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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화 (90/231)

090화

“으음, 유은담 헌터는 여기에 신규 던전 생긴 거 어떻게 알았어요?”

“이 근처에 제 은거지가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솔직히 좀 수상하기도 하고 별로 가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계속 거절할 수도 없었다.

기분이 상한 유은담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흘리거나 하면 나만 큰일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어서 보스 잡아버리죠.”

내 망설임에 쐐기를 박듯 유은담이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결국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여러모로 때가 안 좋은데.

- ‘상태 이상: 포션 중독’

지속시간 4시간 24분

아직 포션 중독도 끝나지 않았고, 가고 싶지 않지만 이 이상 거절해서 유은담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도 후환이 무섭다.

유은담은 그럴 의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괜히 약점 잡혀서 강제로 움직이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알았어요. 준비하고 바로 갈게요.”

“네!”

나의 찜찜한 기분은 그저 기우라는 듯 유은담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그냥 보스 잡는다고 신난 어린애 같은 느낌인데, 설마 함정은 아니겠지.

- 왜 일어나?

“유은담 헌터가 오래요. 신규 던전 터졌다고 보스 같이 잡자는데요?”

- 이 시간에? 피곤하다며.

인형에서 빠져나온 서지한이 탐탁지 않은 듯 이마를 찌푸렸다.

“저도 내키지는 않는데, 꼭 오라고 해서.”

- 나도 별로야. 괜히 갔다가 신변만 드러나면 손해잖아.

예전이었다면 어서 보스를 잡으러 가라며 등 떠밀었을 것 같은데 서지한은 의외로 내 편을 들어주었다.

“저도 그걸 말했는데, 다른 사람은 아직 던전 열린 것도 모를 거래요. 바닷속에 열린 던전이라.”

- 바다?

“네, 유은담 헌터 은거지가 독도 인근인데, 그쪽에 던전이 열려서 마침 제일 먼저 알게 됐대요.”

내 말을 들은 서지한은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 하긴, 예전에 바다에 은거지를 짓겠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해.

“그래요?”

아무래도 나를 꾀어내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닌 것 같다.

- 그런데 너 포션 중독 아직 안 풀렸지?

나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하고 이동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흐려지는 풍경 사이에서 언 듯 서지한이 혀를 차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오셨어요?”

사진 속의 장소로 이동하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유은담이 냉큼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본모습은 갇혀 있느라 좀 꼬질꼬질해진 상태였는데, 지금은 꽤 신수가 훤하다.

끝만 하얗게 탈색한 새털 같은 머리카락이 기합이 바짝 들어가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형태는 다르지만 공작의 꼬리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장비 아이템으로 보이는 근사한 금실 자수가 놓인 남색 로브도 입고 있어서 야상 점퍼를 대충 꿰어 입고 온 나와 무척 비교되었다.

“안녕하세요.”

바다 한복판이라 그런지 해풍이 무시무시했다.

나는 미친 듯이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수습하며 꾸벅 인사했다.

“와주셨군요!”

유은담은 반가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활짝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독도로 보이는 커다란 섬 두 개가 보였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아마 독도 인근의 작은 부속섬인 것 같았다.

- 야, 얘 향수 뿌렸는데?

기가 막힌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서지한이 지적했다.

사실 나도 느끼고 있었다.

유은담이 가까이 오니 해풍을 타고 강렬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던 것이다.

시트러스와 머스크 향이 섞인 약간 어른스러운 향이다.

향 자체는 좋았다.

그런데 던전 공략하러 들어가는데 왜 향수를 뿌리고 온 건지 모르겠네.

유은담의 차림새만 보면 어디 공연장에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인데.

- 웃긴 놈이네.

에이, 너무 그러지 말아요. 꾸미기 좋아할 나이잖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악취가 나지 않는 게 어디야.

“저기인가요?”

나는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아까부터 거대한 소용돌이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굉음을 내는 중이었다.

저 아래에 있는 던전이 해수를 빨아들이면서 생성된 소용돌이 같다.

던전 안에 바닷물이 쏟아지고 있겠는데.

이거 던전이 물 너무 많이 빨아들여서 해수면 낮아지는 거 아냐?

“네, 맞아요.”

유은담은 흐뭇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시간은 밤으로 더욱 기울었다.

사진을 받을 때만 해도 노을이 보였는데, 이제는 정말 저녁 하늘이었다.

시커멓게 물결치는 검은 밤바다로 들어가는 건 누구라도 꺼릴 만한 일이다.

“진짜 들어갈 건가요? 위험할 수도 있어요. 예전 바르기스 던전은 유은담 헌터도 익숙한 곳이라 괜찮았지만, 저 던전은 처음 보는 던전이잖아요. 안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어요.”

눈앞의 던전이 뿜어내는 위용이 워낙 무시무시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앞날이 걱정되었다.

동행인 유은담이 그리 신중해 보이지 않아서 더욱 심란해졌다.

“그래서 잠깐 들어가 보려고요. 뭐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잡을 만하다 싶으면 잡죠. 흔치 않은 기회잖아요. 던전 독식이라니.”

들뜬 유은담을 착잡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서지한을 응시했다.

- 왜?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케르기스를 잡으러 왔던 서지한도 이렇게 서둘러 들어왔을까.

새삼 그 바쁜 와중에 나를 구해주고 갔던 것이 고마워졌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가죠? 수영으로는 좀 힘들 텐데. 옷은 여벌 옷이 있어서 젖어도 되긴 하는데.”

“에이, 젖긴 왜 젖어요.”

싱긋 웃은 유은담이 손을 뻗자 우리 바로 앞의 바다가 얼어붙었다.

흡사 얼음 파이프 같은 형태로, 안쪽은 사람 여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게.

나는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대로 던전 입구까지 얼음 파이프를 연결해 길을 내려는 것이다.

“이렇게 가는 거군요. 대단하네요.”

나는 굳이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그냥 뚫고 부수는 것만 할 수 있는데 진짜 활용도가 높은 스킬이군.

“별거 아니에요. 아, 그런데 들어가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떤……?”

“확실히, 어떤 환경일지 모를 던전이라 위험한 건 사실이에요. 만만한 던전이면 보스 잡고 아니면 바로 나을 생각이긴 하는데 보스가 갑자기 튀어나올 수도 있잖아요.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탈출도 안 되니까.”

“그렇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들어가지 말자는 건가?

하지만 유은담의 다음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래서 도와줄 사람을 한 명 불렀거든요.”

유은담은 손을 뻗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의 공간이 마치 커튼이 흔들리듯 일렁였다.

- 결계야. 아마 저 안쪽에 은거지가 있나 본데 마법진을 쳐서 숨겨놨나 보군. 마력계 헌터는 이런 잔재주가…….

중얼거리던 서지한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나도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

유은담의 등 뒤에서 너무나 뜻밖의 인물이 튀어나왔던 탓이다.

놀라서 시야가 흔들리는 느낌마저 드는데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모르는지 유은담은 태연하게 그를 소개했다.

“천공 길드 반서후 길드장이에요. 아시죠? 최고의 방어계 헌터. 안전의 대명사죠.”

잔뜩 찌푸린 얼굴의 반서후가 이쪽으로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바짝 깎은 스포츠머리에 위압적으로 벌어진 어깨.

일견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 탓에 나는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피했다.

만약 그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못생겼다면 조폭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아주 잠깐 유은담이 어디서 조폭을 하나 데려왔나 하고 생각했다.

간간이 신문에서 본 얼굴이라 아는 얼굴이긴 하는데 실물로 마주하니 그 압박감이 차원이 다르다.

키도 서지한보다 반 뼘 정도 크고 손도, 어깨도, 가슴도 큼직큼직해서 진짜 방어계 헌터의 표본 같은 남자였다.

인간 방패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와, 그냥 사람 자체가 엄청나게 단단해 보인다.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형, 이쪽이 내가 말했던 손모아 헌터야.”

분위기 파악을 못한 건지,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 건지 태연한 어조로 유은담이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하지 마.

소개하지 마.

아아악, 이쪽 보잖아.

왜 반서후가 여기에 있지?

하필 왜 반서후야?

그렇게 친했어?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유은담은 그래도 나이도 어리고 사근사근한 성격이라서 대하기가 비교적 편했지만 반서후는 다르다.

솔직히 나는 반서후에게 약간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은 서지한에게서 전해 들은 말들 때문이다.

서지한을 길드에서 내쫓고 제 이익을 위해서 나중에 서지한에게 누명을 씌우기도 한 나쁜 놈.

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거대 길드의 권력 쟁탈 음모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적.

잠깐, 내가 살아 있는 거 반서후가 알면 안 되는 거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유은담을 향한 불신이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반서후를 여기 데려온 거지?

내 상황을 알면서.

미리 말해줬다면 얼굴이라도 가렸을 텐데.

“아, 괜찮아요. 서후 형은.”

원망 어린 감정이 내 얼굴에 드러났는지 유은담이 약간 놀라더니 달래듯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해도 바로 믿을 수 있을 리가.

이쪽엔 가족들의 안전이 달려 있다.

지금이라도 가족들에게 가서 피신시키는 게 좋을까 싶어 주춤주춤 물러서는데, 유은담의 다음 말이 내 다리를 붙잡았다.

“반서진 헌터 아시죠? 그 사람 오빠예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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