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오,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뭔가 하고 있는데 내가 방해해버렸나 보다.
잠시 기다렸더니 유은담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 됐어요.”
진짜 신기하다.
마치 바로 앞에서 유은담과 대화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서지한은 약간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
- 연결됐어? 나한테는 안 들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신 와중에 제가 연락을 드렸나 봐요. 낮에 연락드릴 걸…….”
“예? 아니에요.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던 걸요. 딱히 뭐 바쁜 거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하, 그렇구나. 암현 길드 가시고 별일 없나 걱정되기도 해서 연락했어요. 알려드릴 것도 있고.”
“걱정하셨구나. 다행히 길드원 일부만 가담한 것 같아서 대충 마무리됐어요. 지금은 청소나 좀 하던 중이었어요. 오랜만에 돌아왔더니 치울 게 많더라고요.”
유은담 헌터, 청소 직접 하는 타입이구나. 깔끔한 성격인 것 같아서 호감이 간다.
“아하. 청소하시는구나. 바쁘시겠다. 그럼 얼른 말씀드릴게요. 제가 드린 뿔, 드세요.”
“예?”
“입으로 와작와작 먹으면 스킬이 생길 거예요. 저도 어쩌다 보니 알게 됐네요.”
“이걸 왜 씹어보셨어요? 혹시 지금 먹을 걸 구하기가 힘드신…….”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다급하게 정정했다.
그래, 이상하긴 하지.
보통 잘 안 하는 행동이긴 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별것 다 해보다가 그냥 한번 해본 거예요. 아. 그리고 저 휴대폰도 생겼거든요. 연락처 알려주시면 그쪽으로 번호 남길게요.”
시간이 약간 아슬아슬했는데 유은담의 연락처를 받아 등록하니 딱 맞게 연결이 끊어졌다.
잠시 유은담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 번호를 등록해두는데, 서지한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툭 던지듯 물었다.
- 청소한대?
“네? 네. 바쁜 것 같더라고요. 하긴, 집을 오래 비웠을 테니 대청소한 번 해야겠죠.”
- 흠, 그래?
“왜 그렇게 웃어요?”
- 아니야. 아무것도. 청소해야지. 대청소.
이상하게 혼자만 아는 듯한 웃음을 짓고는 내가 몇 번이나 물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근데 서지한 씨.”
- 응?
“낚싯대 없어졌는데요.”
사실 아까 반투명한 서지한의 몸 너머로 물고기 하나가 낚싯대의 미끼를 물고 사라지는 걸 봤지만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
* * *
“암현 길드 길드장이 천공과 접촉했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비서의 목소리가 무섭도록 경직되어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얼마나 개차반 같은 성격의 소유자인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재수 없으면 지금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술잔이 제 머리통으로 날아올지도 모른다.
“반응은?”
심기가 뒤틀린 어조의 짧은 물음.
이건 위험신호다.
비서는 더욱 머리를 깊이 숙였다.
“없습니다.”
“없어?”
“예, 아무런 반응이…….”
콰창! 하는 파열음이 비서의 말을 잘랐다.
얼음이 잘그락거리던 위스키 컵이 날아와 비서의 어깨를 스치고 떨어져 박살 났다.
머리를 노리고 던진 것이 분명한 각도에 비서의 뺨에 소름이 돋았다.
“엄 비서. 보고는 자세해야 해? 아니면 대충 해야 해?”
“자, 자세히 해야 합니다.”
“그래. 자세히 해야 할 거 아니야. 반응이 없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어? 반응이 없다는 게 무슨 소리야? 반서후가 찾아온 유은담을 그냥 무시했다는 거야? 아니면 대화를 했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둘이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발이 날아왔다.
먼지 한 톨 없는 엄 비서의 검은 정장 상의에 구두 자국이 뿌옇게 박혔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엄 비서는 미리 엄살을 떨며 몸을 날렸다.
버텨봐야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더 맞을 뿐이다.
“제대로. 제, 대, 로, 하자, 우리. 응? 정신 차려야 할 거 아냐?”
음절 하나마다 엄 비서를 걷어찬 ‘사장’이 씨근덕거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과 분노에 취한 주먹코도 볼품없이 붉어져 있다.
“술.”
손을 뻗자 대기하던 다른 비서가 재빨리 위스키 잔을 쥐어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술을 홀짝이며 ‘사장’이 턱짓했다.
“보고 계속 해.”
“예, 옛!”
바짝 긴장한 엄 비서는 다시 보고서를 세워 들었다.
이번에도 실수하면 술잔이 머리로 날아 올 게 분명했다.
“유은담 길드장의 방문 목적은 동태 파악으로 추측됩니다. 대화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유은담 길드장이 떠난 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요 내용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그 성격 급한 놈이 왜 뜸을 들이는 걸까?”
“큰일이 있었으니 좀 더 신중하게 움직이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쯧.”
‘사장’이 혀를 차자 엄 비서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한동안 ‘사장’의 술잔에서 얼음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일단 두고 보지. 어차피 반서후 길드장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해. 반서진을 잘 이용하면 손 안 대고 유은담을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군. 그래, 유은담이 어떻게 풀려났는지는 파악했나?”
“그것이, 감시하던 헌터들이 모두 전멸해서 아직 파악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내부자의 배신이 있었던 게 아닐까…….”
대답하는 비서의 등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사장’의 탐탁잖은 시선과 꽉 움켜쥔 유리 술잔이 더없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놈이 없군. 이래서 막 굴러먹던 놈들은 못 써먹는다니까. 안 그런가?”
“그, 그렇습니다.”
“이럴 때는 또 대답이 빨라요. 뭐, 됐어. 유은담한테 사람 붙이고 돌발행동 못 하게 팀 꾸려서 사냥 준비해. 반서후를 못 써먹을 때도 대비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재깍 고개를 숙이는 비서에게 다시‘사장’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백광현은?”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기사는 언제 나와?”
“일주일 안에 공략 실패를 비관해서 자살한 것으로 기사 날 겁니다. 관련 칼럼도 미리 준비해뒀습니다.”
“실수 없이 해.”
백광현은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것이 욕심만 많다.
‘사장’은 그런 주제 파악 못 하는 놈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 멍청한 얼굴로 혹시나 한 자리 떨어질까 돼지처럼 침 흘리던 얼굴을 떠올리면 짜증이 치밀었다.
살려두면 나중에 탈이 될 놈이다.
주제 파악 못 하는 놈 중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놈을 못 봤다.
쓸모를 다했으니 제거할 일만 남았다.
어차피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사장’의 번들거리는 눈이 살기를 담고 제 비서를 향했다.
지나치게 많이 아는 놈들.
그런 놈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또 보고할 건 있나?”
“밖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벌써?”
밖이라는 애매모호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사장’은 바로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그들이 주어 없이 밖이라고 부르는 건 하나뿐이다.
이 거사에 함께하고 있는 해외의 거대 길드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슬슬 마켓 압박 준비해.”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두 길드가 멀쩡한데…….”
드물게 토를 다는 비서의 행동에 ‘사장’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멀쩡? 네 눈에는 그게 멀쩡해 보이나?”
“죄송합니다.”
유은담이 풀려났다고 해도 암현 길드는 이미 제 손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다.
천공 길드도 반서진으로 흔들어대면 꼼짝도 못 할 거다.
사실상 제대로 된 길드는 이 대한 길드 하나만 남는 셈이다.
“저쪽에서 재촉하고 있어. 이쪽이 맞춰줘야 하는 상황이야. 던전도 하나 날아갔으니.”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던전을 독점하고 제작계 헌터들도 회유해서 끌어들였다.
말 안 듣는 놈들은 처리해 버렸으니 이제 한국의 아이템 생산과 공급은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자신만이 공급할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공급을 줄여야지.
그래야 희귀한 물건이 더욱 희귀해질 테니까.
아이템을 구하기 힘들어질수록 아이템을 독점하고 있는 자신의 권력은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헌터 마켓이라는 범지구적인 시장이 있는 이상 한국 혼자서 아이템 공급을 줄인다고 해도 그 효과는 미미하다.
해외 헌터가 등록한 아이템을 구입하면 되니까.
그래서 담합이 필요한 것이다.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아이템을 공급하고 있는 세계 거대 길드들의 담합 말이다.
비록 아직은 중국과 일본 등 몇 안 되는 나라와 손잡고 있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세계 아이템 공급량의 절반을 흔들 수 있다.
자신들이 아이템 공급을 한 번에 중단하면 공급량이 줄어든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아이템 시세는 상승하게 된다.
결국, 모든 길드와 손잡지 않아도 시세의 등락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한국의 던전 하나가 소멸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보물 광산이 하나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범인은 아마도 유은담이겠지.
역시 그놈은 살려두면 안 되겠다.
아무튼 해외에서는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이제 자신들만 움직이면 된다.
형태야 어떻게 됐든 한국의 두 길드가 제 역할을 못 하게 한다는 목표는 달성했으니 슬슬 작전을 실행해도 될 것이다.
이제부터 전 세계의 아이템 공급은 축소된다.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길드의 권력은 강해질 것이다.
아이템과 던전을 쥔 사람이 왕이 되는 세상.
힐링 포션 하나를 얻으려면 대통령도 제 앞에 와서 빌어야 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런 신세계의 시작점에서 쥐새끼 몇 마리 뛰어노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곧 전 세계가 이 흐름에 뛰어들 테고 다 함께 쥐를 잡으러 다닐 테니까.
“유족들 감시는 어떡할까요?”
“어떡하다니?”
“언제까지 감시해야 할지…….”
“쯧.”
‘사장’이 다시 혀를 찼다.
뭐 하나 알아서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일일이 지시해줘야 하는 답답한 것들 같으니.
“두 명은 유족이 없다고 했지?”
“예. 노희망, 노미래 헌터는 먼 친척이 있긴 하는데 의절한 지 오래됐다고 하더라고요.”
“왜?”
“도박하고 술 마시느라 가족들 병원비를 다 훔쳐다 탕진한 탓에 크게 싸운 것으로 보입니다.”
“쯧, 한심한 인생들.”
술로 목을 축이며 잠시 생각하던 ‘사장’이 드물게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모르니 돈푼 좀 쥐어 줘. 입 다물라고. 잘 굽실거리는 놈들로 보내서 뒤탈 없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손모아 헌터는 어떡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