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1 화 (91/231)

091 화

듣고 보니 반서진, 반서후. 이름이 꽤 비슷하구나.

가만히 보니 얼굴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으음, 날카로운 눈매가 특히 닮은 것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상이 너무 달라서 그냥 봐서는 남매지간이라는 걸 전혀 모르겠다.

- 동생이 있다고 들은 것 같긴 하는데. 하긴, 반 씨 성이 한국에 흔한 것도 아닌데 왜 몰랐지?

서지한도 처음 알았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반서진을 보는 자리에서 전혀못 알아봤었지.

하지만 이해한다.

진짜 안 닮았으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도 우리랑 같은 처지라는 거죠.”

“같은 처지요?”

“그들에게 찍혀나갈 처지?”

유은 담은 빙긋 웃었지만 나는 마주 웃을 수 없었다.

한국 신문 어디에도 천공 길드에 이상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심지어 반서진 헌터와 그가 가족이라는 내용조차 없었다.

둘이 짜고 나 속여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다 거짓말 아니야?

내 눈에서 불신의 기운이 가시지 않자 유은담은 약간 난감해하더니 목소리를 좀 더 달콤하게 바꾸어서 애원하듯 말했다.

“진짜예요.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제가 곤란하게 하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속이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반서후가 워낙 위압감이 강해서 그런지 쉽사리 경계를 풀기가 힘들다.

“신문에는 그런 내용 없던데요.”

여전히 경계하긴 하지만 내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유은담도 그걸 깨달았는지 약간 여유를 되찾았다.

“그건 저쪽이 나중에 쓸 카드라서 아직 공개 안 한 거예요. 아참, 참고로 암현 길드는 해체됐어요. 그것도 기사로 안 나왔죠?”

나는 약간 놀랐다.

청소를 하고 있다고 해서 길드 내에 배신자들 축출하고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길드를 해체해버렸다고?

“배신자가 생각보다 되게 많더라고요. 그리고 저 수배상태예요.”

네?”

“여기, 반서후 길드장도 감시당하는 상태고요. 저 형도 참, 얼마나 둔하던지 제가 알려주고 나서야 도청기랑 카메라를 발견했다니까요.

방어계 헌터는 진짜 둔하다니까. 자기 길드원한테 감시당하고 있는 것도 못 알아채고. 안 그래요?”

자기 길드원에게 독을 먹고 납치감금까지 당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그 이유로 기분이 크게 상한 상태라 저쪽에 붙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튼, 저 백수 되었으니 축하해주세요.”

“아, 축하드려요.”

얼떨결에 손뼉 쳐줬더니 유은 담은 해맑게 와와하며 기뻐했다.

반서후는 그와 대조되게 더욱 얼굴을 구겼다.

역시 내가 모르는 사이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진행되었구나.

“아무튼 그런 의미로, 저 형도 언제 찍혀나갈지 모르는 상태라는 거죠.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그래도 나는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반서후에게는 선입견이 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는 내가 살아있다는 정보를 그들에게 넘길지도 모른다.

“아, 형. 형도 뭐라고 말 좀 해봐.

거기서 무게만 잡고 있지 말고. 어휴, 저 꼰대.”

내가 좀처럼 반서후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자 유은담이 답답해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반서후는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고 우리 둘이 실랑이하는 것을 남일 보듯 보고 있었다.

“그래야 할 필요 있나? 시간 없으니까 입장이나 해. 난 공략 도와주러 온 거지 친구 사귀러 온 게 아니야.”

“아오, 진짜.”

차마 뱉어내지 못 한 욕을 몇 마디 삼킨 것 같은 유은담이 다시 안면을 바꾸어 나에게 살살 웃어 보였다.

“원래 저런 성격이에요. 손모아 헌터가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니까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네?”

사실 반서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바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내 가족을 위험하게 할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유은담과 달리 반서후는 그들에게 완전히 적대시되고 있는 상황도 아니니 우리와는 처지가 좀 다르다.

“시간이 별로 없는 데……내가 꿈쩍도 않고 여차하면 몸을 뺄 기미를 보이자 유은담이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신뢰할 수 없는 상대와 신규 던전에 들어간다는 건 정말 좋지 않은 것이라 내 판단은 거의 입장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 괜찮을 거야. 자기보다 약한 상대 약점 잡고 그러는 놈은 아니니까.

유은담이 그렇게 말해도 설득되지 않던 마음이 서지한의 목소리에 잠깐 기울 뻔했다.

하지만 금방 원위치를 찾았다.

내 안에서 반서후는 제 잇속을 챙기려고 옛 친구를 팔아먹는 몹쓸 쓰레기였다.

게다가 지금 태도도 굉장히 고압적이라 진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지한이 그의 뭘 믿고 ‘그러는 놈’

이 아니라고 변호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반서후는 못 믿을 인간이었다.

“아무튼 그 부분은 진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겠는데, 손모아 헌터에게는 그게 있잖아요.”

“그거요?”

유은담이 내 옆에 바짝 붙더니 귓가에 아주 작게 들릴 듯 말 듯 소곤거렸다.

“증거.”

증거?

아, 영상.

그 던전에서 입수한 영상을 말하는 것 같다.

반서후가 이 영상을 원할 거라는 뜻인가?

하긴, 이게 있으면 반서진의 결백은 증명되긴 하지.

으음, 그런 면에서 같은 배를 탄 셈인가.

“그거 때문에라도 손모아 헌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태니까. 네?진짜 저 형 그럴 사람 아니에요.”

"음."

사실 가족들은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다.

누군가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내 호숫가 집으로 도망칠 것이다.

그리고 반서후에게 얼굴을 들키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들킨 이상 늦었다.

“들어가요.”

어차피 늦었다면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도 무의미하다.

내 말에 유은담은 반색하더니 손을 뻗어 얼음 통로를 길게 빚어냈다.

우리는 묵묵히 통로를 걸어 던전 입구로 향했다.

물속에서 보는 던전 입구는 진짜 이상한 느낌이다.

물을 빨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냥 흐름만 만들 뿐이고 진짜 바닷물을 빨아들이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얼음 벽 너머의 던전 입구를 바라보고 있자 유은담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반서후도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길고 가느다란 유은담의 섬세한 손과 주먹으로 못도 박을 수 있을 것 같은 투박한 반서후의 손을 각각 잡고 던전 소용돌이로 뛰어들었다.

- 성?

우리가 들어온 곳은 어느 숲 속 오솔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숲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자세히 보니 성벽 군데군데가 부서져 있었다.

그 너머에 있는 반파된 성과 드문드문 남아 있는 지붕이 날아간 첨탑도 보였다.

“이런 곳은 처음이네요.”

유은담이 신기하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서지한도 마찬가지였다.

- 이런 식으로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는 던전은 처음 봐.

“일단 저 성벽 너머로 가볼까요?”

내 손을 놓은 유은담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이어 따라가려는데, 몸이 덜컥 당겨졌다.

돌아보자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는 반서후가 보였다.

“뭐예요?”

질문을 던졌으나 돌아온 것은 강렬한 시선이었다.

그는 내 손을 꽉 붙잡고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적대감이 팽팽 한눈으로 나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왜 그래? 서후 형?”

이상함을 느낀 유은담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말 없던 반서후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이 여자 못 믿어.”

뭐? 형,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반서후가 꽉 잡은 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서지한에게 무슨 짓을 했지?”

그의 시선은 서지한이 나에게 준 묵시의 청금석 반지에 못 박혀 있었다.

공략을 앞두고 나는 당연히 유용한 묵시의 청금석 반지를 착용하고 온 상태였다.

만약 반서후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끼지 않았을 것이다.

“형? 손모아 헌터 놀라셨잖아.”

다가온 유은담이 내 편을 들었다.

반서후는 그에게도 내 손을 끌어다가 반지를 보여주었다.

“너는 이거 못 알아보겠어?”

"그게 뭔데.”

유은담은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던전을 같이 돈 적이 별로 없어서 모르나 보군. 이거 서지한 아이템이잖아. 묵시의 청금석 반지.”

청금석 반지가 한두 개야? 일단 손부터 놔드려.”

“모르나 본데, 묵시의 청금석 반지는 단 하나뿐인……."

“놔드리라고.”

방금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던 얼굴을 싹 굳히고 유은담이 낮게 경고했다.

주변 온도가 약간 내려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싶더니 사방에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명백한 무력시위에 반서후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내 손을 놔주었다.

- 괜찮아?

잠깐 잡혔는데 팔목이 붉어졌다.

손은 피가 안 통해서 저릿저릿했다.

내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있자 서지한과 유은담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유은담. 너도 속은 거야. 이 여자가 너 구해줬다고 너무 믿지 마. 그것도 전부 연출된 것일 수도 있다는 거 왜 몰라?”

“나를 끌어들이려고 꾸며낸 거였다고?”

“그래.”

유은담은 코웃음 쳤다.

“언제부터 그렇게 눈치가 빨라졌어? 형이 알 정도면 내가 못 알아챌 것 같아?”

"너……."

“이제 슬슬 형의 생각이 늘 옳지만은 않다는 거 인정할 때도 됐잖아.지한이 형만으로는 희생자가 부족했어?”

반서후의 얼굴이 냉담하게 얼어붙었다.

그전까지는 분노라도 표시하고 있었는데 마치 껍질을 두른 듯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이다.

감정을 숨기려는 듯 몹시 방어적인 표정.

나는 이 표정을 알고 있다. 상처 받았을 때 숨기려는 얼굴이다.

“그런 거 아니다.”

반서후가 딱 잘라 말했지만 유은담은 오히려 더 타올랐다.

“형이 지한이 형 말만 들어줬어도 그렇게 길드 나갈 일도 없었잖아.”

"모르면 조용히 해.”

“내가 뭘 모르는데? 형, 내가 뭘 모를 것 같아? 대한 길드에서 던전 보스 안 잡는 대신 천공 길드 전폭 지원하기로 했다는 거? 아니면 형네 반 씨 가문 어르신이 그 사람들 말 들으라고 지시해서 형이 고분고분 따른 거?”

“그런 거 아니라고 했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겠지. 형은 겁쟁이야.”

반서후의 얼굴에 노기가 진하게 드러났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