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6화 (96/231)

096화

피난민.

어떤 재난이나 전쟁을 피해서 원래 살고 있던 땅을 떠나 타 지역으로도 망친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충왕류 던전에서 헌터들을 우적우적 씹어 먹는 그 괴물들이 어떤 재난을 피해 도망친 가련한 피난민이라는 소리인가?

“이해합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시겠지요. 저희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엘파니스는 어느새 빈 잔에 차를 보충해주었다.

그는 우리가 혼란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도 비슷했습니다. 어느 날 토지를 빨아들이며 괴물이 사는 구덩이가 곳곳에 창궐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특수한 힘을 가진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재능도 계급도 상관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계시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으음."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여긴 것은 그들이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데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래도 우리는 마법과 신의 힘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악의 영지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들 고유의 힘은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었더니 서지한이 슬쩍 입을 열었다.

- 너는 잘 모르는 이야기겠지만, 던전 초기에는 군대를 파병하기도 했어. 하지만 화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군. 총이 격발 되지 않거나, 수류탄 핀을 뽑아도 터지지 않거나.탱크는 들어간 후 움직이지도 않아서 결국 던전 공략은 헌터들만의 전유물이 된 거지.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긴, 그게 아니면 헌터들만 던전에 투입할 이유가 없긴 하다.

결국 시스템이 부여한 스킬의 힘이 아니면 던전 안에서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이야기다.

모두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엘파니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래도 악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영지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게, 그들이 이 땅에 있는 신의 힘을 두려워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요.”

엘파니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착각이었습니다. 오만이었지요.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저희들의 과거이자 이곳에 앞으로 일어날 미래입니다.”

나는 반신반의하던 태도를 버리고 엘파니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뭐, 이 할아버지 갑자기 나타나서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이라는 생각도 약간 남아 있긴 하는데, 내용이 워낙 심상치 않아서.

“우리들이 그들에게 익숙해져 일상적으로 토벌을 하러 가던 어느 날, 일이 터졌습니다. 예상하시는 표정이군요. 맞습니다. 영지 안에서만 살던 괴물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백성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으음."

반서후가 낮게 신음했다.

서지한은 눈을 부릅뜨고 반서후에게 ‘거 봐, 내 말을 들었어야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서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해당 지역에서 원군을 요청했으나 파병은 더뎠습니다. 부끄럽게도, 악의 영지에서 생산되는 아이템에 눈이 멀어 다른 나라가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반목이 깊어져 갔습니다.”

으음, 아이템을 두고 이권 다툼을 하는 건 어느 세계나 비슷하구나.

나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대입해보고 갑자기 답답해졌다.

진짜로 몬스터들이 던전에서 뛰쳐나온다면 여간 큰일이 아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강한 헌터들은 제거당하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최후의 전당이 열렸을 때, 이미 반목하고 있던 각국의 계시자들은 힘을 합치는 대신 서로를 견제하고 싸우는데 급급했습니다. 최후의 전당이 끝난 후 살아남은 자들은 얼마 없었지요. 결국 우리는 도망쳤습니다.”

엘파니스는 잔잔하지만 어두운 얼굴이었다.

“도망쳤다는 건 여기로 도망쳤다는 거예요?”

“비슷합니다. 우리 세계를 버리고 다른 세계로 왔죠. 피난한 세계에서 또 다른 곳으로, 또다시, 계속 도망을 거듭하여 이곳까지 왔습니다.”

"왜 도망친 거죠? 던전에서 뛰쳐나온 몬스터들 때문에?”

내 질문에 엘파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최후의 전당 이전에 벌어지는 작은 소란에 불과합니다.진짜 재앙은 따로 있지요.”

뭔가요?”

“포식자. 세계를 집어삼키는 괴물.최후의 전당은 그저 그 포식자들을 마주할 가엾은 미물들을 향한 작은 배려죠. 당신들이 시스템이라고 부르고, 우리가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너무 오래 이야기했기 때문인지 엘파니스는 약간 지친 표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몬스터들이 뛰쳐나온다는 말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데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 큰일은 따로 있다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소리였다.

“포식자라는 건 뭡니까?”

반서후가 질문을 던졌다.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사실 방금 엘파니스가 말한 모든 것들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었다.

“영혼을 먹는 자. 하늘에 나타나는 거대한 검은 입이지요. 최후의 전당 이후에 나타나서 그 세계의 영혼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괴물입니다.”

예?

솔직히 말하자면 수긍하며 듣고 있긴 하는데 실감이 안 난다.

한 달 뒤에 운석 충돌로 지구가 멸망합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던전이 실재하는 이 상황에 마냥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여기로 도망쳐 온 겁니까?”

반서후의 말에 엘파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당신들이 던전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가신과 영지를 챙겨 다른 세계로 피난한 겁니다.”

엘파니스는 잠시 차를 몇 모금 마신 후 혼란에 빠져 있는 우리를 보며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최후의 전당에서 왕좌를 차지한 왕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포식자와 맞서 싸울지, 아니면 피난할지. 그리고 최후의 전당이 허락하는 만큼의 자신의 세계를 떼어 다른 세상으로 도망칠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을 다 데리고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느낌으로 들리는데.”

“그렇습니다. 왕의 신하, 왕이 허락한 자. 그리고 왕이 최후의 전당에 가져온 그의 영토만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아까 말 했던 왕좌에 앉은 왕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게 이 말이었구나. 예상과는 좀 다른 의미네.

“운명을 결정한다기에 이 세계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게 힘이라도 주는 줄 알았더니.”

유은담이 투덜거리자 엘파니스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타일렀다.

“힘을 주기는 줍니다. 그 세계에 있는 모든 계시의 자원을 왕에게 계승시키니까요. 왕좌에 앉는 순간부터 그는 그 세계 최강이 됩니다. 물론, 강한 힘만큼 책임도 따르지만……."

“최후의 전당에는 왕과 그 가신만 참가할 수 있다고 했는데, 왕은 어떻게 해야 될 수 있는 겁니까?”

다분히 나를 의식하는 느낌으로 반서후가 질문했다.

엘파니스가 나를 보며 왕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엘파니스는 미묘하게 나와 이들의 대우에 차등을 두고 있었다.

“이미 이분의 가신이 아닙니까?”

"아니니까, 설명이나 해주시죠.”

기분이 상한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반서후가 재촉했다.

엘파니스는 그제야 진땀을 흘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악의 영지를 소탕하며 사냥한 왕의 관을 계승하는 겁니다.아주 가끔, 온전한 왕의 관을 얻을 수 있을 때가 있거든요. 대부분은 조각 형태로 떨어져서 온전한 것을 얻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만.”

나는 움찔했다.

그는 내가 보스 몬스터의 뿔을 계승했다는 걸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다른 곳에 신경이 쏠려있는 것 같았다.

“두 번째는?”

움찔한 엘파니스가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서글픈 얼굴로 대답했다.

“왕의 가신으로 참석해 왕좌에 앉아 새 왕이 되는 겁니다.”

각자 생각에 잠겨 테이블 위에 적막이 감돌았다.

엘파니스는 씁쓸한 얼굴로 차를 마시다가 돌연 넋두리하듯 입을 열었다.

“교황 티오신 님은 아주 강한 분이었으나, 지난번 최후의 전당은 매우 지옥 같았습니다. 그분은 최대한 많은 이들을 지키고자 하셨지만 결국 저와 여기 성기사 로드란, 둘만 남았지요. 사실 거기서 피난을 계속해도 의미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드란은 아직 어리니까요. 결국 제가 왕좌에 앉게 되었죠.”

엘파니스는 등 뒤의 기사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둘 사이에 애틋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엘파니스가 어떤 기분일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모두 다 죽고 단둘만 남는 상황이라니.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분위기를 박살 내며 반서후가 딱딱하게 물었다.

정보는 고맙지만 그 이상은 내주지 않는 경계심이 선명하다.

이렇게 우리를 일부러 데려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

하지만 엘파니스는 가볍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오면서 보셨습니까?”

"어떤……."

“우리 세계는 박살 났습니다.”

나는 침묵했다.

엘파니스는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성한 건물이 거의 없지요. 당신들이 몬스터라고 부르는 거주민도 없고요. 우리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도망쳤습니다. 내가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죠. 그저, 이제 그만 하고 싶습니다. 원주민과 그리고 다른 왕들과 싸우는 짓을 요.”

그리고 엘파니스는 가볍게 웃었다.

“사실 더 싸울 힘도 없고요. 당신들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도 없습니다. 저는 전투와는 거리가 먼 사제이고, 로드란도 간신히 A급 전투력의 성기사이니 왕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한참 부족하지요.”

나는 미묘한 기분으로 엘파니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실 여기 보스 몬스터를 잡아 죽일 생각으로 온 건 맞긴 하는데, 이런 엘파니스를 어떻게 죽여.

내 표정을 본 엘파니스는 다시 빙그레 웃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제안했다.

“이 던전에 들어온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드란을 살려주신다면 왕의 가신으로 들어가 충성하고, 이 영지도 바치겠습니다.”

"던전을요?”

엘파니스는 단순히 말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 마치 월계수 관을 떠올리게 만드는 왕관이 나타났다.

월계수 잎 대신 뭔지 모를 금빛 나뭇잎으로 만들어져 있는 게 좀 다르다.

그리고 그 관을 벗어 엘파니스가 내 앞으로 내밀었다.

“받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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