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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화 (9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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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화

정신, 정신 차려야 해.

나는 꽁꽁 얼어붙은 몸을 어떻게든 삐꺽삐꺽 움직여서 서지한을 살짝 밀어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약간의 거리를 얻는 데는 성공했다.

그 상태로 나는 서지한을 올려다보며 더듬더듬 물었다.

아마 내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을 거다.

“왜, 왜? 왜? 무슨, 왜?”

바보.

갑자기 왜 이렇게 끌어안고 그러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정작 입에서 나온 건 한심할 정도로 더듬거리는 말이었다.

못 봐줄 정도로 뚝딱거리고 있는 나와 달리 서지한은 부드럽게 미소까지 지은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이렇게 하고 싶었는지 넌 절대 모를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서지한에게 그 말을 할 기회는 없었다.

말을 마친 그가 포옹을 풀고 뒤돌아 어딘가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방향은, 반서후가 있는 쪽이다.

기분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래도 친구라고 그를 바로 찾는구나.

반서후는 약간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서지한을 보고 있었다.

죽었던 친구가 살아 돌아온 거니까 감격스럽겠지.

아직도 반서후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서지한이 이 정도로 그와 친하다면 반서후에 대한 앙금을 푸려고 노력해야겠다.

“지한아……."

반서후가 아련하게 부르자 서지한은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반서후를…… 날려버렸다?

피익하고 공기가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주먹이 반서후를 강타했다.

반서후의 뒤에 있던 의자가 우당탕 넘어지고, 그의 몸이 만화처럼 휙날아 그대로 옆에 있는 벽을 부쉈다.

그렇게 벽을 몇 개나 부순 반서후는 바닥에 작은 크레이터를 만들면서 처박혔다.

에, 엘파니스의 집인데.

나중에 사과해야겠다. 그나저나 반서후 죽은 거 아냐?

걱정하는 나와 달리 유은담도 서지한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반서후는 대체 얼마나 단단한 남자란 말인가.

스킬도 안 쓴 상태였는데 그렇게 때려놓고 걱정도 안 하다니.

“내 말이 맞았잖아, 새꺄. 그리고 이제부터 모아한테 덤비지 마라. 말 잘 들으라고. 난 경고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지한의 실체화가 스르륵 풀렸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는데, 이걸 기뻐해야 하나.

에이, 그냥 좋게 생각하자. 날 생각해준 거잖아.

반서후를 날려버린 서지한은 당연한 듯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실체화가 풀려서 아까처럼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갑자기 포옹당한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 좀 힘들다.

아직 얼굴이 좀 뜨거운 걸 보니 흥조가 가시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붉어진 얼굴을 수습하느라 어쩔 줄 몰라하는 것과 달리 서지한은 평소와 같이 담담한 태도였다.

그걸 보고 있으니 나도 급속도로 진정되기 시작했다.

아, 음. 그렇구나.

그냥 우정 포옹이었나?

하긴, 그동안 같이 있으면서 그에게 몸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중에 진짜로 몸이 생겼으니 감동의 포옹 쯤 할 수도 있지.

하마터면 뭔가 착각할 뻔했다.

뭔가 의미심장한 말까지 하면서 그러니까 놀랐잖아.

게다가 서지한은 엄청 잘생겼으니까 순간적인 파괴력이 강하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괜히 의식했지 뭐야.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고말고.

내가 수왕류 던전에서 혼자 놀라 떨고 있을 때도, 충왕류 던전에서도 그는 나를 꽤 안타까워했었다.

내가 넘어지려고 하면 잡아주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

‘얼마나 이렇게 하고 싶었는지’의 '이렇게’는 안아주고 싶었다는 뜻인 게 분명하지만.

연인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냥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싶은 인류애적인 의미였을 거야.

그게 아니면 저렇게 담담하게 볼리가 없잖아.

어휴, 큰일 날 뻔했네.

괜히 혼자 착각해서 어색하게 될뻔했잖아.

- 왜 그래? 얼굴이 붉은데. 더워?

서지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괜히 질문을 건네 왔다.

그 말에 나는 내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역시 아무 의미 없었잖아. 나도 의식하지 말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야겠어.

“아뇨, 좀 놀라서. 이제 괜찮아요.”

- 그래? 다행이다. 너무 놀란 것 같아서 좀 걱정했어.

생긋 웃는 서지한의 얼굴에서 나는 미약한 장난기를 발견했다.

아마 내가 순간적으로 그를 의식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모든 결론을 내렸다고. 이제 흔들리지 않는다.

- 앞으로 이런 거 많이 할 텐데 그때마다 놀라면 안 되지.

“네?”

- 응?

놀라 물었지만 서지한은 예의 그 생글 거리는 얼굴로 나를 볼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래 봐야 날 놀리려고 하는 거겠지.

원래 장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나와 지내면서 약간 물들었나 보다.

“아니에요. 그런데 뭐 변화 없어요?”

나는 반서후가 날아간 방향으로 시선을 주며 슬쩍 물었다.

반서후가 걱정되긴 하는데, 굳이 가서 확인할 정도로 호감이 있는 건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유은담과 서지한의 반응을 보면 딱히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이기도 하고.

- 아, 변화. 있지. 아까 느꼈는데, 그 거리 제한이 없어진 것 같아. 원래 영혼석과 3미터 이상 떨어질 수 없었잖아.

“거리제한이 완전히 사라진 거예요?”

- 그건 잘 모르겠어. 적어도 이전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이 된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완전히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일 텐데 엘파니스와 로드란, 그리고 유은담은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다.

엘파니스가 반서후가 걱정되는지 그쪽을 흘긋거리며 안절부절못하긴 했지만, 내 눈치를 보는지 움직이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되는데.

“그 외에 더 없어요?”

- 음, 아까 말했다시피 인벤토리도 생겼고, 상태 창도 다시 돌아왔어. 능력치는 약간 낮아졌군. 6시간에 1분 실체화 할 수 있다는 거 외에는 다 괜찮아.

“인벤토리 돌아왔으면 서지한 씨 장비 아이템도 돌려줘야겠네요. 그래야 실체화했을 때 쓸 수 있을 테니. 지금 줘도 받을 수 있어요?”

사실상 서지한은 하루에 실체화 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된다는 것 외에는 살아생전의 대부분의 능력을 회복한 듯하다.

실체화 시간도 지금은 60초 정도지만, 점점 늘어나겠지.

48시간 동안 마석 에너지를 전부 흡수하면 얼마나 시간이 늘어나려나?

잠깐 흡수한 걸로 1분이니까 다 먹으면 꽤 길어지겠지?

-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실체화를 해야 살아생전 능력을 쓸 수 있군.

“그럼 나중에 줄게요.”

우리 대화를 지켜보는 유은담은 여러모로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다.

나는 일부러 그 눈초리를 모른 척했다.

그 사이 바닥에 처박혔던 반서후가 부스스 일어나 돌과 먼지를 털어내며 담담하게 걸어왔다.

진짜 멀쩡하네. 뭐로 만들어진 인간이야? 저 정도면 아까 내가 한 공격은 공격 축에도 들지 않겠다.

“서후 형, 괜찮아?”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머쓱하게 서 있는데 유은담이 쪼르르 뛰어갔다.

그래도 친한 동생이라고 위로는 해주는구나.

“진짜 상처 하나 없네. 사람이야?그래도 지한이 형이 살살 때렸나 보다. 지한이 형한테 고맙다고 해.”

아니, 위로가 아니라 약 올리는 것 같기도.

나는 갑자기 반서후가 좀 불쌍해졌다.

하지만 반서후는 살짝 인상만 쓰고자 주변을 치와와처럼 뱅뱅 도는 유은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놔.”

“뭘?”

모르는 척하는 유은담의 얼굴에 반서후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는 갑자기 엘파니스를 턱짓했다.

“잡을 거야?”

나는 그제야 반서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애초에 보스 몬스터를 잡으러 온 것인데, 던전도 양도받았고 그를 신하로 삼기까지 했으니 당초의 목적이던 공략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뿔을 먹을 필요도 없이 그의 스킬까지 얻었으니 나로서는 이만저만 이득이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엘파니스를 죽일 이유도 없으니 여기서의 볼일은 끝난 것이다.

적어도, 반서후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목적은 달성되었다.

아마 반서후는 도와주는 대신 뭔가 대가를 받기로 했나 본데.

유은담이 그걸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아니. 당연히 안 잡지. 모아 누나 부하인데. 이제 우리 편이잖아.”

왜 자꾸 나를 누나라고…….

아니, 됐다.

“그러면 내가 대가를 받을 차례네.”

“응? 무슨 소리야. 형이 뭐 도와준 것도 없잖아. 팀원이랑 싸우기만 했지.”

“장난치지 마라, 유은담. 그럴 기분 아니야. 어서 내놔.”

“근데 내놓으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도와달라고 했을 뿐 뭘 준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유은담의 유들유들한 태도에 반서후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두 사람 사이로 숨 막힐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분위기만 봐서는 반서후가 바로 유은담을 쳐 죽일 것 같다.

“너, 죽고 싶어?”

“에헤이, 왜 이러시나. 도와준다니까? 근데 형이 날 어떻게 죽여. 약하잖아.”

모르는 척 능청을 떨고 있는 유은담.

저건 순도 백 퍼센트 약 올리기 위한 행동이다.

반서후에게 감도는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고 있는데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

솔직히 나도 반서후가 험악해지는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반서진의 이름이 나온 이상 나도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년 빠져, 라는 듯 반서후가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은담은 약간 곤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익숙한 표정이다.

승주가 사고 치거나 내 간식을 마음대로 먹어버린 후 저런 얼굴로 날보곤 했지.

“그게, 여기 와서 공략 도와주는 대신 반서진 헌터 잡혀간 거 구출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거든요.”

아예 대가 없이 와준 건 아니구나.

하긴, 반서진 헌터가 지금 누명을 쓰고 잡혀 있으니 반서후도 꽤 급한 상황일 거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던전 공략에 따라오는 대신 가족을 빼돌리려고 노력하고 있겠지.

“음. 그래서 뭘 달라는 거예요?”

“영상.”

유은담 대신 반서후가 짧게 대답했다.

아아,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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