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그러면? 서지한 말 듣고 한국 던전 다 닫으려고 움직여야 했나? 하루살이처럼? 다음 던전이 터지면 어쩔 건데. 적어도 그 시점에서, 나는 옳은 선택을 했어.”
“옳은 선택?”
“뒷배도 없는 오합지졸 헌터 몇이 모여서 길드를 만들었으면 그게 잘 되었을까? 막 나가는 놈들만 모여서 뭐가 되긴 했을 것 같아? 체계 갖춘 대형 길드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었을까?”
막 불씨가 붙어 타오르는 장작처럼 은은하게 시작된 반서후의 마지막에는 거의 폭발할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유은담도 지지 않았다.
“아, 그 권력자분들 심기 안 거스르고 흐름에 탑승하고 싶어서 친구를 내쳤다?”
“난 지한이를 내치지 않았다.”
"맞아. 지한이 형이 스스로 나갔지.하지만 그 후로 지한이 형 이름으로 더러운 짓들 벌어질 때 그걸 부정하지 않은 것도 형이잖아.”
타오르는 듯하던 반서후의 분노가 싹 가라앉았다.
그는 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던전 하나만 남겨두고 민간인들 지키게 한다고 했다며? 근데 지금 던전이 몇 개지? 여섯 개야. 아, 바르기스 던전 닫혔으니까 다섯 개구나. 그리고 지금 그 높으신 분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던전 독식하고 마켓을 장악하려고 제작계 헌터들도 죽이고 있지. 공격력 강한 전투계 헌터도.”
비웃듯 그렇게 말한 유은담은 반서후를 노려보며 씹어 뱉듯 말을 던졌다.
“사실 내가 암현 길드장 자리 받아들인 건, 지한이 형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야.”
“부탁?”
“그래. 언젠가는 놈들이 형도 노릴지도 모르는데, 방어계 헌터인 서후 형은 상대하기 버거울 테니 도와주라고. 대신 길드 안이 아니라 밖에서 견제도 하는 형태로.”
"……."
"하지만 그땐 지한이 형도 몰랐겠지. 서후 형이 친구 이름까지 더럽히면서 그놈들한테 딸랑거릴 줄은.”
"유은담.”
“나한테 속았다느니 하면서 잘난 척하지 마. 진짜 속은 게 누군데.”
그 후로 반서후는 약간 기운이 빠진 얼굴로 물러났다.
말싸움은 유은담의 대승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공격했던 것 같은데, 반서후는 이제 나를 의심할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지한은 씁쓸한 얼굴로 이 싸움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상황이라면 위로라도 했을 텐데.
안타까운 기분으로 서지한을 바라보는데 유은담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손모아 헌터.”
"네, 네?”
반쯤 막장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던 나는 갑자기 돌아온 화살에 깜짝 놀랐다.
유은담은 예의 그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상냥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진짜 궁금하긴 하네요. 그 반지, 진짜 지한이 형 거예요?”
다른 때였다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젓고 잡아뗐겠지만 상대는 유은담과 반서후 다.
특히 반서후는 당치도 않은 거짓말 말라는 듯 나에게 경고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맞아요.”
결국 나는 진실을 말했다.
서지한도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냥 솔직하게 말해.
솔직하게?
어떻게?
그가 죽었다고?
서지한은 조금 망설이더니 아직 어두운 얼굴의 반서후를 잠깐 쳐다본 후 결심한 듯 덧붙였다.
- 내 유품이라고.
그게 본인의 뜻이라면 나도 반대할 수 없다.
하지만 서지한이 워낙 담백하게 이야기해서 얄팍한 이해관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 사람은 내 생각 이상으로 끈끈한 우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말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조금 염려되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 더 감추는 것도 의미가 없겠지.
나는 긴장을 푸려고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진실을 밝혔다.
“이건, 서지한 헌터의 유품이에요.”
"뭐라고?”
“예?”
반서후도 유은담도 크게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아마 두 사람의 예상을 크게 웃도는 내용이었나 보다.
아무래도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나는 서지한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덧붙였다.
“지난번, 강남에 새로 생겼던 충왕류 던전에서 서지한 헌터가 저를 구해줬어요.”
“그러면……."
유은담이 무언가를 추측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맞아요. 그때 보스 몬스터에게 단독으로 맞서다가 서지한 헌터는 치명상을 입었어요.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사망했고요.”
충격 어린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약간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저질러버렸다는 느낌이 더 강했지만 그래도 내내 숨기던 것을 결국 밝혔다는 해방감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몹시 당황했다.
얼어붙은 것처럼 넋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반서후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마치 석상이 우는 것 같았다.
반서후의 얼굴에는 보편적인 우는 얼굴에 필요한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입매가 흐트러지거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 같은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반지가 진짜 서지한의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놀란 듯 넋 나간 얼굴에서 눈물만 줄줄 흘렀다.
약간 붉어진 눈가만이 반서후가 진짜 울고 있다는 느낌을 간신히 전달할 뿐이다.
코에 물을 넣어서 눈으로 나오게 한다고 해도 저것보다는 감정적일 거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 극한까지 억제된 감정 때문에 나는 반서후가 굉장히 슬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이, 이 새끼 왜 울어…….
서지한은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슬퍼하는 정도는 예상했지만 울기까지 할 줄은 몰랐던 듯하다.
하지만 그건 나와 유은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반서후 본인도 스스로의 눈물에 무척 놀랐는지 난감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아냈다.
나와 유은담이 필사적으로 반서후의 눈물을 못 본 척하는 사이 그는 몇 분간 일다가 말끔하게 눈물을 그쳤다.
그 울음을 외면하지 않은 건 내내 우는 반서후를 지켜보던 서지한 뿐이었다.
방금 있었던 일을 모른 척하는 반서후 본인조차 자신의 눈물을 외면하는 중이었는데.
“크흠, 의심의 여지없이 완전히, 정말로 죽은 건가?”
“네. 제가 그의 마지막을 지켰어요.”
사실 아직도 반서후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다.
하지만 우는 모습을 보고 나니 도저히 뾰족하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내 단호한 대답을 들은 반서후는 다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어도……."
정확히 뭐라고 말하는 건지는 못 들었지만 자책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아마 귀가 밝은 서지한은 그가 뭐라고 하는지 들었겠지.
서지한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드리우는 것으로 나는 내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반서후를 보고 있으니 무뎌져 가던 서지한의 죽음이 다시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가 죽은 직후에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너무 정신이 없어서 금세 잊었고, 이후에는 영혼의 형태로 내 곁에 내내 자리했으니 통상적인 죽음과 너무 달라 죽었다고 느낄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친구를 보자 잊고 있던 슬픔이 다시 밀려들었다.
- 모아야.
내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서지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어.
느닷없는 요청에 나는 잠시 그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금방 그가 뭘 원하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친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예상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 반서후에게 내 영혼석을 만지게 해 줘.
그가 말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의 영혼석을 주머니 속에서 꼭 쥔 상태였다.
그의 죽음을 다시 기억해낸 현재로서는 그가 무슨 부탁을 하더라도 거절할 수 없을 테니까.
예전에 아주 잠깐 다른 사람이 영혼석을 만진 적이 있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다가 점원의 손이 영혼석에 닿은 것이다.
한 손에 영혼석을 들고 있다는 걸 잊고 영수증을 받으려다가 일어난 잠깐의 사고였다.
유령? 이라고 혼잣말하며 잠시 굳었던 점원은 곧 ‘요즘 피곤한가? 헛것이 보이네’하고 넘어갔지만.
이 일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서지한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소유자인 나와 달리 영혼석에 신체가 접촉하고 있는 동안에만 볼 수 있었지만.
즉, 반서후에게 서지한의 영혼석을 만지게 하면 그도 서지한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지한의 영혼석이고 서지한 본인이 원한다면 나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로 말미암아 내 채집 스킬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도 있었다.
아직 유은담과 반서후를 완전히 믿지 못 하는 나로서는 무척 위험부담이 큰 행동이다.
그것을 서지한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무척 미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우는 반서후와 너무 충격받아 말도 못 하는 유은담을 보니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도와준 서지한을 위해서라도.
“두 사람에게 말할 게 있어요.”
긴장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굉장히 딱딱하게 나왔다.
나는 더 시간 끌지 않고 곧바로 덧붙였다.
“서지한 헌터, 만나게 해 줄 수 있어요.”
“네? 어떻게요?”
“지금 저와 함께 있어요.”
눈을 깜빡이던 유은담은 잠시 고민하더니 나름대로 무언가를 추리했는지 그럴싸한 가설을 내놓았다.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뭐, 그런 의미인가요?”
“아니요. 지금 여기에 있어요. 그의 영혼이 여기에 있다는 뜻이에요.”
"그, 손모아 헌터. 혹시 유령이나 그런 거 믿어요?”
가능한 한 비웃거나 조롱하는 뉘앙스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며 유은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서후는 대놓고 이상한 사람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움직이기로 했다.
이럴 때는 말보다는 행동이다.
서지한의 영혼석을 꺼내 들고 반서후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영혼을 보려면 영혼석에 닿아야 한다.
“손 줘요.”
매우 꺼림칙한 표정을 지은 반서후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곰 같은 손 한 짝을 내밀었다.
내가 그 손에다가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검지 끝에 영혼석이 약간 닿게 했다.
“이봐, 함부로 내 손을……."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반서후의 목소리가 딱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