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5화 (95/231)

095화

이상하게 이 할아버지를 의심하거나 적대하기가 힘든 기분이다.

진짜 홀린 것처럼.

나는 의심스럽게 찻잔을 노려보았다.

그런 내 시선에 노인은 약간 당황하더니 찻잔에 입을 대고 먼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차가 아니라 찻잔에 독을 발랐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그걸 본 반서후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셨다.

그러면서 도발하듯 나를 흘끔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유은담도 싱글싱글 웃으면서 차를 마시는 게 아닌가.

아니, 왜들 이렇게 방심하는 거야?

어쨌든 두 사람이 괜찮아 보이니 독은 없는 것 같긴 하는데.

나는 혹시나 해서 차를 아주 조금만 혀에 대어보았다.

아주 그윽한 장미향만큼 차의 맛도 꽤 훌륭한 편이다.

노인은 반서후와 유은담이 차를 마시는 건 쳐다보지도 않더니 내가 찻잔을 집어 들자 가만히 바라보며 재촉하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차를 마시자 빙그레 웃어 보였다.

뭔가 찜찜한데.

아무튼 내가 찻잔을 내려놓자 미소 짓던 노인이 상냥한 말투로 말을 건네 왔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 할…….

“입에 맞으십니까?”

어?

뭐야, 말이 통하네.

한국어는 아닌데 대충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듣겠다.

이게 이 사람들이 가진 소통 아이템이었나 보다.

“아, 네, 맛있어요.”

어르신이 깍듯하게 물어오니 나도 질세라 마주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영문모를 소리를 했다.

“왕의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군요.”

네?

왕이요? 저요?

내가 뭔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서지한과 반서후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유은담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누나, 왕이었어요?”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보다 왜 저를 누나라고……."

누나라니.

여러모로 갑작스러운 말들뿐인데 유은담은 늘 그렇게 불러왔던 듯 자연스러웠다.

“에이, 아까부터 그렇게 불렀는데요 뭐. 이제 한 배를 탄 처지에 딱딱하게 계속 손모아 헌터, 손모아 헌터 이러는 건 좀 별로잖아요.”

"아니……."

눈웃음치며 유들유들하게 하는 대꾸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누나가 싫어요? 그럼 친구 할까요?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아, 저는 그냥 은담아, 이렇게 부르셔도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서지한이 유은담에게 붙임성이 좋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악령 왕 실라기스를 공략할 때도 형, 형, 하며 따랐다던가.

그게 몇 년 전이니까 유은담은 아마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였을 텐데.

어릴 때부터 성격이 좋았나 보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는 그만하고. 집중하지.”

내내 조용히 있던 반서후가 끼어들었다.

영혼석을 넘겨주지 않은 일로 아직 앙심을 품었는지 말투가 꽤 뾰족하다.

그래.

지금 이런 걸 따질 자리는 아니지.

맞는 말이긴 하는데 반서후가 말하니까 괜히 배알이 꼬인다.

나는 일단 원래 화제로 돌아가기로 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보다 그쪽이 엘파니스 맞죠? 보스 몬스터 인왕 엘파니스.”

사람의 면전에 대고 몬스터라고 부르기가 좀 그렇긴 하는데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그레 웃었다.

“원주민 입장에서는 그런 셈이지요.”

“원주민……. 아, 아무튼 저는 왕이 아니에요.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하지만 엘파니스는 의아한 얼굴로 내 머리 위를 눈짓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충왕포를 쏘기 위해 모은 마력을 흩어버리지 않은 상태라, 내 머리에는 찬란한 뿔이 솟아 있는 상태였다.

“왕관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걸 왜 왕관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뿔이에요.”

나는 슬쩍 유은담의 눈치를 보며 두루뭉술하게 부정했다.

그러고 보니 유은담도 내가 준 바르기스의 뿔을 먹으면 머리에 이런 게 생기려나?

그러면 내가 스킬을 쓸 때마다 생기는 이 뿔이 보스 몬스터의 뿔을 계승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 괜찮을까.

약간 걱정되지만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당장 유은담이 나에게 적대적인 것도 아니고, 괜찮겠지.

물론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방심할 수는 없지만.

“부정하지 마시지요. 왕이여. 제가 본 것 중 손에 꼽힐 만큼 훌륭한 관인 데요.”

엘파니스는 내 말이 겸양이라고 생각했는지 인자하게 웃기만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요.

“왜 자꾸 왕이라고 부르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왕이 아니라니까요.”

잠시 의미 없는 대화를 몇 차례 주고받던 엘파니스는 등 뒤에 서 있던 어린 기사가 무언가 속삭이자 그제야 깨달은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깜빡했군요. 혹시 여기는 아직 최후의 전당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네?”

이 할아버지, 점점 더 영문 모를 소리만 하시네.

하지만 내 반응을 대답 대신 챙겼는지 그는 납득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후의 전당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면 무슨 말인지 모르실 법도 하군요.”

최후의 전당.

또 처음 듣는 이야기가 나왔다.

혹시 다른 사람들은 아는 내용 인가 해서 둘러봤더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우리를 데리고 와서 차를 대접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잠자코 엘파니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왕은 전당에 참여할 자격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계속 맹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는지 엘파니스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이야기하자면 길어질 것 같은데, 이 늙은이가 계속 이야기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엘파니스는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높이고 있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예의 바른 태도다.

서지한이나 반서후도 딱히 반대하지 않는 기색이라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죠! 편하게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다시 예의 인자한 미소를 지은 엘파니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마치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라도 해주는 것 같은 분위기다.

그쯤에서 나는 끌어 모으고 있던 마력을 흩어버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요.우선 최후의 전당은 이 세계의 모든 왕들이 모여 왕좌를 놓고 벌이는 싸움입니다. 때가 되면 최후의 전당이 열리게 되고 왕들은 거기에 참여하게 되지요.”

“왜 왕좌를 가지려는 겁니까?”

반서후가 심각한 얼굴로 질문했다.

서지한은 빈 의자에 앉아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왕좌를 가진 자가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니까요.”

운명? 어떤 운명?

의아한 와중에 나는 엘파니스가 말한 ‘왕들’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그가 나를 왕이라며 깍듯하게 대하긴 했지만, 저 표현에 따르면 왕은 한 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긴, 엘파니스부터가 인왕이니까.

혼란에 빠진 우리들의 표정을 보고 엘파니스가 다시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와중에 나는 그의 등 뒤를 지키는 기사가 씁쓸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반응을 보니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군요. 이 늙은이의 말이 크게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왕들은 지금 모두 자신들의 영지에 있습니까?”

엘파니스가 하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의미를 파악하기가 좀 힘들었다.

사실 아직도 진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맞는지, 이 사람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나는 가능한 한 그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기로 했다.

신경 쓰이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

특히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라는 말이 매우 마음에 걸렸다.

왕, 영지. 무슨 말일까.

혹시.

“영지라는 건 던전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여기 같은, 밖과 단절된 공간이요.”

“맞습니다. 여기서는 던전이라고 부르나 보군요.”

“네. 음, 보스 몬스터가 모두 던전 안에 있냐는 뜻이냐면 맞아요. 던전 안에 있어요.”

몬스터가 던전 안에 있는 게 당연한데.

그걸 당연하지 않다는 듯 물어보니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설마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제발.

고개를 끄덕인 엘파니스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쪽에서는 영지 아니, 던전이 어떤 의미입니까?”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 공략해서 닫아야 할 타도 대상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여기는 던전이고, 눈앞의 할아버지는 이 던전의 주인이다.

대답에 따라 우리를 적대시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데, 유은담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남의 땅을 잡아먹고 생겨난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사냥터, 아이템이 쏟아지는 보물창고죠, 뭐.”

과연, 혈기왕성한 나이답게 거침없는 언사.

나는 약간 기겁해서 할아버지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의외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다.

“어디나 비슷하군요.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타락한 악의 무리가 도사리는 곳이며, 신의 이름에 따라 단죄해야 할 땅이라고. 그리고 침략자라고.”

엘파니스의 눈동자 위로 회한 어린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침략자 맞지 않나요? 오히려 아니라고 보는 것이 힘들어 보이는데.”

유은담이 살짝 날을 세우며 엘파니스에게 도발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엘파니스는 그저 슬픈 얼굴로 대답할 뿐이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세계를 침략하려고 온 다른 세계의 괴물이 아니라.”

엘파니스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호소하듯 말했다.

“피난민을 이끌고 도망쳐온 왕들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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