹쳤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나?”
“했지. 그래서 던전 같이 받자고 불러 본 거야. 모두가 던전을 지키는 이 세상에서 던전을 닫겠다고 나서는 사람이면 아무래도 지한이 형과 관련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서.”
비약이 좀 심한 추측이긴 하지만 아예 근거 없는 논리는 아니었다.
‘모두가 던전을 지키는’이라는 대목에서 유은담은 살짝 반서후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자연스럽게 회피하며 반서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랬군.”
“뭐, 여러 가지 생각하긴 했지. 지한이 형이랑 같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 형태는 아니었어.”
누가 예상했겠는가.
서지한이 이미 죽어 영혼의 몸으로 누군가와 찰싹 붙어 다니고 있는 이 현실을.
두 사람은 새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의 충격에 잠시 침묵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서지한은 언제나 혼자 다닌다는 것이었다.
꽤 오래 알아왔다고 자부하지만 그들에게도 서지한은 벽을 쳤다.
그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성향이었다.
유은담이 말하는 애인이라는 소리가 아주 헛소리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반서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나도 가야겠다.”
“간다고? 어디로?”
“당연히 천공 길드로 돌아가야지.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 서진이 구할 준비되면 연락해. 나도 나름대로 준비해 둘……."
반서후는 우스운 것을 보는 듯한 유은담의 표정을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이 자식이 이런 표정일 때는 뭐 좋은 일이 없었는데.
괜히 찜찜해진 그가 질문을 던졌다.
“왜? 뭐 문제 있어?”
“문제? 당연히 있지. 천공 길드로 돌아가면 꽁꽁 묶여서 반서진이랑 같이 구조 기다리는 처지가 될 걸.”
“……뭐?”
“형이 스킬 쓴 거. 개들이 다 봤잖아. 황금빛 방패가 아주 찬란하게.마침 또 밤이라 번쩍번쩍. KTX 타고 가면서 봐도 다들 반서후라고 했을 거야.”
유은담은 낭패 어린 얼굴로 굳어버린 반서후를 즐겁게 감상했다.
“너, 설마 처음부터 다 계획하고……."
“형도 이제 완전히 이쪽 배에 탄 거야.”
화려하게 미소 지은 유은담은 내심 손모아가 여기에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손모아가 있었다면 완전히 이쪽에 몸담게 된 반서후를 보고 적잖이 안심했을 텐데.
팀이란 신뢰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던가.
“젠장.”
어차피 지나간 일 괜히 따지는 것도 무의미했기에 반서후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것으로 감정을 삭였다.
하지만 유은담은 그런 노력이야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다시 얄밉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갈 곳 있으면 가든가. 대신 한번 나가면 다시 못 들어오는 건 알지?”
“뭐?”
“이 결계 안으로 못 들어온다고.허락 못 받은 사람은 결계 통과 못한다고 했는데, 우리 딱히 허락받은 적 없잖아. 누나가 결계 치고 바로 가버렸으니까. 나는 그래서 그냥 여기 있으려고. 내 은거지도 마침 이 안에 있고.”
이래저래 계속 당하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서후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싫지만,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유은담의 말이 전부 맞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좀 쉬어야겠다.
체력도 정신력도 고갈되어 버렸다.
“일단 좀 쉬게 은거지나 좀 열어봐.”
유은담은 웃음을 터뜨리며 은폐 장치의 마력을 조작했다.
붉은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그의 은거지가 일렁이는 공간 너머로 슬쩍 드러났다.
거기로 들어서면서도 반서후는 괜히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통과 허가 달라고 연락해보는 건 어때?”
“해봤는데 안 받아.”
"젠장."
* * *
“실패라고?’
분노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에 엄 비서는 어깨를 움츠렸다.
‘사장’의 손에는 마침 골프채가 단단히 잡혀 있었다.
자신이 직접 골라 사다 바친 명품 골프채다.
예지 능력도 없는데, 잠시 후 저 골프채가 자신을 후려치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어쩌다가? 추적에 실패했나?”
“아닙니다. 현장에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 한 강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노성을 터뜨린 ‘사장’이 골프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귀를 보며 엄 비서는 불길한 미래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삼백 명이 넘는 헌터들이야.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삼대 길드에서 제법 합 맞춰서 싸운다는 놈들을 다 데려갔는데 그깟 유은담 하나 생포 못했다고?”
‘사장’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은담을 잡으라고 보낸 공격대는 사실 일부러 과할 정도로 많은 인원을 편성했다.
이만큼이나 많은 숫자가 달려들면 천둥벌거숭이 같은 어린놈이 기가 꺾여 고분고분해질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강하고 날고 기는 헌터라고 해도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몸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무력은 그 상한선이 분명히 정해져 있다.
아무리 단신으로 보스 몬스터를 잡는 강자라고 해도, 합을 맞춘 집단에는 당해낼 수 없다.
그것이 법칙이고 진리였다.
그것이 진정한 권력이고 힘이었다.
그런데, 실패했다고?
미행에는 성공했는데 실패라니.
“자세히 말해봐. 이동 역장이 깨졌나? 그래서 놓쳤어?”
지금 당장 매질당하지는 않을 운명인가 보다.
엄 비서는 침을 삼키며 보고서를 고쳐 들었다.
그의 시선이 불만스럽게 흔들리는 골프채에 흘깃흘깃 닿았다.
“그게, 먼저 말씀드리자면 도망간 것은 아닙니다. 이쪽이 후퇴했습니다.”
“뭐? 설마, 졌다고?”
“그렇습니다. 현장에 유은담이 아닌 다른 헌터도 있었다고 합니다.”
“몇 명?”
그 순간 ‘사장’의 머리를 스친 것은 유은담이 다른 어떤 세력에 몸을 의탁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유은담은 머리가 나쁜 놈이 아니다.
자신을 납치한 게 누구인지는 바로 알아냈을 거다.
풀려나자마자 암현 길드를 쥐 잡듯이 잡아 정보부터 뽑아내던 놈이 아니던가.
어린놈이 독하기 짝이 없어서, 잔뼈 굵은 헌터들도 놈의 고문을 못 견디고 정보를 줄줄이 불었다고 한다.
그런 정보를 모으면 제 상대가 누군지는 대충 특정 지을 수 있었겠지.
어차피 정보는 새어나가기 마련이고 한국 헌터계를 장악한 이상 이제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다.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도 아니고.
진짜 권력은 모두가 공공연하게 알고 있지만 결코 그걸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진실을 은폐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방식이다.
버러지 같은 하류 인생들도 흔히 하는 싸구려 같은 방식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안 그랬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같은 지긋지긋한 거짓말.
잠깐 목숨을 건져보겠다고 세 치 혀를 놀리는 하루살이들의 방식이다.
편하고 싸긴 하지만 금방 들통이 난다.
그런 건 진짜 게임이 시작되기 전 잠깐 쓰고 버릴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진짜는 진실을 알더라도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못하게 하는 것.
모든 사람이 그가 ‘악’이라는 걸 알고 있더라도 ‘악한 게 옳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하류 인생은 자신의 부정을 정의로운 척하는 거짓말로 덮어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진짜 권력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정의라고 인식하게 한다.
그것이 진짜 정의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사장’은 자신이 있었다.
세상을 조종하는 모든 도구가 제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어차피 유은담도 어린 쥐새끼에 불과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유은담이 다른 무력 단체에 홀러 들어갔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더 이상 싸음 좀 하는 나부랭이와 싸우는 것이 아니게 된다.
세력 대 세력이 된다면, 그리고 그 세력의 정체를 자신이 아직 모르고 있다면 그건 앞으로 좀 문제가 될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귀찮은 일이 많아질지 생각하니 잠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사장’은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아갔다.
이미 끝난 싸움이다.
당초 목적했던 것은 모두 이뤘다.
“그게, 확인된 건 세 명입니다.”
하지만 엄 비서의 말에 ‘사장’의 평정심은 다시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