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기사는 건조한 논조로 엄마가 원하는 것은 반서진 헌터와의 단독 면담이며, 실제로 던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과정을 상세히 알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혹시 다른 내용이 더 있을까 쭉쭉 스크롤을 내렸더니 험한 말이 난무하는 댓글창이 보였다.
oh**** 06:51:03
애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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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i**** 06:54:08
졸라 유난이네. 손모아가 누구 닮았나 했더니 엄마 닮아서 관종 ㅇ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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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l**** 06:54:08
충왕류 던전이면 이야기 다 끝났네. 시신도 못 찾을 텐데 왜 소용없는 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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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 06:54:08
저게 부모 마음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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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uk**** 06:54:08
충왕류: 손모아 꺼억 잘 먹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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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ww**** 06:54:08
이미 죽은 거 왜 저러는지. 누구한테 돈 받고 저러는 거 아닌가? 의심되네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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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k**** 06:54:08
에구, 마음이 안 좋네요.
⇧ 68 ⇩ 2
기계적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댓글을 확인하는데 그 위로 반투명한 손바닥이 끼어들었다.
고개를 들자 걱정스러운 얼굴의 서지한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 읽지 마. 기분만 상해.
서지한의 손바닥은 아무것도 가릴 수 없어서 아직도 잔인한 댓글들을 그대로 볼 수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기분으로 앉아 말없이 흙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친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만나러 가야겠어요.”
안절부절 내 기색을 살피던 서지한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삼켰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안다.
저쪽에 들키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말이겠지.
나도 안다.
알고 있다.
때로는 그냥 감내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는 걸.
하지만 며칠 사이 살이 쪽 빠져 야윈 엄마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설령 이것이 함정이더라도, 나는 엄마에게 내 생존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 어떤?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만나러 갈 수 있을까.
계속 그걸 생각했다.
사실 아직 확신은 없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바르기스는 날벌레로 변신하기도 했잖아요. 그러니까, 바르기스가 아니라 벌레라면 모두 변신할 수 있는 걸 지도 몰라요.”
말을 마치고 나는 바르기스가 변신했던 그 거대한 벌을 떠올리며 충왕 변이를 사용했다.
추측이 틀리지 않았는지 등이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반투명한 날개가 솟아오르고 엉덩이가 쑥 길어져서 벌과 같은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말벌이 되어 있었다.
- 그 상태로 날아서 가기라도 하려고?
그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인 것 같은데 나는 문득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몸이 바르기스가 변신했던 말벌만큼만 커질 수 있었어도 괴수 침공인 척하면서 가족들을 납치하듯 빼돌릴 수 있었을 텐데.
더 커지려고 몇 번 시도해봤지만 내 체구의 1.5배 이상으로 커지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말을 하기 위해 잠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엄청 커지면 좋을 텐데 일정 크기 이상 크게 변이 하는 건 안 되네요.
으음, 그럼 작게 되는 건 되려나?
“바르기스도 자기 몸보다 작은 말벌로 변이 했으니 몸을 줄이는 건 가능할 것 같은데.”
- 해보자.
“잠시만요.”
나는 다시 충왕 변이를 사용했다.
몸이 쑥쑥 줄어들면서 세상이 점점 커지더니 나는 어느새 작은 말벌이 되어 흙바닥에 서 있었다.
작게 변하는 건 되는군.
- 괜찮은데?
확실히, 이렇게 작아지니 그냥 일반 곤충 정도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날벌레가 되어 주변을 왱왱 날아다니면 언젠가는 파리채가 날아오게 될 것이다.
이 날개소리, 굉장히 거슬리니까.
하지만 그래도 뭔가 해답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크기를 줄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큰 소득이다.
나는 서지한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일단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다.
“일단 크기를 줄일 수 있고, 곤충 중 아무거나 변할 수 있는 것 같은데 날벌레는 주의를 끌기 쉬운 것 같아요.”
- 호.
서지한은 몹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뭐, 쓸 만한 곤충 아는 것 없어요?”
- 파리는 어때? 흔하고, 딱히 주의 끌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거야말로 주변에 날아다니면 거슬리는 곤충 1위잖아요.”
- 모기는?
“으음, 은신 능력이 쓸 만한 벌레이긴 하는데 날아다니는 속도가 좀 느리지 않아요?”
- 개미는?
“개미 걸음으로 엄마를 어느 세월에 따라가요.”
내 말에 서지한은 약간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 벌레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으음, 좀 고민해보죠. 저도 벌레는 잘 몰라서. 아, 인터넷에서 좀 검색해볼까요?”
- 그럴까? 그런데 뭐로 검색하게?
“기동력 좋고 눈에 잘 안 띄는 그런 벌레 어디 없으려나.”
고민하며 검색 결과를 확인하던 나의 손이 어느 지점에서 멈칫했다.
이건, 이 곤충이라면 충분히 조건에 부합한다.
나와 서지한은 동시에 벌레의 이름을 불렀다.
“벼룩.”
- 벼룩.
벼룩.
주로 동물의 털 사이에 숨어 들어서 피를 빨아먹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잔디나 흙에 숨어 있다가 산책 나온 강아지나 풀밭에 누운 사람의 피부에 달라붙는다.
사람이나 동물을 물어서 피부병에 걸리게 하거나 병을 옮기는 등, 모기에 비견될 만큼 인간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되는 해충 중의 해충이다.
하지만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엄청난 점프력을 기반으로 한 기동력도 갖추고 있어서 쓸데없이 신체 성능이 좋은 생물이었다.
그리고 이 은신, 추적에 최적화된 것 같은 신체 스펙은 지금 나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다.
- 괜찮겠어?
나는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스킬을 봉인한다느니 어쩌느니 했지만.
벌레가 된 내 몸이 징그러워서 토할 뻔했지만.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엄마, 나는 엄마를 위해서라면 벼룩도 모기도 될 수 있어.
“해볼게요.”
결연한 내 태도에 서지한도 덩달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깊게 심호흡하고 방금 휴대폰으로 봤던 벼룩의 모습을 떠올리며 충왕 변이를 사용했다.
사실 나는 벼룩이 어떻게 생겼는지 완벽하게는 모른다.
눈을 감고 ‘벼룩을 그려보세요’라고 하면 그릴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건 바르기스도, 바르기스가 변신했던 말벌도 똑같았다.
굳이 형태를 완벽하게 인지하지 않아도 그것이 곤충이고 어딘가에 존재하는 생물이라면 변신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스킬을 사용하자 변신은 간단하게 이뤄졌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내 몸은 점점 작아지고 변형되어 결국 모래알 크기에 비견될 만한 아주 작은 벼룩이 되고 말았다.
입고 있던 옷가지가 바닥에 후루룩 떨어졌다.
앞발 하나를 들어보니 뾰족한 앞다리에 반짝이는 팔찌와 반지가 꿰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템이 벼룩 크기로 줄어든 것 같았다.
던전 아이템은 사용자의 몸에 맞춰서 크기가 줄어드니까.
하지만 벼룩 크기까지 맞춰줄 줄은 몰랐어.
시스템의 고객 맞춤 서비스에 깜짝 놀라버렸다.
작은 동산처럼 보이는 옷더미를 헤치고 들어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서지한의 영혼석을 끄집어내자 이것도 스킬로 획득한 던전 아이템이라 그런지 크기가 쑥쑥 줄어들어 벼룩 맞춤 사이즈로 변했다.
- 모아야?
갑자기 사라진 내 모습에 불안해졌는지 서지한이 옷가지 주변을 서성거리며 나를 찾았다.
음, 일단 이렇게 변하면 된다는 걸 확인했으니 사람 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
이대로는 대화를 할 수가 없으니.
나는 다시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며 망토를 둘러 대충 몸을 가렸다.
옷까지 자동으로 입혀주는 서비스 좋은 변신 스킬이 아니라서, 알몸은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 우왓!
이런, 망토를 약간 늦게 둘렀는지 허벅지나 어깨 같은 게 좀 뒤늦게 가려 졌다.
서지한은 갑자기 솟아오른 살색에 기겁하며 눈을 가리고 돌아섰다.
평소였다면 나도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래도 좋은 느낌이다.
그렇군요. 서지한 씨.
저의 맨 어깨나 허벅지 정도를 보는 것이 부끄러운가요?
벼룩 모습이나 지네 모습이나 말벌 모습은 괜찮지만 어깨나 허벅지가 좀 드러나는 것에는 경악하다니…….
흠, 사실 지난 몇 달간 서지한과 너무 붙어 있어서 그냥 벗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벼룩 모습과 알몸 모습 둘 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인데, 벼룩을 텄으니 알몸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정신 차리자.
인간으로서의 존, 아니, 위엄, 아니, 아무튼 인간으로서의 아무거 나를 잃으면 안 돼, 손모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잃으면 안 돼.
“벼룩으로 변신되네요.”
내 목소리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흘러나왔다.
- 옷 입었어?
“망토 둘렀어요.”
그제야 서지한이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나는 반쯤 해탈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한국은 아직 아침이네요. 여기서 조금 시간을 보내다가 던전 관리청 출근 시간쯤 되면 한국으로 가죠.”
아마 엄마의 1인 시위는 그쯤 시작될 것 같았다.
어쩌면 엄마가 좀 더 늦게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기다리고 싶다.
- 그, 그래. 마력이라도 좀 회복하고 있을래?
“이 스킬 마력 안 들어요.”
- 뭐?
“아무것도 안 드는 것 같아요. 사실 변신하는데 체력도 안 들고. 이래서 바르기스가 반죽음 상태에서도 쓸 수 있었나 봐요.”
- 그러게. 변신하는 종에 제한이 있다고 해도 S급 변신 스킬인데 마력이 전혀 들지 않는다니. 어마어마한 장점인데.
“그래요?”
- 유은담처럼 마력을 봉쇄하는 아이템으로 너를 속박해놔도 그 변신 스킬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거잖아.
“아.”
듣고 보니 정말 굉장한 장점이긴 하는데 아무래도 감홍이 없었다.
왜, 왜 하필 벌레야.
왜 하필 벌레로만 변신할 수 있냐고.
S급 스킬이라서 어떤 봉쇄 아이템도 통하지 않고, 마력도 소비하지 않아서 마력을 쓸 수 없는 상황에도 이 스킬로 탈출을 도모할 수 있다니. 확실히 사기적인 성능 맞아.
하지만 진짜 아무런 감탄이나 기쁨도 느껴지지 않는다.
변신 가능한 종족이 벌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라리 포유류였으면 얼마나 좋아.
엄마에게 귀여운 길고양이가 되어서 다가가면 얼마나 좋으냐고.
하지만 나는 벼룩이다. 오늘의 나는 벼룩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효도하는 벼룩이 될게요, 엄마.
어떤 구역질 나는 모습이라도, 나는 견딜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이딴 건 아무것도 아니야. 가족을 위해서라면 나는 바, 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야.
진짜 힘들어.
하지만 견딘다.
그래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