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무슨 말인지 알겠다.
보아하니 유은담이 영상이 있다는 걸 말한 것 같네.
“진짜, 진짜 죄송해요.”
유은담이 내 눈치를 살피며 거듭 사과했다.
내가 무척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가족들에게 화가 미칠까봐 영상을 숨기기로 했는데 그걸 제멋대로 반서후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해버렸으니 내가 화를 내도 될 만한 상황이긴 하네.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영상 공개한다고 해도 누나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가져왔다고 추측하겠죠. 아, 그리고 말했던가요? 이제 누가 적인지도 확실해졌다는 거.”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눈치는 챘어요. 대한 길드겠죠. 천공, 암현 둘 다 아니라면 어차피 남는 건 하나뿐이니까. 그리고 던전 관리청도 관련 있죠?”
“네. 헌터 일보도 있고, 법조계도 엮여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한 길드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으음. 해외는 없어요?”
만약 가족들을 빼돌린다면 해외도피밖에 없는데 해외에도 추적망이 깔려 있으면 곤란하다.
유은담은 미안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마 공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거예요. 좀 수상한 움직임도 있어서……."
"수상한 움직임?”
“대한 길드가 던전 공략할 때 공략 멤버에 외국인이 들어와서 아이템을 쓸어 간다는 소문이 있어요. 확실하지는 않은데, 그냥 뒷소문으로 돌아다니더라고요.”
“그렇구나. 이러면 가족들을 해외로 빼돌려도 안심하기 힘들겠네요.”
굳이 대한 길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밖은 이제 안전하지 않다.
엘파니스의 말대로라면 언제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올지 모르니까.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파니스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왕이시여, 혹시 피난처가 필요하시면 여기 영지를 이용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던전을요?”
“예. 본디 영지는 왕의 사람을 지키기 위한 땅이 아닙니까.”
사실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제 헌터들이 공략을 하러 쳐들어올지 모르는 던전에 가족들을 둘 수는 없었다.
절대 안전하지 않을 거야.
“헌터들이 잔뜩 들어올 텐데, 오히려 위험해요.”
“성역 결계로 입구를 봉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출입권한을 부여해서 어디에 있더라도 영지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게 허락하시면 될 듯합니다.”
출입권한.
그러고 보니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이 던전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했지.
그게 영지의 주인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 아니라 출입권한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용되는 일인가 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성역 결계면 제가 방금 계승한 그 스킬이요?”
“예. 아직 사용해보지 않아서 능력을 잘 모르시겠지만, 결계를 치면 왕의 허락이 없이는 결계 안으로 드나들지 못합니다. S급 이상의 스킬로만 대미지를 입힐 수 있고요.”
나쁘지 않은 생각 같다.
하지만 던전 안에서는 인터넷도 안되고 생필품도 구할 수 없으니 여기서 내내 지낼 수는 없고.
임시로 도망칠 장소로는 괜찮겠지.
일단 나가는 대로 엄마를 찾아가서 던전 출입 권한 줘야겠다.
“이제 대충 결론 난 것 같은데 나가면 안 될까요? 시간이 좀 간당간당해서. 사실 다른 헌터들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왜 아직 안 오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 결계라는 거, 칠 수 있으면 얼른 나가서 치죠."
유은담이 약간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재촉했다.
하지만 반서후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딜 넘어가려고. 당장 영상 내놔.”
“나한테 없어. 내가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은담의 말에 반서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반서진을 돕고 싶긴 하지만, 당연히 내놓을 거라 생각하는 표정을 보니 갑자기 배알이 꼬였다.
나도 좀 변했구나.
예전이었으면 천공 길드 길드장이, 그것도 이렇게 커다란 남자가 험악한 얼굴을 하고 내놓으라고 하면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얼른 내밀었을 텐데.
“뭘 봐요?”
안 주면 어쩔 건데.
사실 내가 지금까지 전전긍긍해왔던 것은 모두 가족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파니스의 말을 들으며 생각을 바꿨다.
가족을 빼돌리기로.
가족을 감시하는 사람들.
그들은 어렴풋이나마 그 정체를 알고 있고 목적도 알고 있다.
그러니 그건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제어할 수 있는 위험이었다.
작은 위험을 막겠다고 가족들의 모든 삶을 망가뜨리고 도망자로 만드는 건 영 수지타산이 안 맞는 계산이지.
그래서 죽은 듯이 살면서 적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처리하는 방향을 생각한 거고.
하지만 몬스터는 다르다.
그건 예측이 불가능한 위험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몬스터들이 던전에서 쏟아져 나올 거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이제 가족들을 밖에 둘 생각은 없어졌다.
득과 실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질 때나 조건을 달아가며 저울질을 하는 거지.
가족들의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무릅쓰기엔 너무 큰 위험이었다.
대한 길드만 걱정하면 되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미 결심이 섰다.
가족들도 설명하면 납득해주겠지.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돌아가는 대로 가족을 피신시킬 생각이다.
지인들도 손 닿는 대로 구해서 던전 안에 넣어둬야지.
외부와 연락이 안 되어 불편하긴 할 테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괜히 해외에 숨기면 대한 길드에 위치를 들켜서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그전까지는 막막하고 거대하게 느껴지던 대한 길드라는 적이 포식자와 쏟아져 나올 던전 몬스터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이다.
솔직히, 좀 성가시니까 빨리빨리 처리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
“영상은 못 줘요.”
못 박듯 말하자 반서후의 얼굴이 다시 험악해졌다.
자기 인상을 참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인데, 나도 무턱 대고 그를 적대하자고 이러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적은 대한 길드다.
힘을 합쳐서 물리치고 으싸으싸 최후의 전당을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끼리 싸울 생각은 없었다.
“영상 주면 공개하려는 거죠? 언론에.”
“맞아.”
반서후는 이미 그들에게 감시당하고 있다.
아마 슬슬 반서후가 자신들에게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서진 헌터의 신병을 빌미로 그를 흔들려고 하겠지.
그전에 반서후는 영상으로 결백을 증명해내고 여론을 돌리려는 것이다.
“영상, 정상적으로 공개가 될까요?”
나와 유은담이 가장 많이 걱정했던 부분이다.
영상을 편집해서 원본과 다르게 보도할 수도 있었다.
언론은 그들의 편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줘.”
“언론은 어차피 대한 길드 편이잖아요. 이걸 오히려 악용해서 보도할 수도 있어요. 역풍이 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건……."
“만약 진짜로 의도한 대로 잘 되었다고 쳐요. 다른 방식으로 협박하면요? 영상을 풀어도 반서진 헌터를 풀어주지 않고 죽이거나 고문하겠다고 협박할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