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8화 (88/231)

088화

톡, 톡톡, 톡.

골목 쓰레기 뒤로 조용히 숨어드는 작은 벼룩.

그게 나다.

지금 나는 누가 보더라도 손색없는 한 마리 벼룩이 되어 있었다.

한국이 아침이 될 때까지 호숫가에서 벼룩의 모습으로 뜀뛰기를 연습한 덕분이다.

그래,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벼룩이 된 게 뭐 대수야?

어차피 변신이잖아.

예에, 내 벼룩 점프는 세계 최고라네. 엄청 빠르다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 걸 모른다네!

벼룩의 입이라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머릿속으로나마 흥얼거리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앞다리에 끼운 서지한의 영혼석을 꼭 쥐었다.

영혼석은 벼룩이 된 내 몸의 크기에 맞춰 모래알만 한 크기로 줄어든 상태였다.

영혼석뿐만이 아니라 이 상태로 인벤토리에서 꺼낸 스크롤, 포션 등의 소비 아이템도 모두 벼룩 크기로 작아진 상태로 꺼내졌다.

쳇, 만약 크기 조절이 안 되면 그 핑계로 서지한은 인벤토리에 넣어두려고 했는데.

어쨌든 같이 가고 싶다는 그의 주장을 존중하려고 일단 들고 왔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에 한국에 오는 것 같다.

이 보도블록, 건물들, 길가의 가로수마저 반갑다.

저마다 커피 한 잔씩 들고 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들의 아침 풍경도 좋았다.

사실 날짜로 따지면 그리 오래 한국을 떠나 있던 건 아니었는데 아마 내 생각 이상으로 나는 한국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 모아야, 저쪽.

영혼석의 크기에 맞춰 몸을 작게 줄인 서지한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손짓하기 전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멀리서 낯익은 형태의 사람이 비칠 비칠 걸어오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건물은 던전 관리청이다.

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사람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찾는 인물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도 안 보이고, 행인들 때문에 그 모습마저 깜빡깜빡 가려지지만 신기하게도 확신할 수 있었다.

엄마다.

힘없이 걸어온 엄마는 던전 관리청 앞에 서서 피켓을 펼쳤다.

실제로 본 엄마는 기사 속의 사진보다 더욱 초췌한 모습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칼과 푸석한 피부.

아무거나 걸치고 나온 것 같은 옷차림의 엄마는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얼굴의 간절한 감정만은 강렬했다.

행인들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서둘러 던전 관리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간혹 혀를 차거나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 괜찮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게 서지한에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역시, 다소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엄마에게 내가 살아 있는 걸 전하는 게 좋겠어.

나는 인벤토리 안에 있는 쪽지를 떠올렸다.

벼룩의 몸으로는 엄마에게 말을 할 수 없으니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그 안에는 그간의 간략한 사정과 내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살짝 튀어가서 엄마의 옷 주머니에 이 쪽지를 꺼내 넣어두고 올 생각이었지만…….

“아줌마,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어디선가 나타난 체구 좋은 남자 두 명이 갑자기 엄마 앞을 가로막았다.

정장에 선글라스. 전형적인 보안요원이다.

느껴지는 기운을 봐서는, 각성자다.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서는 근접계 헌터인 것 같았다.

단번에 시선이 모여들고 지나던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건 허가받고 하는 거예요.”

젊은 사람도 기가 눌릴 것 같은 덩치를 앞에 두고 엄마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는지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허가? 누구 허가받았는데요? 청장님 허가받았어요?”

“이거 아주 웃기는 아줌마네.”

빈정 거리던 두 남자는 결국 피켓을 들어 강제로 엄마를 이동시켰다.

그 무렵이 되자 출근 시간이 거의 지나서 행인의 숫자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보는 눈이 줄어들자 두 남자는 더욱 거칠 것 없이 행동했다.

“정 하고 싶으면 여기 구석에서 해요. 예? 눈에 거슬리게 하지 말고.”

“저기 앞에 나와서 눈에 띄면, 확! 알아들었어?”

엄마 앞에 손을 치켜드는 놈을 보고 나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그 앞으로 뛰쳐나갈 뻔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살기 어린 얼굴의 서지한이 손을 뻗어 필사적으로 나를 달래고 있었다.

- 모아야, 지금은 참자.

하지만 다음 순간, 한 놈이 엄마의 가슴팍에 피켓을 떠넘기며 확 밀쳤다.

기력이 없던 엄마는 그대로 골목 구석에 나뒹굴었다.

- 죽…….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서지한이 간신히 삼키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비슷한 상태였다.

지금 내가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었을 것이다.

나는 두 놈이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저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둘 거야.

두 남자가 멀리 보안 초소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엄마를 찾자 엄마는 피켓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새벽이슬에 젖은 바닥의 먼지와 흙이 옷에 묻어 온통 지저분해진 상태다.

부쩍 늙은 것 같은 얼굴의 엄마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더니 높디높은 던전 관리청 건물을 한 차례 응시하다가 말없이 피켓을 챙겨 등을 돌렸다.

두 놈이 엄마에게 강요한 자리는 던전 관리청 근처 오래된 좁은 골목 안이었다.

사람은커녕 고양이도 안 다닐 것 같은 외진 길이다.

여기에 서 있어봐야 보는 사람도 없으니 아무 의미가 없다.

이 그늘진 골목에 혼자 서 있으면 진짜 가슴이 찢어졌을 텐데, 다행히도 엄마는 집에 갈 생각인 것 같았다.

손에 든 피켓이 꽤 무거울 텐데 혹여나 땅에 끌릴까 봐 애지중지한다.

그 와중에 아까 밀쳐지며 발목을 다쳤는지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엄마를 보니 당장 돌아가서 그놈들 얼굴에 충왕포를 최대출력으로 한 방씩 먹여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를 따라가야 한다.

인근 도로에서 택시를 잡아 탄 엄마는 익숙한 주소지를 말했다.

승주의 자취집이다.

아슬아슬하게 톡, 톡톡 점프해서 택시에 같이 탄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엄마의 안색을 살폈다.

서지한은 나와 엄마 사이에서 양쪽의 얼굴을 다 살피고 있었다.

택시는 넓은 도로를 달려 좁고 지저분한 대학가 원룸 촌으로 접어들었다.

엄마가 들고 있는 피켓을 보고 택시 기사가 흥미를 보였지만 엄마는 대꾸할 기운도 없는지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마침내 승주의 자취집에 도착하잖아는 재빨리 엄마의 바짓단에 달라붙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살펴보니 지난번 설치되었던 감시카메라나 투명화 해제 아이템 같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난히 짙게 선팅 한 차량도 몇 대보였다.

언뜻 안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초조하게 서성이던 승주가 후다닥 달려와 피켓을 받아 들고 흙에 뒹군 엄마를 맞이했다.

승주의 얼굴도 무척 초췌해진 상태였다. 지난번 들었던 활달한 목소리가 환상처럼 느껴졌다.

“왜 혼자 갔어? 걱정했잖아.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

타박하면서도 승주는 얼른 엄마를 식탁 의자에 앉힌 다음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기도 했다.

나는 냉큼 나서서 ‘엄마 발목 삐었어. 아까 그놈들이’하며 끼어들고 싶었지만 신발장 아래에 있는 작은 카메라 렌즈와 눈이 마주친 뒤 승주의 운동화 끈 뒤로 몸을 숨길뿐이었다.

미친놈들, 집안에도 카메라를 설치했네.

“뭐야, 발목 왜 이래? 넘어졌어? 잠깐만, 약 가져올게.”

눈치 빠르게도 잠깐 사이에 엄마의 걸음걸이가 이상한 걸 깨달았는지 승주가 얼른 약을 가져왔다.

미동도 없는 엄마의 발목에 약을 바르고, 식탁에 마주 앉은 승주가 조심스럽게 물을 권했다.

“엄마, 그러다 쓰러지겠어. 물이라도 좀 마셔. 응?”

간곡한 승주의 권유에도 엄마는 힘없이 고개만 저었다.

애가 닳은 승주가 결국 울컥한 얼굴로 하소연했다.

“엄마 이러는 거 누나가 알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밥도 안 먹고…….”

승주는 말끝을 흐렸다.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서지한도 마치 우리 가족이 된 것처럼 안타까운 얼굴로 식탁 주변을 서성거렸다.

“모아는, 모아는 밥도 못 먹고 있을 텐데…….”

“엄마, 누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승주는 입술만 깨물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뒷말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승주 너도 모아가 죽었다고 생각해?”

“그게 아니라, 엄마 나는…….”

“네가 그랬잖니. 모아가 엄청 강한 헌터라고. 그러니까 안 죽는다고. 그랬지? 그랬지, 승주야? 엄마 봐봐. 그랬잖아. 모아가 엄청 강하다고.”

승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갓 스물한 살.

아직 대학교 친구보다 고등학교 친구가 더 많은 승주에게는 버거운 상황이다.

이만큼이나 의연한 것도 기특할 정도였다.

“나는 그 사람들 말 안 믿어. 승주야. 그 아가씨, 반서진 헌터와 직접 대면해서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 믿을 거야. 아무 증거도 없고, 정황도 없이 내 딸이 죽었다고 하는 거. 나는 못 받아들여.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승주야.”

결국 엄마의 눈물 어린 말에 승주도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몸 둘 바를 모를 기분이었다.

내가 실종된 건 사실 며칠 되지도 않았다.

일주일 좀 넘는 기간이었는데, 엄마가 이만큼이나 힘들어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쪽지를 확인했다.

원래대로라면 이 쪽지만 주머니에 남긴 채 떠나야겠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엄마에게 직접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전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애초에 이 쪽지를 엄마가 믿을지도 의문이었다.

눈물을 쏟던 엄마는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는지 앉은 채 휘청했다.

놀란 승주가 후다닥 부축하자 손을 저어 괜찮다 표시하더니 비척비척 일어났다.

“나 좀 쉬어야겠다.”

“응, 엄마. 쉬어. 어젯밤에도 우느라 잠도 못 잤잖아. 뭔가 좀 먹고 자는 건 어때?”

“아니, 속이 안 좋아서.”

“그래? 내가 죽이라도 사다 줄게. 누워 있어, 엄마.”

말을 마친 승주는 잡을 틈도 없이 얼른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섰다.

나는 혼자 남은 엄마의 외로운 등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등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 이불 위에 눕는 것까지 보았다.

엄마 앞에 나타나야 한다.

내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그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벽지에 붙어 천장과 벽을 기어 다니며 카메라가 있는지 확인했다.

- 카메라 찾아?

눈치 빠르게 서지한은 내 움직임을 읽고 카메라를 찾는데 동참해주었다.

그 결과 찾아낸 카메라는 두 개.

문 경첩 위에 하나, 천장 구석에 하나.

방 안을 사각지대 없이 찍고 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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