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3화 (83/231)

083화

나는 해가 쏟아지는 호숫가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수평선과 바람결 따라 부서지는 파란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며칠 봤더니 이제 감탄하기도 새삼스럽다.

다시 보고 있던 인터넷 기사로 눈을 돌렸다.

“음.”

- 왜?

내가 끙끙거리자 저만치에서 낚싯대를 잡고 있던 지푸라기 인형이 후다닥 달려왔다.

낚시하다가 도리어 물속으로 딸려 들어갈 뻔한 적도 있는데 여전히 재미있나 보다.

위험하니까 안 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새 지푸라기 인형을 사러가기도 힘든 처지건만.

“오늘도 별다른 뉴스가 없네요.”

-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별일 없으면 좋은 거지.

“그야 그렇긴 하지만.”

승주의 집 근처에는 투명화 해제 결계가 설치되었다.

나중에 다시 찾아간 거제도의 엄마 집에도 똑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덕분에 투명화 스크롤을 써서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방법은 봉쇄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24시간 감시자가 붙어서 누구를 만나는지, 뭘 하는지 모두 관찰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접촉해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걸까?

사람을 바보로 아나, 뻔히 나를 노리고 있을…….

잠깐, 생각해보니 저들은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잖아.

가짜 서지한이 ‘거대 길드’ 운운하며 이것저것 쓸데없는 정보를 떠들어 댄 것을 저들은 모른다.

그 장면을 찍은 동영상은 내가 중간에 가로채버렸고,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도망친 복면인도 유은담이 죽여 버렸다.

남은 건 반서진뿐인데, 아무래도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내가 거대 길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던전에서 나오는 즉시 아무 생각 없이 가족을 찾아갔겠지.

나를 노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으음, 저들은 내가 음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확신하고 있나 보다.

어쩌면 진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어쨌든 내가 뭔가 아는 상태로 살아 있을 가능성은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음모를 다 아는 상태로 살아 있다는 걸 저쪽이 알고 있다면 가족들을 지켜만 볼 이유가 없지.

바로 납치해서 나를 꿰어낼 미끼로 썼겠지.

지금으로서는 저쪽이 그냥 신중하게 움직이고 싶어 졌다고 추측하는 게 가장 최선일 것 같다.

유은담이 탈출하고 던전이 무너지는 등, 저쪽 입장에서는 돌발 사건이 많이 벌어졌으니까.

이 이상의 돌발 상황은 예방하고 싶겠지.

“근데 진짜 조용하네요.”

- 호수가?

“아뇨, 호수도 조용하긴 하는데. 언론이요. 그 사람들이 여론 만들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하루 종일 특집기사 쏟아지고 모든 언론사에서 이 사건만 보도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반서진의 공판일이 잡혔다는 기사를 다 읽고 난 후 포털 사이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만 상황에 딱히 큰 변곡점은 없어 보였다.

생각만큼 대서특필하지도 않았고, 그저 수많은 범죄 기사 중 약간 큰 꼭지 정도로 취급될 뿐이었다.

다만 그 사건을 끌어와서 중소 길드를 성토하는 칼럼이나 헌터들의 폭력 사건을 재조명하는 르포가 많아지긴 했다.

이건 역시 다분히 의도적인 보도겠지.

그들이 말한 대로라면 이 칼럼과 르포는 모두 여론 형성을 위한 도구다.

하지만 그 모든 기사는 관심 있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냥 흘려버릴 수 있을 수준의 빈도로 보도되었다.

이 정도면 그냥 아무도 안 보고 넘어갈 것 같은데.

- 나는 꽤 크게 보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요?”

- 너는 잘 모르겠지만, 헌터들끼리의 폭력사건은 비일비재한 편이야. 살인도 가끔 나는 편이고. 나만 해도 날 찾아오는 밤손님들과 한바탕 했었는데 그게 어디 신문에 난 거 봤어?

못 본 것 같다.

내 표정을 보며 피식 웃은 서지한이 말을 이었다.

- 헌터들 간의 사건사고는 보도하지 않아. 민간인을 살해했다면 모를까, 어차피 비슷한 놈들끼리라는 거지.

“하지만 그, 김영길 헌터를 살해한 건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었잖아요.”

- 그는 제작계 헌터니까. 전투계 헌터끼리 싸우다 죽은 것과는 다르지. 그리고 명백히 의도가 있는 보도였잖아. 나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한.

“아, 그랬지.”

- 죽은 인물이 워낙 큰 손이기도 했고.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전투계 헌터가 제작계 헌터를 죽이더라도 그렇게 크게 보도하지 않아.

“아예 은폐하는 거예요?”

- 그냥 길드나 헌터 업계 내부적으로만 이야기가 도는 거지. 일종의 첩보전이나 특수 업계의 정보를 민간인이 모르는 것처럼.

내가 아리송한 반응을 보이자 서지한은 그냥 픽 웃어버렸다.

- 그리고 원래 조작은 대놓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 은밀하게 하는 게 더 잘 먹혀. 6대 4 정도로 마치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처럼 떠들다가 천천히 한쪽 방향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꾸며 내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서로 토론한 끝에 자연스럽게 이렇게 결론 내려졌다?”

- 바로 그거야.

어쩐지 서지한이 몹시 대견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지푸라기 인형에서 빠져나온 상태다.

오늘은 어쩐 일로 민소매에 반바지다. 나름 낚시 패션이라는 건가.

내 옷을 걸어둔 행거에는 서지한의 인형 옷이 걸린 작은 행거를 두었다.

매번 인벤토리에서 옷을 꺼내 주기도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알아서 갈아입어서 확실히 편하다.

게다가 옷을 다 갈아입은 후에는 롤 테이프로 홀린 부스러기를 청소하는 깔끔함까지 보여주었다.

“낚시는 잘 돼요?”

- 영 반응이 없네. 악어들이 물고기를 다 먹어 버렸나 봐.

“지난번처럼 지푸라기 인형 물에 안 빠지게 조심해요.”

- 알았어. 그래도 물고기 잡았으면 하고 내심 기대하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소스가 듬뿍 뿌려진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메뉴는 여느 때와 같다.

칠리소스를 뿌린 바르기스 뿔 핫도그. 소시지 대신 바르기스 뿔을 먹는다는 것 외에는 구성이 비슷하다.

뿔의 두께가 팔뚝 정도여서 진짜 핫도그처럼 끼워 먹지는 못 하고 그냥 빵 한 입, 소스 뿌린 뿔 한 입 이렇게 먹고 있다.

“뿔 먹기 바빠요. 여기 물고기들 크기도 장난 아니던데, 낚아도 그거 다 먹으려면 하루 종일 걸릴걸요.”

- 으음.

실망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는 걸 보니 약간 마음이 안 좋다.

너무 단호하게 잘라낸 것 같아서 나는 괜히 변명을 덧붙였다.

“서지한 씨도 알잖아요. 이 뿔, 빨리 먹어야 한다는 거.”

- 맞아. 어서 먹고 강해져야지. 포션은?

“아직요. 만드는 중이에요.”

- 오래 걸리네. 효과가 궁금한데.

김영길의 사념체는 지금 한창 제작실에서 포션 만들기 삼매경이다.

처음에는 쌓여 있는 재료를 보고 억울하다, 억울하다 울며 징징거리긴 했지만 재료의 등급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뀌어서 포션 제작에 몰두했다.

가장 흔한 F급 포션이 5분간 최대 5만큼의 능력치를 증가시켜주고, E급이 10, D급이 25만큼 증가시켜준다.

물론 이건 최대 능력치니까 재수 없으면 고급 포션을 먹었는데 수치가 1 오르고 끝날 수도 있었다.

마켓에서 구할 수 있는 포션 등급은 C급까지인데, B급은 길드 간부에게나 지급되고 평범한 헌터는 구경도 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때 유은담이 나에게 준 A급 공격력 증폭 스크롤은 진짜 어마어마하게 귀한 아이템이었다는 뜻이었다.

서지한조차 헌터 생활하면서 A급 포션을 딱 네 번 먹어봤다고 했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매물이 안 나와서.

그런 만큼 S급 핵을 재료로 만든 아이템이 얼마나 효과가 좋을지 무척 기대되는데, 포션 제작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무슨 더치커피도 아니고 재료를 정성스레 달여서 한 방울 한 방울씩 정제해서 병에 담고 있더라고.

그래도 오늘 오후쯤에는 한 병이 완성될 것 같으니 효과를 확인해볼 수 있겠지.

“으, 조금 쉬었다 먹을래요.”

- 너무 무리하지 마.

“케르기스 뿔은 너무 커서 엄두가 안 났는데, 이건 작아서 그런지 속도 좀 내면 금방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자꾸 욕심내게 되네요.”

- 이게 훨씬 작긴 하지. 그만큼 약하기도 하고.

호숫가 오두막을 부지런히 청소한 뒤 나의 일과는 대체로 바르기스의 뿔을 빨리 먹어치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새로운 스킬은 언제나 환영이다.

게다가 뿔을 다 먹고 나면 보너스 능력치 증가도 좀 될 테니까.

서지한이 먹은 악령 왕 실라기스의 뿔 조각은 딱히 능력치를 증가시켜주는 효과는 없었다고 했는데, 아마 조각을 먹어서 그런 것 같다.

온전한 실라기스의 뿔을 먹었다면 스킬도 한 개 더 얻고 능력치도 올랐을 텐데.

아무튼 하루라도 빨리 스킬을 얻고 싶다.

충왕 변이.

자세한 능력은 얻은 다음에 알 수 있겠지만 아마도 변신 계열의 스킬일 거라고 유추하고 있다.

이 스킬만 얻으면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고 가족을 만나러 갈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니 유은담은 먹고 있으려나? 암현 길드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다시 사로잡힌 건 아니겠지?

슬슬 연락을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가만, 한국이 지금 몇 시지?

어디 보자. 한창 밤중이네.

나중에 연락하는 게 좋겠…….

“아.”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 왜?

“제가 유은담 씨한테 말해줬던가요?”

- 뭘?

“뿔이요. 뿔 먹어야 스킬 얻을 수 있다고 말해줬나요?”

- 아.

나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뭐라고 했었지?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뿔을 먹으라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알고 있을까요? 스킬 얻는 방법.”

- 으음.

서지한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하긴, 그도 실라기스의 뿔 조각을 얻고 대체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알 수가 없어서 제작계 헌터를 수소문하다가 결국 한 입 먹어보고 방법을 알아낸 거잖아.

상식적으로 누가 몬스터 부산물을 먹어볼 생각을 하겠냐고.

채집으로 얻은 식물 같은 것도 아니고.

“역시 말해줘야겠네요. 근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깨어 있을지.”

시인데?

“한국은 지금 새벽 두 시쯤일걸요.”

- 안 잘 것 같은데. 그냥 잠깐 연락해보고 연결되는지만 확인해봐. 어차피 네 휴대폰 번호 알려줘야 해서 한 번은 연락해야 하잖아.

“그래도 이 늦은 시간에 연락하는 건 너무 상식이 없는……..”

- 괜찮아. 괜찮아.

서지한이 거듭 권했으므로 나는 가지고 있는 소통 유과를 꺼내서 아주 조금만 뜯어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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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 소통 유과’ 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아이템: 소통 유과’: 지속시간 3분 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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