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4화 (94/231)

094화

우리가 서 있는 오솔길 위, 성벽이 있는 방향에서 두 명의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같은 데서 입을 것 같은 치렁치렁한 토가를 걸치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두터운 판금 갑옷을 입고 그 뒤를 공손히 따르고 있었다.

“다른 헌터일까요?”

내가 작게 속삭이자 유은담이 아리송한 얼굴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벌써 왔을 리가 없는 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하긴, 만약 진짜 왔다면 우르르 떼로 몰려들었겠지 저렇게 단 둘이서 방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저 옷.

너무 이질적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별난 차림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나는 아까 떠올랐던 메시지를 기억해냈다.

“인왕 엘파니스……."

내 말에 유은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마 나와 같은 방향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인왕이라고 했죠? 메시지에서.”

“맞아요.”

“그러면 저게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두 사람은 우리가 계속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몬스터, 특히 보스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으니 경계해야 하긴 하는데 외양이 사람인 데다 별로 공격적인 의사를 보이지 않아서 선제공격하는 것도 꺼림칙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나는 더욱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노인이네요. 뒤에 있는 사람은 손자뻘쯤 되는 것 같은데.”

가까이에서 본 남자는 빛바랜 긴 금발을 목덜미쯤에서 대충 묶은 노인이었다.

아무래도 저 사람이 인왕 엘파니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일단은, 푸른 눈의 금발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인 같은 생김새였다.

마치 성자라도 된 것 같이 인자하고 유순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해버렸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 뒤에서 우리를 경계하던 기사가 움찔하더니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왜 인사를 하고 그래?

“아니, 저도 모르게……. 너무 어르신이라……."

서지한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보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다행히 저쪽에도 너와 비슷한 사람이 하나 있는 것 같군.

“인사성 밝고 좋잖아요.”

아무튼 마주 인사를 해 준 기사 덕분에 나는 두 사람에 대한 인상이 좀 좋아졌다.

노인도 마찬가지인지 나를 보는 표정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어디든 인사 잘해서 손해 볼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우리는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스킬을 발동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 머리 위의 뿔은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마력을 머금고 빛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충왕포를 쓸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되도록 저 할아버지에게 스킬을 쓸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진짜 보스 몬스터인가?

정말로?

저 할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거야?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우리들을 조용히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독 내 머리 위의 뿔에 시선이 오래 머무른다 싶더니 나를 보며 무언가 말을 건넸다.

“-?”

영어였으면 좋았겠지만 노인의 언어는 귀로 잡아채기도 힘들 만큼 낯선 발음이었다.

약간 중국어처럼 들리기도 하고 프랑스어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아무튼 잘 모르겠다.

“뭐라고 하는 거죠?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유은담이 고개를 낮추어 슬쩍 귓속말을 해왔다.

“저도요. 아, 소통 유과가 도움이 될까요?”

“잘 모르겠어요. 아마 안 될 것 같은데.”

“하긴, 건넨다고 해도 먹어 줄 거라는 보장이 없네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대치만 하고 있는데 계속 말을 건네던 노인이 약간 난감하게 기사를 돌아보더니 뭔가 말했다.

거기에 기사가 반대하는 듯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잠시 실랑이하던 두 사람은 결국 노인의 의견에 따르기로 한 것 같았다.

노인이 앞으로 나서자 기사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걸 보고 있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얼굴인데 갑옷 탓인지 체구는 반서후에 비견될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

우리를 향해 손짓한 노인은 몸을 틀어 다 무너진 성을 가리켰다.

그리고 몇 번 더 손짓하더니 천천히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우리가 따라오는지 돌아보다가 잠시 멈춰서 기다렸다.

“따라오라는 것 같은데……."

서지한을 흘끔 쳐다보니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모았다.

대신 유은담이 내 말에 대답했다.

“황당하네요. 이거 사람 홀리는 종류의 몬스터는 아니겠죠?”

사람 홀리는 몬스터? 그런 것도 있나?

- 세이렌이나 정신계 몬스터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어왕류 던전에서는 종종 나타난다고 들었지만 보통 매력적인 이성으로 보이는데.

아, 진짜 그런 게 있구나.

“세이렌 같은 그런 거 말하는 거죠? 서지한 씨 말로는 보통 매력적인 이성으로 보인다고 하는데요.”

내 말에 유은담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까요. 음, 이성이지 않나요?”

확실히, 저 노인도 기사도 둘 다 남자이긴 하다.

하지만 내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빠르게 대꾸했다.

“일단 저는 할아버지에게 유혹당하지 않아요. 설마 유은담 헌터……."

“저, 저도 아니에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남은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대화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반서후는 무덤덤한 얼굴이다.

음, 신빙성이 있긴 하는데.

여기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 아닌가. 친구를 방패로 만들려는 사람.

“쯧.”

반서후는 우리를 쓱 쳐다보더니 혀를 차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의 스킬은 여전히 활성화되어 언제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상태다.

“뒤로 붙어서 따라와.”

나와 유은담은 얼떨떨하게 그 뒤를 걷기 시작했다.

사실 걸으면서도 아직 갈피를 못 잡겠다.

내 머리 위의 뿔은 여전히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상태였다.

없애야 하나?

아니면 아직 상황을 봐야 하나?

- 스킬 유지해.

내 갈등 어린 표정을 보고 서지한이 나직하게 조언했다.

그래, 어지간하면 할아버지를 상대로 젊은이 셋이서 몰매를 때리는 패륜적인 싸움은 하고 싶지 않지만 아직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조심해야지.

그리고 진짜로 우리를 흘리고 있는 걸 지도 모르고.

나는 반서후의 등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런 나에게 유은담이 작게 소곤거렸다.

“지금이라도 공격할까요? 등을 보이고 있으니까 선제공격하면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도 안 통하고.”

상대가 할아버지라는 건 유은담에게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하나 보다.

나는 약간 기겁해서 얼른 말했다.

“하지만 되게 지쳐 보이는 할아버지인데 그건 좀 심한 거 아닐까요.”

"그렇게 변신한 걸지도 모르잖아요.”

듣고 보니 그렇긴 하는데.

일단 나는 유은담을 말리기로 했다.

솔직히, 진짜 공격할 필요가 있다면 서지한이 말했겠지.

이런 일에 있어서 나는 유은담의 판단보다 서지한의 조언을 더 신뢰한다.

게다가 유은담은 바르기스 보스전 말벌로 변한 바르기스를 예상하지 못 해서 죽을 뻔했잖아.

으음, 좀 경솔한 면이 있는 것 같아.

노인의 뒤를 따라 우리는 오솔길을 조용히 걸었다.

때때로 뒤를 돌아보며 웃어주기에 나도 애매한 기분으로 웃어주었는데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마침내 성벽 가까이 오자 아주 큰 전쟁을 치른 듯 반파된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두터운 철로 만든 문이 마치 종이에 구멍이 뚫린 듯 찢어지고 부서져있었다.

“이건……."

성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 후 본 모습에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덤덤하게 걸어가던 반서후조차 움찔한 것 같았다.

그야말로 참혹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마치 고대 로마의 번성한 도시를 미사일로 폭격하기라도 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부서진 지붕이 쓰레기처럼 거리를 막고 있었고 성한 집보다 부서진 집이 더 많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온전한 건물들이 한때 이 도시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조용히 말했지만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분수대를 박살내고 누운 거대한 석상을 발견했다.

얼마나 장엄한 크기인지 얼굴 크기가 내 몸의 네 배는 될 법하다.

군데군데 금으로 장식된 석상은 앞에서 걸어가는 노인의 얼굴을 닮은 것 같았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빛깔의 바닥 타일을 밟고 우리는 도시의 안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마침내 가장 안쪽, 말하자면 왕성쯤 되어 보이는 건물 앞에서 노인은 다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친절하게 미소 짓더니 안으로 쓱 들어가 버렸다.

- 따라 들어가 보자.

이 성은 도시에서 거의 유일하게 멀쩡한 건물이었다.

사실 안에 함정이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 들어가는 게 좀 꺼려졌지만 서지한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뭐, 그전에 이미 반서후가 성큼성큼 앞서 들어가 버렸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아주 예쁜 테이블에 새하얀 찻잔과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노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안으로 들어온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얼떨결에 앉고 나자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리더니 각자의 앞에 한 잔씩 따라주었다.

붉은 빛깔이 고운 장미차였는데, 향기가 굉장히 달콤하고 산뜻했다.

“우리 지금 던전 공략하러 들어온 거 맞죠?”

어디 여행지에나 있을 것 같은 신전 같은 건물에서 차향을 맡고 있으니 핫한 카페에 온 건지 던전에 들어온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인증샷이라도 찍어야 할 것 같다.

내 말에 유은담은 어깨만 으쓱했다.

지금까지 던전이라고 하면 충왕류가 키익거리는 이미지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예쁜 건물에서 차를 대접받고 있으니 뭔가 홀린 것 같은 느낌이다.

잠깐, 진짜 홀린 거 아냐?

그리고 뭐야, 이 자연스러운 흐름은. 차에 독이라도 탄 건 아니겠지?

왜 갑자기 우리가 차를 마시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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